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도경당
조선중기때의 대표적인 대학자인 율곡이이李珥선생은 아홉번 과거를 봐서 아홉번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는 당대의 명유였다.
아울러 율곡선생은 탁월한 학문뿐만 아니라 앞일을 가히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을 가진 현인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을 임금에게 주청했다는 일은 후세의 우리들에게도 널리 사실로 통용되고 있다.
반면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고 하는 서애 류성룡선생은 전란발발의 전격적책임이 있는 한편, 옹졸하며 현실감각이 뛰떨어진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십만양병설'의 문제점이다.
율곡이이의 높은 식견을 극도로 과장화 해 버리는 바람에 임진왜란때의 명재상인 서애선생의 위업은 한낱 초라한 평범하고 폐쇠적인 것으로 변모해버린 것이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서애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그 누구보다도 혼란한 나라를 수습하는데에 헌신했던 공로자였다.
이순신과 권율 같은 인재를 등용해 왜적들의 침략을 봉쇄하고자 했으며, 민생 안정에도 최선의 노력을 기하였다.
그러한 나라의 공로자를 율곡선생이라는 한 학자를 대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옹졸, 편협한 인물로 평가절하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더욱이 율곡선생의 의견에 반대하여 수준낮은 인물이 된다면 그 당사자에게 있어 그것만큼 편파적이고 억울한 일은 없으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정말 율곡선생이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예지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을까이다.
먼저 '십만양병설'이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십년전인 율곡선생이 선조임금에게 앞일의 전란을 대비하여 십만의 병력을 양성하자라는 율곡선생의 주장이다.
율곡선생의 그러한 주장에 양병불가론을 펼쳤던 이가 바로 서애선생이라고 하는데 이 서애선생은 '십만양병설반대'로 인하여 훗날 따가운 질책과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또한 후세들은 서애선생이 임난발발 후 율곡선생과의 고사[古事=옛일]를 떠올리면서 심한 죄책감과 후회를 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한 서애류성룡은 직접적인 전란의 주범으로 묘사되어졌다.
한편,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이 나타나는 사서로는 사계김장생선생의 '율곡전서'등등이 있다.
우선 사계선생의 율곡전서를 보자면
[일찍이 경연에서 율곡이 청하기를 '십만의 병력을 양성하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채 안되어 가히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의 발언이 [선조실록]에는 나오지 않고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사계선생의 저서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율곡전서'는 율곡선생 한사람의 개인행장을 다룬 지금의 위인전이나 다름없다.
즉 '십만양병설'의 발단은 사계선생의 '율곡전서'에서 비롯되는 바이다.
따라서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은 사계선생을 비롯한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들의 개인문집이 아니면 찾아볼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선조수정실록'에 율곡선생이 임금에게 '십만양병설'의 의견을 제시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분명 알아둘 것은 '선조수정실록'이란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이른바 '서인'들이 반대파가 편찬한 '선조실록'을 수정편찬한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기록자체가 객관적일 수 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이라는 것은 인조반정 후 서인들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효종8년인 1657년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맺게 되었다.
게다가 '선조수정실록'은 편찬과정에서 각 개인들의 사초와 비문, 행장, 잡기등을 수집하여 편찬작업을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율곡선생의 수제자인 사계김장생선생의 영향력이 가장 커 '율곡전서'를 토대로 하였다.
사계선생은 실제적으로 서인의 초대영수로 받들어지고 있었고 그의 저서들은 서인들에게 엄청난 작용과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계선생의 뒤를 이은 우암송시열선생또한 율곡선생관련저서인 '율곡연보'를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율곡연보'와 '선조수정실록'이 서로 손발이 맞지않는다는 것이다.
'율곡연보'에서는 선조 16년 4월에 율곡선생이 십만양병을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고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 15년 9월에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 애시당초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선조실록'에는 '십만양병설'같은 것은 아예 나오지도 않고 후에 서인들이 멋대로 지은 '선조수정실록'과 서인의 각 개인들이 쓴 행장에만 나오는 바 이것은 명백한 서인의 날조라 할 수 있다.
