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편에서 미소를 띠고 지켜보던 여인은 조용히 일어나 한 걸음 다가와 선다. 이제 M과 여인의 간격은 1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M은 이쪽을 향해 다소곳이 내밀어진 여인의 두 손바닥을, 여인의 가늘고 흰 손가락을, 얼굴을,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아버님. 이제 눈을 감아주세요.”
스피커의 재촉에 M은 마지못해 눈을 감고 기다린다. 이윽고 무엇인가 M의 손바닥 위로 조용히 겹쳐진다. 손이다. 사람의 두 손. 체온이 담긴 인간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바닥. 아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 사랑해요 어머님. 아들 부부의 감격스런 흐느낌이 거침없이 터진다. 오오, M의 입에서도 탄식인지 오열인지 모를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손과 손이 엉킨다. 체온과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서로 섞인다. 이렇게 생생한 부피와 촉감을 가진 손이라니! 어흐흑, 아들이 운다. 며느리도 흐느낀다. 한순간 M은 돌연 두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이쪽으로 허수아비처럼 내밀어진 여인의 텅 빈 손을, 손바닥을, 회칠한 듯 하얀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아니야. 저건 아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형체. 그저 허황한 빛 무더기일 뿐……’
마침내 여인이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이내 문을 열고 홀연 사라지고 만다. 문방구점 앞은 처음처럼 텅 비어 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꼭 다시 찾아올게요.”
“어머님, 행복하게 지내세요. 다시 만날 때까지……”
격렬한 감정의 파고가 한바탕 휘돌다 차츰 가라앉고 난 뒤에도, 현악기의 애절한 선율은 한참이나 더 그들의 머리 위를 성스러운 후광처럼 맴돌고 있다. 뒤늦게야 M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닌 어떤 기이한 감정의 덩어리가 M을 송두리째 집어 삼킨다. 대상도 까닭도 알 수 없는 거대한 분노와 슬픔의 덩어리.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맘대로 복제해내다가, 이젠 인간 그리고 인간의 생조차도 무한으로 재생산해내는 세상. 그들의 그 끝없는 욕망 앞에서 M은 다만 무섭고 슬퍼진다.
(…)
M은 그것이 내일의 자기 모습임을 알았다.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공간, 허무의 시간 안에 그들은 제멋대로 M을 영원히 감금해버릴 것이다. 천년 고분 석관에 눕혀진 미라처럼, 영원히 썩지도 지워지지도 못하는 저주받은 그림자로 M은 이 세상에 유폐되고 말리라…….
M은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지팡이를 찾아 쥐고 뒤뚱뒤뚱 방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선다. 불빛 환한 복도는 아무도 없다. M은 T자형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맨 끝까지 지팡이에 의지해 한발 한발 걸어 나간다. 그 막다른 벽엔 작은 환기창이 딱 한 개 달려 있다. M은 창유리에 매달리듯 간신히 몸을 기대어 선다. 손바닥으로 힘껏 밀어보지만 창은 견고하게 닫혀 있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M은 창유리에 이마를 기댄다. 어둠 저편에 가로등만 환영처럼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M은 안간힘으로 눈을 부릅뜬 채 어둠 저편을 한사코 내다본다.
문득 눈앞이 환해진다. 바다. 눈부신 한여름의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 광활하고 푸르른 바다. 지금 M은 그 바다를 마주하고 혼자 서 있다. 까마득한 절벽 꼭대기 위에서 M은 마지막 심호흡을 한다. 마침내 M이 두 팔을 머리 위로 활짝 펼친 채 힘찬 도움닫기를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아아!
발가벗은 M의 젊고 싱싱한 몸뚱이가 한 마리 새처럼 허공으로 까마득히 솟구쳐 오른다. 발아래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빛이다.
-임철우 「천년의 생」 중에서 《학산문학》 202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