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화암사 풍악 제1루 전나무
-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잃어버린 게 아쉬움이 더 크다지만, 한국전쟁 말기에 남과 북이 어떻게든 서로 차지하려 했던 곳이 금강산이다. 이 금강산을 연초록 새싹과 꽃으로 화사한 봄은 금강, 녹음이 뒤덮은 여름은 봉래, 오색단풍이 물든 가을은 풍악, 기암괴석이 드러나는 겨울은 개골, 그렇게 4 이름을 가진 산이다. 흔히 1만 2천봉이라 하는 금강산의 최고봉은 비로봉(1638m)이고 강원도의 회양, 통천, 고성 등 3개 군에 걸쳐 있기에 아쉽지만 우리 남쪽도 그 한 자락을 안고 있다.
또 끝자락이자 첫 자락이 금강산 제1봉 신선대 아래에 터를 잡았기에,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들머리이자 마무리로 둘러보는 절이 바로 금강산 화암사이다.
신라 혜공왕 5년(769)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이 화암사는 광해군 14년(1622)에 불에 타 규모가 축소되었으나, 인조 11년(1633) 이곳 간성 군수를 지낸 이식은 ‘천후산 미시파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으므로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 절은 산허리에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 모든 산과 평원 심곡이 눈 아래 보이며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절 뒤에는 반석과 폭포가 특수한 모양을 하고 있어 가히 볼만하다’고 간성지 화암사 조에 적었다.
신선대는 이름 그대로 신선이 노닐던 바위이고 ‘하늘이 운다’는 뜻의 천후산(天吼山) 이름은 석굴에서 바람이 나와서인데, 이 때문에 양양과 간성 사이에 큰바람이 잦다고 한다. 절 앞의 수바위는 이삭수(穗)자이고 화암사의 화자도 벼화(禾)자이니 쌀 절이다. 적과 싸울 때 이 바위를 짚으로 둘러싸 마치 볏가리같이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 이 수바위 위에 웅덩이가 파여 항상 물이 고여 있는데 가뭄 때 이물을 주위에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고 한다. 또 이 수바위에 오르면 금강산을 만들 때, 이곳에 눌러앉았다는 신묘한 울산바위가 이웃하여 마주한다.
그런데 화암사 창건 이래 큰불이 다섯 번이나 났다. 화암의 화(禾)자가 불화(火)자와 발음이 같아서 물수(水)자와 발음이 같은 이삭수(穗)자 수바위라 했다 하니, 그 소박한 바람을 어찌 탓하랴? 싶다. 또 이 화암사에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하사한 6첩 병풍과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그리고 절을 창건한 진표당의 진영을 비롯해 16점의 고승들 진영이 있었다. 하지만 기록만 있을 뿐,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절의 현판과 탱화 몇 점마저도 도난당하고 말았다. 다만 금강산 제1 일봉 신선봉에서 발원하여 장장 30리에 걸쳐 소와 폭포를 이루고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사이를 흘러가는 맑은 물과 싱그러운 바람만은 아직 그 누구도 훔쳐 가지 못하고 있으니, 그나마 참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이곳 화암사 일원에서 세계 잼버리대회가 열렸다. 그때 대회에 참가한 천여 명의 불교국가 청소년들이 여기 화암사 법당에서 수계식을 가졌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물론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곳 들머리에서 금강산 기행을 시작하는 날도 올 것이다.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그날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 화암사는 한여름 절 앞의 계곡에서 풍영하며 탁족 하기에 좋지만,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그러기에 화암사에 금강산의 가을 이름인 풍악 제1루가 있다.
이곳 화암사에도 세월이 깃든 나무가 여럿이지만, 이 풍악 제1루 옆의 전나무 역시 화암사를 지켜온 수문장이다. 앞으로는 화마와 도둑이 얼씬도 못 하게 지키는 금강산 들머리 지킴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남북이 하나 되는 것에 대한 바람은 두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