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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다시 읽기

최윤 소설 작품론 / 이경재 평론가

작성자이난희|작성시간21.04.18|조회수52 목록 댓글 0

 

 갇혔던 농가에서 잡초는 큰 위로가 되었다. 창문 주위에는 흙벽 사이로 이름 모를 잡풀 서너 포기가 잔잔하게 키를 키웠다. 그 작은 것들이 키가 크는 것이 감지될 정도로 창문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 보는 일 외에 할 일 없이 낮 시간이 지나갔다. 물이 그들에게까지 닿기를 기대하며 흙벽에 흠뻑 물을 뿌려 주었다. 물은 충분히 있었다. 그것이 그 집 안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하게 선한 행동이었다. 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도 아닌, 산자락을 둘러친 넓은 밭 한가운 데 버려진 것 같은 농가. 그곳에는 다른 곳 보다 빨리 겨울이 왔고 잡초들은 겨울잠에 진입한 듯 스르르 시들어 없어졌다. 

                                                                                                           -「옐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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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함께 사는 법

 

(…)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는 윤리적 사건

 

 최윤의 「옐로」는 ‘타자와 함께 살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한복판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이 있으며, 터널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쪽 편에는 책을 만들고 반찬을 준비하는 앙증한 이층집이 있다면, 저쪽 편에는 ‘내’가 2개월여 납치 감금되었던 외딴 농가가 있다.

(…)

 

 타자의 얼굴이 출현하는 윤리적 사건은 터널 반대편의 앙증한 이층집에서도 다시 한번 일어난다. 외딴 농가가 있는 터널 반대편의 세계에서 ‘나’와 정아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 부모님이 귀향하여 혼자가 된 ‘나’와 남편과 사별한 정아는 실제적인 이유로도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 공동체와 관련해 ‘나’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바로 슈퍼집 아들이다. 그는 상당 기간 신상 정보가 공개된 적이 있는 미성년 성폭력범이었다. 납치 감금된 경험이 있는 ‘내’가 이 슈펴집 청년을 경계하는 것과 달리, 정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청년을 점점 자신의 집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슈퍼집 청년은 “우리”(‘나’와 정연)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정원 테이블의 첫 손님이 되기도 하고, 정아는 슈퍼집 청년이 배달을 오면 집에 들어와 차를 같이 마시자고 권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중퇴인 청년은 나중에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층집을 방문하여 정아의 수업을 듣는다. “청년은 한 걸음씩 집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집으로의 끌어들임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이미 타자의 얼굴과 대면한 경험이 있는 ‘나’는 결국 또 한 명의 타자인 청년을 받아들이게 된다. 집에 찾아와 정아에게 공부를 배우는 청년은 “우리 모두의 골머리를 때”리지만, 이 두통은 곧 “집안의 활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옐로」는 “이렇게 조금씩 나와 정아는, 옐로가 즐기기 시작한 인터넷 자동차 게임에서 그렇듯 수시로 우리 앞을 막아서는 터널들에서 잘 빠져나오는 법을 조금씩 익힌다.”는 희망 찬 문장으로 끝난다. 우리는 타자의 고통스러운 얼굴 앞에서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얼굴에 담겨 있는 불확실함이 주는 원초적 공포로 인해 ‘그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살인의 욕망도 느낀다. 납치 감금된 경험이 있는 ‘나’에게 미성년 성폭력의 경험이 있는 이 청년은 바로 후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레비나스가 인간 본연의 도덕 감정이나 의지를 뛰어넘어 절대적 수동성으로 자신을 낮추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윤리의 핵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박해를 받는 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의 이면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대목은 ‘내’가 바로 그러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평온함에 감춰진 파열의 틈새

 

 타자와 함께 사는 것은 가능할까. 최윤은 한국문학에서 볼 수 없던 안정되고 세련된 화법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출하고 있다. 「옐로」는 타자의 얼굴이 출현하는 윤리적 사건을 실험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헐벗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수동성과 책임을 보여주는 타자윤리학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유의 문법」은 「옐로」가 다다른 그 숭고한 타자윤리학의 이상이, 소유욕으로 들끓 는 지금의 현실과 맞부딪쳤을 때 발생하는 파열을 그린 작품이다. 마지막에 목도할 수밖에 없는 계곡마을의 폐허는 역설적으로 타자 윤리학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웅변한다.

 

 「친밀의 고도」는 보다 구체적인 일상의 차원에서 타자와 친밀하게 사는 법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타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절대적인 기다림의 시간임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발견되는 세련됨과 안정감의 이면에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 모종의 불편함과 이질감이 꿈틀거린다.

 

 평온함의 표면에 감춰진 파열의 틈새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의 순간과 대면하는 과정이야말로 최윤 소설을 읽는 독자의 가장 큰 기쁨이자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쁨과 공포로 인해 아마도 최윤의 문학은 오랫동안 한국문학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경재, 이 계절의 작가•최 윤 작품론 일부 / 학산문학 2020년 겨울호

 

 

  이경재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단독성의 박물관』『한설야와 이데올로기의 서사학』 외.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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