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녹동서원 김충선 나무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1592년 4월 13일 아침 8시 왜국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쓰시마를 나와 오후 5시에 부산진에 이르고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도 부산 동래에 상륙하였다. 이때 가토 왜군의 좌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3천 명의 조총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밀양부사 박진은 동래성으로 출전했으나 성이 함락되고, 밀양성마저 잃었다. 곧 삼랑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역시 왜군을 막지 못했다. 1592년 5월 박진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번엔 왜군이 점령한 경주성 가까이 안강에 진을 쳤다. 이 무렵 사야가는 ‘명분 없는 전쟁에 선봉이 되어 조선으로 왔습니다’라며 5백여 왜병을 이끌고 박진에게 항복하였다.
항왜 사야가는 1592년 9월 경상도 관찰사 김수 휘하에서 참전하였다. 이어 1593년 4월 경주 이견대 싸움에서 왜병 300여 급을 얻는데 공헌하여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이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사야가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김씨에 충선이라는 이름과 정3품 첨지중추부사직을 내렸다. 사성(賜姓)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 김충선은 화포와 조총,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왜의 재침에 김충선은 경상우병사 김응서 휘하에서 종군했다. 11월 무렵 왜군 1만여 명이 경남 의령의 정암진을 건널 때 조명연합군이 기마병에게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빠졌다. 이때 김충선을 비롯한 항왜들이 앞장서서 포위망을 뚫었다. 또 같은 해 12월 명군 6만 명, 조선군 2만 명이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공략에 나섰다. 이때 명군의 희생이 크자 명 제독 마귀가 분노하여 패전 책임을 김응서의 판단 착오로 떠넘기며 죽이려 했다. 이때 김충선은 마귀에게 자신이 전공을 세우면 김응서를 용서하라며 군령장을 보내 요청하고, 허락을 받았다. 김충선은 1598년 1월 울산 증성 전투에서 왜를 크게 이기는데 공헌하여 약속을 지켰다.
1600년 8년여 전란이 끝나고 김충선은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달성군 우록동에 정착했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은 김응서 휘하의 항왜를 순차적으로 북방으로 이주시키려 했다. 1603년 김충선은 자원하여 북방 근무를 했고 1613년 갑옷을 벗었다. 이때 선조는 정2품 정헌대부 교지와 ‘자청하여 국방에 나섰으니 그 마음이 실로 가상하다’는 어필을 하사했다.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점령했으나 안산전투에서 패하고 죽었다. 이때 북방을 지키던 항왜 130여 명을 이끌고 난에 합세했던 이괄의 부장 서아지가 일본으로 도망치려 하자 김충선이 밀양까지 쫓아가 죽였다. 이에 인조가 김충선에게 항왜 서아지의 집과 토지를 하사했으나, 이를 군대의 둔전으로 바쳤다. 또 1627년 후금의 침략에 사냥꾼인 산행포수 17명, 항왜 자식 25명과 참전하고 1636년 병자호란에 항왜 150여명의 선봉에 서서 청군을 격파했다. 그러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크게 울부짖으며 우록으로 돌아와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조상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라며 고국이 그리워 피울음을 삼켰다. 여기 달성 우록동에 항왜에서 우러러보는 조선인이 된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과 무덤이 있다. 김충선은 우미산(牛尾山) 아래 소 굴레 모양의 우륵(牛勒)을 ‘은거하는 사람은 사슴을 벗하고 한가로움을 바란다. 사슴과 벗 삼는 우록(友鹿)은 내가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함과 같다. 여기 한 칸 띠 집을 지어 남기니 이곳이 바로 원하는 내 땅’이라고 했다. 그렇게 김충선은 역사의 현장에서 숱한 난관을 극복하며 경원, 경신, 우상, 계인, 경인 등 4남 1녀를 기르고 1642년 9월 30일, 72세에 눈을 감았다. 그 녹동서원을 지키는 대숲과 배롱나무를 바라보며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 어지러운 역사의 되풀이’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