제주, 푸른 바다에서 백록담까지
— 친구들과의 만남, 홀로 걷는 촬영 여행,
그리고 한라산 등반기
제주로 가는 길은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완도에서 실버클라우드 카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에 닿았을 때 여행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바다는 멀리서부터 푸른빛을 펼쳐 보였고, 섬은
천천히 나를 맞이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혼자 걷는 사람에게도
넉넉했다. 성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바다는
끝없이 열려있었고, 성산 일출봉은 바다 위에
오래된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지만, 그 바람 속에는 섬의
생기가 있었다.
다음날 용두암 앞에서는 바위와 파도, 그리고
하늘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검은 현무암
위로 흰 파도가 부서지고, 푸른 바다는 멀리
수평선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 앞에서 자꾸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풍경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을 오래
붙잡아 두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 바다는 장소마다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성산의 바다는 넓고 웅장했고, 용두암의 바다는
거칠고 힘이 있었다. 어느 곳에서는 바람이 먼저
다가왔고, 어느 곳에서는 파도 소리가 먼저 마음을
두드렸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카메라가
있었고, 바다가 있었고, 내 마음을 들어주는 풍경이
있었다.
다음날 임관 42주년 기념 제주 투어 행사를 위해
공항으로 이동 동기들을 만났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사람들과의 1박 2일 모임은 반가움과
웃음으로 채워졌다.
애월과 한림 일대의 감성적인 미술관 탐방을 하고
신비로운 자연 산책로를 걷고 동기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기념 만찬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제주에서 카페를 하는 박기안 동기의 조언을 받아
한라산 등반 계획을 관음사에서 출발
성판악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걷는 동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친구들과 있는 시간은 여행의 즐거움이었고,
혼자가 아닌 삶의 따뜻한 증거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라산을 오르는 날이 왔다.
새벽 4시 어둠 속에서 관음사 코스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산은 조용했다. 숲은 검은
그림자처럼 길 양옆에 서 있었고, 나는 촬영 장비와
먹거리가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배낭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15kg가 넘는 무게는
어깨를 누르고 허리를 당겼다. 그러나 숲길을
걸을수록 마음은 점점 산속으로 들어갔다. 낮은
곳에서는 키 큰 나무들이 길을 감싸고 있었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의 모습은 달라졌다. 숲은
점점 낮아지고, 바람은 더 선명해졌다. 정상
가까이의 작은 나무들은 몸을 낮춘 채 한라산의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높이마다 다른 나무들,
높이마다 다른 하늘,
높이마다 다른 제주가 있었다.
나는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멈추었다. 삼각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산의
웅장함에 압도되었고, 용진각을 지나며 관음사
코스가 왜 아름답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위와
숲, 계곡과 하늘이 하나의 장면처럼 펼쳐졌다.
그곳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백록담 앞에 섰다.
푸른 하늘 아래 백록담은 고요했다. 분화구 안에
고인 물빛은 하늘을 품고 있었고, 능선은 둥글게
세월을 안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한라산
정상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오래 걸어온 내
시간과,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온 내 마음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성판악 코스로 내려오는 길은 길고 반복되는
돌길이었다. 무릎은 점점 아파왔고, 무거운 배낭은
어깨 위에서 하루의 무게가 되었다. 한 걸음 내려설
때마다 다리에 충격이 왔다. 걷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다시 알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걸었다.
백록담의 푸른 물빛을 가슴에 넣고, 한라산의
바람을 등에 지고, 천천히 성판악을 향해 내려왔다.
하산길에서 크고 붉은 일몰을 보았다.
그 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바다 쪽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보며, 마음은 당장 해변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저 붉은 해를 바다 위에서 촬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이미 지쳐 있었다. 무릎은 아팠고, 몸은
더 이상 욕심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일몰을 카메라가 아니라 마음속에 담았다. 해변
촬영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성판악 출구가 보였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곳은 단순한 하산 지점이 아니었다. 긴 산행을
끝까지 견뎌낸 사람만이 만나는 문이었다. 나는 그 출구를 지나며 조용히 감격했다. 그리고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았다.
그 인증서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한 장의 종이 안에는 새벽의 관음사 숲길,
삼각봉의 웅장한 모습, 백록담의 푸른 물빛,
성판악의 긴 돌길, 아픈 무릎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발걸음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번 제주 여행은 친구들과 함께한 즐거움으로
시작해, 혼자 바라본 푸른 바다와 성산, 용두암의
풍경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한라산 백록담
앞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으로 완성되었다.
제주는 나에게 여러 얼굴을 보여주었다.
친구들과 나누는 따뜻한 얼굴,
바다와 바람이 만든 푸른 얼굴,
그리고 한라산이 보여준 깊고 고요한 얼굴.
나는 그 모든 얼굴을 사진으로 남겼고, 마음에도
남겼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제주 여행이 아니라,
친구와 바다와 산을 지나
내 안의 오래된 힘을 다시 확인한 시간이었다.
임관 42주년 기념 제주 투어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준 황금봉 부회장님께 감사인사 전한다.
-푸른 하늘 아래, 백록담에 서다-
새벽 어둠 속
관음사 숲길에 첫발을 놓았다.
무거운 배낭은 어깨를 눌렀고
숲은 말없이 나를 받아주었다.
높이마다 나무의 얼굴은 달랐다.
아래에서는 깊은 숲이 길을 감추고,
중턱에서는 바람이 가지를 흔들고,
정상 가까이에서는
작은 나무들이 몸을 낮추고 있었다.
나는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삼각봉을 지나
거친 돌길을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푸른 하늘 아래
백록담 앞에 섰다.
그곳에는 말보다 깊은 고요가 있었고,
하늘을 품은 물빛이 있었다.
나는 산을 본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포기하지 않은 내 마음을 보았다.
내려오는 성판악 길은 길고도 힘들었다.
무릎은 아팠고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래도 나는 걸었다.
백록담의 푸른빛을 가슴에 넣고
끝까지 내려왔다.
성판악 출구에서
한 장의 인증서를 받았다.
그 이름과 날짜 사이에
새벽 숲길과 백록담,
아픈 무릎과 끝내 포기하지 않은 발걸음이
함께 적혀 있었다.
오늘 나는
한라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하나를
끝까지 데리고 내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