물론 율곡선생은 범인과 다른 당대의 명유임은 분명하고 앞일을 내다볼 수 있는 식견은 가졌던 분이다.
하지만 퇴계이황선생의 제자인 서애류성룡선생또한 율곡선생과 같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도 수준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오죽하면 퇴계선생이 서애선생을 일러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했겠으며 20을 갓 넘은 나이에 명나라의 유생들이 '류선생[柳先生]'이라고 불러었겠는가.
그만한 성품과 걸맞는 학문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서애선생은 명나라사람들에게까지 존경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누구보다 먼저 임금에게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을 인재로 천거하여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역사 속에 전면 등장시키면서 민족의 위대한 영웅의 탄생을 알리며 국가 초유의 국난을 극복시켜 나가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한 서애선생이 율곡선생의 의견에 반대했다고 해서 '악인'이 되고 현실감각이 뛰떨어진 인물로 규탄받는다면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어디에 없을 것이다.
서애선생이 만약 우둔한 인물이었다면 가히'십만양병설'과 대등한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인 '비변오책'을 주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혹 '십만양병설'이 맞다 할지라도 서애선생은 당대의 여러가지 현실적인 정황을 염두한 후 '십만양병설'을 반대했을 것이다.
서애선생의 '비변오책'이나 율곡의 '십만양병설'도 그 성격은 변방을 방어하자는데에는 동일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십만양병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리 현실적이지 못했고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병력은 이미 10만명이었다.
물론 그 병력과 조선의 국방력이 실상과는 달리 저하되고 허술한 점도 있겠지만 명종대까지 지속되었던 문정왕후, 윤원형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의 조선은 재정적인 면에서도 10만의 병사들을 양성한다는 것은 극히 부담이 되는 것이다.
한편, 서애선생이 '비변오책'을 주장한 연대는 율곡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라는 1583년 4월보다 더 빠른 연대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십만양병설은 율곡선생사후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선생을 높이기 위한 장치이며 어처구니 없는 선전성을 띄고 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서인 노론가문의 사학자 두계이병도가 서인들의 저서들을 종합하여 '한국사대관'을 발간했다.
현세가 알고 있는 '십만양병설'은 바로 이병도의 '한국사대관'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 <덧붙여 국사교과서의 '십만양병설'은 바로 '한국사대관'에서 택한 것이었다.>
그러니 '십만양병설'의 진실은 서인들의 개인저서에서만 보인다는 점에서 거의 설득력이 없고 그것은 서인이라는 당파의 위대함을 각색하는 것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끝으로 덧붙이건대 솔직히 말하자면 구한말, 일본에게 나라를 들어바친 이들은 모두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 기호학파들이었다.
이병도의 친척조부인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또한 노론이었으며 친일파로 돌아섰던 박영효나 윤치호 역시 노론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친일파들의 학파를 굳이 따지자면 거의 대부분이 노론 기호학파출신들이다.
이와 반대로 퇴계선생의 학파에서는 이상하게도 친일파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만주나 국외전역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 후 해방이 되자 기호학파출신인 친일인사들이 대거 이승만정권에 기용되면서 그들이 나라의 역사를 논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 일본침략기시절, 조선사편수회에서 조국의 역사를 날조하는 것에 대해 적극 참여한 두계 이병도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역사란 과연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 승자를 위한 역사이다.
승자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지기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승자의 중심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빙자로 세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을 세월속에 묻어버리면서 악인으로 매도한다면 승자의 역사는 분명히 사악한 거짓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성은 물론이거니와 설득력, 객관적인 부분들까지 결여된다.
이것의 가장 결정적 대표가 바로 '십만양병설'이라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역사란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승자들이 역사를 각색하고 그 사실을 감춘다고 할지라도 그 자취와 흔적이 남겨짐에 따라 그 꼬리는 반드시 밞히고 그 실체는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묘미이자 역사정의의 교훈적 가치인 것이다.
진실은 항시 밝혀지고 정의는 언제나 실현을 위해 한걸음한걸음 진보한다..
