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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다시 읽기

Culture 대담/ 성동혁 시인

작성자이난희|작성시간21.05.16|조회수82 목록 댓글 0

 

Culture 대담

차선이 없는 일 성동혁 시인

 

-계간 《학산문학》  2020년 여름호



이번 Culture대담은 성동혁 시인을 초대하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정부대응정책 일환인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으로 아쉽지만 대담 대신 작가의 ‘독백’을 담았습니다. 다섯 번의 큰 수술을 받고 여섯 번째 목숨을 살고 있다는 시인이 풀어내는 이야기가 시인의 시처럼 투명하게, 명랑한 슬픔으로, 어떤 힘으로 독자들과 만나길 기대해봅니다. -편집자 주


 

 

‘어떤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살아라’ 하는 말보다, ‘살아 있어라’, ‘건강만 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숨을 쉬고, 걷고, 밥을 먹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은 잘했다고, 충분하다고 했어요. 『6』은 제가 쓴 시집이 아니에요. 저를 살려낸 여러 사람들의 시집이지요. 혹여, 『6』의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면, 『6』이 제 옆을 지킨 사람들을 닮았기 때문일 거예요.

 

『6』이 세상에 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죠. 저의 관심은 그런 게 아니었죠. 그저 『6』을 편지처럼 들고 감사한 사람들을 찾아갈 생각뿐이었죠.

 

『6』은 많은 독자를 만났어요. 독자분들이 『6』 안에 숨 쉬는 저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6』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실제 낭독회 때, 선물을 받아 읽게 되었다는 독자분들을 만나기도 하구요. 감사한 일이에요. 정말.

 

*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매너리즘이 있었어요. 첫 시집을 썼을 당시와 멀어지기도, 달라지기도 한 부분이 있는데 자꾸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어려웠어요. 더 이상 예전의 제 시를 읽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 제가 제 시를 낭독하지 않는 낭독회를 하게 되었어요. 저 대신 독자들이 제 시를 낭독하고, 저는 귀담아듣는 낭독회였지요.

 

 누가 올지, 어떤 시를 낭독할지 알 수 없었죠. 그 낭독회는 온전히 독자분들께서 만들어주신 근사한 낭독회가 되었어요. 독자분들은 각각 선택한 시를 낭독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제 시를 낭독하다가 울음을 터뜨린 독자분이 계셨어요. 힘든 시기에 『6』을 반복하여 읽었다며, 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어요. 그가 제게 얼마나 과분한 마음을 주었는지 모를 거예요. 가끔 제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세요. 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부끄러워져요.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 저인 걸 아니까요. 『6』이 그들을 만나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니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어요.

 

*

 

 평소 <봄날의 책> 도서들을 애정했어요. 굳건한 시선과 단정한 형태, 예민한 감각들을요. 대표님을 만나고 그 애정은 더욱 견고해졌어요. 대표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해요. 계약을 하고자 만난 것이 아니었어요. 그저 책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고 돌아온 자리였어요.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그가 백팩을 메고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어요. 그건 제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근사함이었어요.

 두 번째 시집은 겉과 속 모두 제가 원하는 모습이길 바랐어요. 많은 출판사들은 정해진 디자인이 있죠. 표지의 색상 정도가 시인이 의도할 수 있는 외형의 전부인 경우가 많죠. 그렇기에 정해진 틀의 한국 시인선이 없는 곳에서, 저의 감각을 이해하고, 무엇보다 저의 시를 애정하는 분과 자유로운 작업을 할 수 있길 바랐어요. 그러나 그건 출판사와 시인 모두 큰 모험을 하는 것이기도 했어요. 다행히 우린 모험을 하기로 했어요. 서로를 믿기로 했어요.

 

 

 

*

 

 예술 작품엔 생명력이 있죠. 그러나 모든 작품이 동일한 생명력을 지닌 건 아니죠. 자신의 삶과 함께 움직이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죠.

 땅이 어디론가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는 것 같은 시기가 있었죠. 속도감도 방향감각도 상실한 시기였어요. 평소 꾸지 않던 악몽을 자주 꾸기도 했고요. 악몽을 꾸지 않고, 평온한 잠을 자고 싶었어요. 전시회에 가서 어떤 그림을 본 후, 어쩌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그 작품이 바로 김현정 작가의 <파도(Waves)>였어요. 아직도 <파도(Waves)> 앞에 서 있을 때의 감각이 생생해요. 거대한 파도가 악몽을 휩쓸어 가는 것 같았어요. 전시 곳곳에 있는 물결들이 제 몸에 엉겨 붙어 있는 악몽을 휩쓸어갈 것 같았어요.

 쓰지 않은 인세와 원고료를 준비했어요. 전시 때 보았던 작품 중 한 점을 구입해 침대 맡에 걸어 두려고요. 그 그림이 머리맡에 있으면 더 이상 나쁜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문의한 그림이 판매가 된 후였어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며 <파도(Waves)>만이 원고를 온전히 담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대표님께 시집의 표지는 누누이 김현정 작가의 <파도(Waves)>여야만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저의 시간들이,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길을 잃지 않고, 파도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길 바랐어요. 원고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파도(Waves)>를 선물하는 일이었어요.

