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모명제 두사충 배롱나무
-하늘 끝에 선 늙은이 돌아갈 수 없어
당나라 시인 두보의 후손 두사충(杜師忠)의 아버지는 기주자사를 지낸 두교림이다. 두사충은 1592년 12월 명 장수 이여송의 수륙지획주사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병영과 진 터 구축의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평양성 탈환 뒤 벽제관 전투 패배의 책임을 이여송이 두사충에게 씌워 참수하려 했다. 이때 좌찬성 정탁의 구명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는 명 장수 유정을 따라 다시 참전하여 자신의 매형인 수군도독 진린의 작전참모장이 되었다.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 8천 명이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운 뒤, 7월 16일 진린의 명 수군 5천 명이 합류, 연합 함대를 이뤘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 19일 녹동 절이포, 9월 20일 여수 율촌의 장도, 10월 7일 순천 왜교성 해전에서 왜와 싸웠다. 이때 이순신은 두사충의 능력과 인품을 기려 ‘북으로 가서 고락을 함께하고 동으로 와서도 생사를 같이하네.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 아래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라는 한시를 지어주었다.
정유재란 막바지인 11월 19일이다.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해 퇴각하는 왜선을 추격하던 중 이순신은 노량 관음포에서 명의 제독 진린을 구하려다 왜의 유탄에 맞았다. 이순신의 유해는 남해 충렬사에 잠시 머문 뒤 곧장 완도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옮겨져 11월 22일 월송대에 임시 안장되었다. 이 관음포 해전에서 명 장수 등자룡도 전사하였기에 해를 넘긴 1599년 1월 11일 진린은 제문을 지어 이순신과 등자룡을 기리는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2월 초 고금도를 나온 진린은 2월 8일 한양에서 선조 참여하에 등자룡의 장례식을 먼저 치렀다. 또 이순신의 유해 호송은 처남 두사충에게 맡겼다. 풍수지리에 밝은 두사충이 아산 음봉의 금성산에 묏자리를 잡아 이순신의 유해를 모신 건 등자룡 장례식 사흘 뒤인 2월 11일이다. 선조가 등자룡 장례를 이순신 보다 먼저 치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례를 치르고 두사충은 명군에 합류 압록강에 이르러 진린에게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라고 한 뒤, 두 아들 두산과 두일건을 데리고 대구에 귀화했다. ‘조선에 와 창을 베개 삼아 들판에서 잠자며 간난고초를 겪으면서도 기습과 정공에 실패하지 않아 중흥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라고 자부했던 두사충이 명에 가지 않은 것은 ‘차라리 조선사람이 될지언정 멀잖아 오랑캐가 될 명나라 백성은 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사충은 머지않아 명이 청에 멸망할 것이라 여겼다. 그 뒤 진린의 손자인 감국수위사 진영소도 아버지 진구경이 애산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1644년 명이 망하자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조선으로 귀화했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에게 선조는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일대 땅을 하사했다. 1601년 성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하자 두사충은 지금의 수성구 계산 성당이 있는 곳으로 터를 옮겼다. 그리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으며 재혼하였다. 이 계산동 뽕나무골목에 두사충과 조선 여인의 사랑 얘기가 있는 연유이다. 두사충은 말년에 지금의 대덕산 밑으로 옮겨 단을 쌓아 배례하며 수만 리 떨어진 고향의 부인과 형제를 그리워했다. 두사충은 이 대덕산이 ‘대구지세의 이마’라며 ‘최정산’, 마을 이름은 대명동(大明洞)이라 했다. 그리고 담이 심해져 죽음이 가까워지자 일찍이 살펴둔 묘터를 아들에게 일러주려 형제봉 고개를 넘으려다 3차례나 넘지 못했고, 후손들은 어쩔 수 없어 형제봉 기슭에 묘를 썼다. 이 두사충을 기리는 모명제를 둘러보고 묘역을 지키는 고향에서 온 배롱나무 앞에서 그가 압록강에서 진린과 이별하고 읊은 ‘하늘 끝에 선 늙은이 돌아갈 수 없어, 저물 무렵 동녘 큰 강에서 목놓아 우네’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