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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스크랩] 이종생(李從生)

작성자천지인|작성시간12.03.17|조회수230 목록 댓글 0

이종생(李從生)

성명(姓名)

 이종생(李從生)

본관(本貫)

 함평(咸平)

시대(時代)

1423(세종 5)~1495(연산군 1)

자(字)

계지(繼之)

호(號)

 

이력(履歷)

함평人 함성군(장양공)파 11세 수(壽) 73세

9세 참의(參議) 자보(自寶)의 손자(孫子)이다.

이종생(李從生) 1423(세종 5)~1495(연산군 1)

조선의 무장, 자는 계지(繼之), 시호는 장양(莊襄), 극명(克明)의 아들. 내금위(內禁衛)에 속해 있다가 1460년(세조 6) 무과(武科)에 급제, 사용(司勇)이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위장(衛將)으로서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다. 이해 9월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파저강(婆猪江)의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했고, 1468년(세조14) 영변 부사(寧邊府使)에 승진했다. 다음해 영변에 진(鎭)이 설치되자 절도사(節度使)를 겸임, 1475년(성종 6)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건주위(建州衛) 정벌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위장(衛將)으로 출전하여 야인들을 토벌하고, 1481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485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나주시(역사 인물)

이종생(李從生)

세종5(1423) ~ 연산1(1495) 본관은 함평, 극명의 큰아들로 나주시 다시면 초동에서 출생, 내금위(內禁衛)무사에 속해 있다가 세조6년(1460) 무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서용이 되고 10년(1464) 동관첨사로 발탁되었으며 13년(1467) 5 월 이시애란때 위장으로 선봉이 되어 만령전투에 큰 전공을 세 우고 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이 되어 함성군(咸城君)의 작위를 받았다. 그해 9월 강 순을 따라 파저강(초산북방 만주땅) 변의 이만주 북자를 죽이고 14년(1468)에 영변부사 성종6년(1475)에 충청병사가 되었으며 10년(1479) 11월에 명나라와 함께 건주위의 야인을 정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여상)의 선봉장이 되어 얼어 붙은 빙판길의 악조 것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워 적의 본거지를 불사르고 돌아오는 큰 전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오르고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12년 (1481)에 함경남도병사 14년(1485)에 경상우도병사가 되었다. 그후 성종이 승하하자 크게 슬퍼하다가 병들어 죽으니 장양(莊襄) 시호(謚號)가 내리었다. 천성이 소박하고 너그러우며 공사를 처리하는데 대의와 명분을 앞세웠고 사람을 대하는데 항상 다정다감하였으나 술을 워낙 좋 아해 주량은 한정도 없었으나 한번도 실수한 일이 없었다. 때문에 친구들이 그를 주덕(酒德)이라 불렀다. (인물지, 연려실기술, 전란사, 해동명장전)  

 

 

<예산군지> 제2장 인물 제7절 분묘(墳墓) 및 설단(設壇)

1. 분묘(墳墓)

■ 이종생 (李從生)

자는 계지(繼之). 이시애의 난에 선봉장으로 공이 있어 함성군(咸城君), 관은 한성좌윤. 시호 장양공(莊襄公). 묘는 고덕면 몽곡리.

 

 

하남의 인물

이종생(李從生) : 1423년(세종 5) ∼ 1495년(연산군 1)

   조선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계지(繼之)이다. 선략장군 호분위호군(宣略將軍虎賁衛護軍)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된 이극명(李克明)의 아들이다. 1460년(세조 6) 7월 그는 별시무과에서 을과 제3인에 뽑혀 등급을 몇 단계 뛰어넘어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10월 북정(北征) 도원수 신숙주(申叔舟)의 군관으로 공이 있어 선략장군에 발탁되었으며, 1461년(세조 7) 5월 도시(都試)에서 1등을 하여 선절장군(宣節將軍)이 되어 수직(守職)으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이 되었다. 1464년(세조 10)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어 동관진 첨절제사(潼關鎭僉節制使)가 되고, 1466년(세조 12)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할 때, 그는 북청 만령(蔓嶺)에서 반란군을 대파하는데 위장(衛將)으로서 선봉이 되었다. 그 공으로 그는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정해지고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인을 공격한 공으로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으며, 1469년(예종 1) 한성좌윤이 되었다가 평안동서중 삼도절도사(平安東西中三道節度使)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도총관을 겸하였다. 1473년(성종 4) 내금위장이 되었다가 이어 충청도 병사가 되었다.

   1479년(성종 10) 윤필상(尹弼商)의 건주위정벌 때 호분위장(虎賁衛將)이 되어 출전하여 선봉으로 싸워 공을 세우고 부상을 입었다. 1481년(성종 12) 영안남도병사 겸 북청도호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485년(성종 16) 경상우병사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고, 1495년(연산군 1)에는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정직하고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직무를 이행할 때 대세를 따르고, 사람을 대할 때는 관대하였다. 또한 그는 명장으로서 지덕을 겸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고,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京畿人物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墓)

이종생(李從生,1423-1495)

묘 하남 감북동 효죽동   

본관  함평(咸平)   시호 장양(莊襄) 자 계지(繼之) 함성군(咸城君)

부(父)

이극명(李克明)

우왕14(1388) ~ ? 본관은 함평, 자보의 아들로 나주(羅州)에서 출생(出生)하여 보조훈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고 아들 종생이 세조(世祖) 13년(1467)에 적기 2등공신 이 됨으로 인해서 함평군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읍지)   

十세  이극명(李克明) : 나주에서 출생하여 관의약장군(官宜略將軍) 호분호군(虎賁護軍)을 지내심

 