 

 

*

 

 『아네모네』는 종이의 두께와 표지의 재질까지 하나하나 함께 상의하고 선택한 시집이에요. 저는 <파도(Waves)>가 저를 찾아온 것처럼 독자들에게도 닿길 바랐어요. 그 힘을 알고 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김현정 작가님이 흔쾌히 <파도(Waves)>의 사용을 허락해 주셨어요.

 대표님, 디자이너와 함께, <파도(Waves)>를 어떻게 표지에 담을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림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길 바랐어요. 채우기보다 덜어내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림의 좋은 기운을 빼앗고 싶지 않았죠. 디자이너 분은 제 마음과 감각을 이해해 주셨어요. 함께 논의를 하다가 디자이너 분께서, 표지에서 제목과 작가 이름 등을 모두 빼자고 제안해 주셨어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 같았어요. 더불어 어려운 결정을 해 주신 대표님 덕분에, 제목과 작가 이름, 어떤 정보도 없는 표지가 완성되었어요. 표지 가득 <파도(Waves)>만이 흐르게 되었지요. 책등에만 조그맣게 제목과 이름 등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겼어요. 책의 양쪽 날개를 펴면 하나로 이어진 <파도(Waves)>를 보실 수 있어요.

 

                         김현정 <파도(Waves), charcoal on paper, 76.5x111.6cm, 2015>

 

*

 

제게 친구는 최고의 칭호예요. 부르는 것만으로 울컥하는 말이에요. 늘 옆에 있어 주는 친구들 덕에 많은 일들이 괜찮아져요. 친구라서 아는 제 모습이 있지요. 임승유 시인은 제가 깊이 신뢰하는 시인이자 친구예요. 저와 제 시를 누구보다 세심히 들여다봐주는 분이에요. 그가 친구의 마음으로 발문을 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그의 발문을 읽고 제 친구들이 운 건, 저와 기꺼이 친구가 되어 준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아네모네』가 나오기 전, 식탁에 앉아 발문을 천천히 읽었어요. 너무 아름다운 편지를 받은 것 같아 고맙다는 말도 함부로 나오지 않았어요. 건강한 쪽으로 기우는 삶을 살자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누난 이런 식으로 나를 살펴주는 사람이구나 느꼈어요.

 

 <봄날의 책>, 김현정 작가의 <파도(Waves)>, 임승유 시인의 발문. 이 셋이 『아네모네』 안에서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이미 커다란 선물을 받았어요. 이런 방식으로 아름다운 편지를 받고, 이런 방식으로 좋아하던 그림을 서가에 전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어떤 차선도 상상할 수 없었어요. <봄날의 책>이기에, <파도(Waves)>이기에, 임승유 시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

 

 언젠가, 이런 글을 쓸 수 있길 바랐어요. 어떤 일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기도 하니까요. 가끔은 유난스럽더라도, 온전히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며, 첫 번째 시집에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이 생각났어요. 물론 첫 번째 시집을 낼 당시에도 감사했지만 다시 한 번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제 두 번째 시집이 그들에게 반가운 안부 인사가 되길 바라요. 그들 덕에 두 번째 시집이 있을 수 있었어요. 언젠가 세 번째 발걸음을 뗄 때 『아네모네』의 사람들이 생각날 거라 예감해요. 그 힘이 저를 어떤 곳으로 이끌 거예요.

 친구의 편지가 저를 한 뼘 더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파도(Waves)>가 제게 커다란 위로였던 것처럼, 『아네모네』가 독자 분들께 그러하길 소망해요. 머리맡의 나쁜 꿈들을 『아네모네』가 휩쓸어가길 바라요. 내내 건강하세요.

 

 

 

눈을 기다리고 있다

서랍을 열고

정말

눈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도 미래가 주어진 것이라면

그건 온전히 눈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왜 내가 잠든 후에 잠드는가

눈은 왜 내가 잠들어야 내리는 걸까

서랍을 안고 자면

여름에 접어 두었던 옷을 펴면

증오를 버리거나

부엌에 들어가 마른 싱크대에 물을 틀면

눈은 내게도 온전히 쌓일 수 있는 기체인가

당신은 내게도 머물 수 있는 기체인가

성에가 낀 유리창으로 향하는, 나의 침대맡엔

내가 아주 희박해지면

내가 아주 희미해지면

누가 앉아 있을까

마지막 애인에겐 미안한 일이 많았다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 둘 수 있다면

 

-성동혁 「리시안셔스」, (첫 시집 『6』, 민음사, 2014.)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요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은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내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온 묘목 아니죠

 

-성동혁 「아네모네」, (두 번째 시집 『아네모네』, 봄날의 책, 2019)

 

 

 

성동혁

2011년《세계의 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6』 『아네모네』가 있음. 

 

성동혁 시집 『아네모네』, 봄날의 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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