조선중기때의 대표적인 대학자인 율곡이이李珥선생은 아홉번 과거를 봐서 아홉번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는 당대의 명유였다.
아울러 율곡선생은 탁월한 학문뿐만 아니라 앞일을 가히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을 가진 현인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을 임금에게 주청했다는 일은 후세의 우리들에게도 널리 사실로 통용되고 있다.
반면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고 하는 서애 류성룡선생은 전란발발의 전격적책임이 있는 한편, 옹졸하며 현실감각이 뛰떨어진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십만양병설'의 문제점이다.
율곡이이의 높은 식견을 극도로 과장화 해 버리는 바람에 임진왜란때의 명재상인 서애선생의 위업은 한낱 초라한 평범하고 폐쇠적인 것으로 변모해버린 것이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서애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그 누구보다도 혼란한 나라를 수습하는데에 헌신했던 공로자였다.
이순신과 권율 같은 인재를 등용해 왜적들의 침략을 봉쇄하고자 했으며, 민생 안정에도 최선의 노력을 기하였다.
그러한 나라의 공로자를 율곡선생이라는 한 학자를 대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옹졸, 편협한 인물로 평가절하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더욱이 율곡선생의 의견에 반대하여 수준낮은 인물이 된다면 그 당사자에게 있어 그것만큼 편파적이고 억울한 일은 없으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정말 율곡선생이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예지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을까이다.
먼저 '십만양병설'이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십년전인 율곡선생이 선조임금에게 앞일의 전란을 대비하여 십만의 병력을 양성하자라는 율곡선생의 주장이다.
율곡선생의 그러한 주장에 양병불가론을 펼쳤던 이가 바로 서애선생이라고 하는데 이 서애선생은 '십만양병설반대'로 인하여 훗날 따가운 질책과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또한 후세들은 서애선생이 임난발발 후 율곡선생과의 고사[古事=옛일]를 떠올리면서 심한 죄책감과 후회를 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한 서애류성룡은 직접적인 전란의 주범으로 묘사되어졌다.
한편,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이 나타나는 사서로는 사계김장생선생의 '율곡전서'등등이 있다.
우선 사계선생의 율곡전서를 보자면
[일찍이 경연에서 율곡이 청하기를 '십만의 병력을 양성하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채 안되어 가히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의 발언이 [선조실록]에는 나오지 않고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사계선생의 저서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율곡전서'는 율곡선생 한사람의 개인행장을 다룬 지금의 위인전이나 다름없다.
즉 '십만양병설'의 발단은 사계선생의 '율곡전서'에서 비롯되는 바이다.
따라서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은 사계선생을 비롯한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들의 개인문집이 아니면 찾아볼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선조수정실록'에 율곡선생이 임금에게 '십만양병설'의 의견을 제시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분명 알아둘 것은 '선조수정실록'이란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이른바 '서인'들이 반대파가 편찬한 '선조실록'을 수정편찬한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기록자체가 객관적일 수 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이라는 것은 인조반정 후 서인들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효종8년인 1657년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맺게 되었다.
게다가 '선조수정실록'은 편찬과정에서 각 개인들의 사초와 비문, 행장, 잡기등을 수집하여 편찬작업을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율곡선생의 수제자인 사계김장생선생의 영향력이 가장 커 '율곡전서'를 토대로 하였다.
사계선생은 실제적으로 서인의 초대영수로 받들어지고 있었고 그의 저서들은 서인들에게 엄청난 작용과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계선생의 뒤를 이은 우암송시열선생또한 율곡선생관련저서인 '율곡연보'를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율곡연보'와 '선조수정실록'이 서로 손발이 맞지않는다는 것이다.
'율곡연보'에서는 선조 16년 4월에 율곡선생이 십만양병을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고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 15년 9월에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 애시당초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선조실록'에는 '십만양병설'같은 것은 아예 나오지도 않고 후에 서인들이 멋대로 지은 '선조수정실록'과 서인의 각 개인들이 쓴 행장에만 나오는 바 이것은 명백한 서인의 날조라 할 수 있다.
물론 율곡선생은 범인과 다른 당대의 명유임은 분명하고 앞일을 내다볼 수 있는 식견은 가졌던 분이다.
하지만 퇴계이황선생의 제자인 서애류성룡선생또한 율곡선생과 같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도 수준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오죽하면 퇴계선생이 서애선생을 일러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했겠으며 20을 갓 넘은 나이에 명나라의 유생들이 '류선생[柳先生]'이라고 불러었겠는가.
그만한 성품과 걸맞는 학문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서애선생은 명나라사람들에게까지 존경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누구보다 먼저 임금에게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을 인재로 천거하여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역사 속에 전면 등장시키면서 민족의 위대한 영웅의 탄생을 알리며 국가 초유의 국난을 극복시켜 나가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한 서애선생이 율곡선생의 의견에 반대했다고 해서 '악인'이 되고 현실감각이 뛰떨어진 인물로 규탄받는다면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어디에 없을 것이다.
서애선생이 만약 우둔한 인물이었다면 가히'십만양병설'과 대등한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인 '비변오책'을 주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혹 '십만양병설'이 맞다 할지라도 서애선생은 당대의 여러가지 현실적인 정황을 염두한 후 '십만양병설'을 반대했을 것이다.
서애선생의 '비변오책'이나 율곡의 '십만양병설'도 그 성격은 변방을 방어하자는데에는 동일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십만양병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리 현실적이지 못했고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병력은 이미 10만명이었다.
물론 그 병력과 조선의 국방력이 실상과는 달리 저하되고 허술한 점도 있겠지만 명종대까지 지속되었던 문정왕후, 윤원형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의 조선은 재정적인 면에서도 10만의 병사들을 양성한다는 것은 극히 부담이 되는 것이다.
한편, 서애선생이 '비변오책'을 주장한 연대는 율곡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라는 1583년 4월보다 더 빠른 연대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십만양병설은 율곡선생사후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선생을 높이기 위한 장치이며 어처구니 없는 선전성을 띄고 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서인 노론가문의 사학자 두계이병도가 서인들의 저서들을 종합하여 '한국사대관'을 발간했다.
현세가 알고 있는 '십만양병설'은 바로 이병도의 '한국사대관'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 <덧붙여 국사교과서의 '십만양병설'은 바로 '한국사대관'에서 택한 것이었다.>
그러니 '십만양병설'의 진실은 서인들의 개인저서에서만 보인다는 점에서 거의 설득력이 없고 그것은 서인이라는 당파의 위대함을 각색하는 것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끝으로 덧붙이건대 솔직히 말하자면 구한말, 일본에게 나라를 들어바친 이들은 모두 율곡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 기호학파들이었다.
이병도의 친척조부인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또한 노론이었으며 친일파로 돌아섰던 박영효나 윤치호 역시 노론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친일파들의 학파를 굳이 따지자면 거의 대부분이 노론 기호학파출신들이다.
이와 반대로 퇴계선생의 학파에서는 이상하게도 친일파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만주나 국외전역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 후 해방이 되자 기호학파출신인 친일인사들이 대거 이승만정권에 기용되면서 그들이 나라의 역사를 논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 일본침략기시절, 조선사편수회에서 조국의 역사를 날조하는 것에 대해 적극 참여한 두계 이병도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역사란 과연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 승자를 위한 역사이다.
승자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지기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승자의 중심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빙자로 세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을 세월속에 묻어버리면서 악인으로 매도한다면 승자의 역사는 분명히 사악한 거짓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성은 물론이거니와 설득력, 객관적인 부분들까지 결여된다.
이것의 가장 결정적 대표가 바로 '십만양병설'이라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역사란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승자들이 역사를 각색하고 그 사실을 감춘다고 할지라도 그 자취와 흔적이 남겨짐에 따라 그 꼬리는 반드시 밞히고 그 실체는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묘미이자 역사정의의 교훈적 가치인 것이다.
진실은 항시 밝혀지고 정의는 언제나 실현을 위해 한걸음한걸음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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