이극명(李克明) 초휘(初諱) 준년(俊年) 봉(封) 함평군(咸平君)

모(母)

나주정씨(羅州鄭氏) 통사랑(通仕郞) 정혼(鄭渾)의 여(女)

 조부(祖父) 생원(生員) 정인충(鄭仁忠)

 증조(曾祖) 직장(直長) 정익광(鄭益光)

 외조(外祖) 중랑장(中郞將) 임후(林厚) 본(本) 회진(會津)

배(配)

 

자(子)

 

녀(女)

 

형제(兄弟)

제(弟) 이종수(李從遂) : 충좌위부사정(忠佐衛副司正), 증가선대부병조참판(贈兵曹參判)(참판공파)

이종수(李從遂)  함평人 참판공파 11세 10세손손 수(壽) 60세

9세 참의(參議) 자보(自寶)의 손자(孫子)이다.

세종(世宗) 6년 갑진(甲辰 1424)생이며 관(官)은 충좌위(忠佐衛) 부사정(副司正) 성종(成宗) 14년 계묘(癸卯 1483)에 졸(卒)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兵曹)참판(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일향(一鄕)의 선비들이 추앙(推仰)하여 함평군(咸平君) 취산사(取山祠)에 배향(背向)되었다.

배(配) 광주노씨(光州盧氏) 남포현령(南浦縣令)

 노중륜(盧仲崙)의 여(女)

 조부(祖父) 직산군수(稷山郡守) 노규(盧珪)

 증조(曾祖) 교리(校理) 노광리(盧光利)

문헌(文獻)

1. 이종생(李從生)  함평인(咸平人)

※世祖朝 國朝人物志에 從生은咸平君으로 記錄

  세조조 국조인물지에 종생은함평군으로 기록  

李從生 字繼之咸平人以武藝進四道節度使 世祖朝吉州人

李施愛殺節度使及諸鎭將校據十城以叛 上命將討之以從生

爲先鋒至蔓嶺遇賊兵甚熾左右皆 사 魄不敢進大軍亦不至

從生銳意進戰責諸將曰國家安危在此一擧今賊勢如此諸將

何不出死力以戰乃不馬拔樹揮左右알叱之軍皆服栗鼓 조

以進從生躍馬奮擊賊勢披靡大軍繼至望見曰彼黑面頂大玉者

誰軍中爭告曰李衛將也凱還策敵愾功封咸平君建州女

眞久梗王化又明國請援師來攻 上命領議政尹弼商爲元師部

署諸將以從生爲虎賁衛將渡鴨綠江路 초氷滑所騎馬顚부

從生隨傷右※元師驚救醫治因曰若非公誰能爲先鋒對曰當

萬死以戰卽上馬直人賊穴燒盧帳元師勞慰曰是役之捷皆公之

力官至漢城左尹謚莊襄 崔溥 撰墓碑

 ※世祖朝 國朝人物志에 從生은咸平君으로 記錄

 

2.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종생(李從生)

# 전라도(全羅道)  함평(咸平)

*사정촌사우(射亭村祠宇)

제향. 이 언(고려신무위대장 본함평). 이춘수(언구세손 수사 증이판 본함평). 이종생(언십세손 병마절도사 함성군 시장양 본함평). 이 긍(춘수자 이참 기성군 본함평). 이 습(호효우당 긍제 현감 본함평).

祭享. 李 彦(高麗神武衛大將 本咸平). 李春秀(彦九世孫 水使 贈吏判 本咸平). 李從生(彦十世孫 兵馬節度使 咸城君 諡莊襄 本咸平). 李 兢(春秀子 吏參 箕城君 本咸平). 李 습(號孝友堂 兢弟 縣監 本咸平).

 

3. 사산사(射山祠): 함평 나산면 초포리

   전남 함평(咸平)은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아성이다. 함평군(咸平郡) 일대에는 2천여호 1만여명이 살고 있는데, 조선 초기에 수사(水使)를 지낸 춘수(春秀)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咸平)에 정착, 후학들을 양성하며 나산(羅山) 초포리(草浦里)에 입향(入鄕)한 뒤, 그의 아들 긍(兢)과 습(△) 형제의 후손들이 이 일대에 번져 세거지(世居地)로 되어 있으며, 시조 언(彦)과 6位(春秀, 從生, 從遂, 兢, 습, 稠)의 조상을 모신 사산사(射山祠)가 있다.

  세파(世派)별로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면, 고려 첨서사사(詹書司事)를 지낸 인원(仁元)의 후손은 충남 홍성(洪城)과 결성(結城)에 자리잡고 기반을 굳히었으며, 백당(伯棠, 雲奉公)의 후손은 광주(光州), 광산(光山)과 부여(扶餘)에 자리하였으며, 극해(克諧)의 후손은 나주(羅州)와, 그의 아들 종동(從仝)의 후예는 고창(高敞), 정주(井州), 여주(驪州) 등에 많이 살고 있다.

 

4. 조선 세조 때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으로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진 종생(從生)의 후손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인 화성(華城), 양평(楊平), 광주(廣州), 개풍(開豊) 일대와 충남북의 청양(靑陽), 부여(扶餘), 당진(唐津), 제천(堤川), 충주(忠州) 그리고 황해도의 벽성(碧城), 함남의 갑산(甲山), 단천(端川)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의 동생 종수(從遂)의 후손들은 그 선대(先代)부터 나주(羅州)에 집거(集居)하여 반세(班勢)를 누리었고 그의 6세손인 선지(先智)는 밀양(密陽)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어 오례(五禮), 퇴로(退老), 월산(月山) 등에 후손(後孫)들이 정착(定着)하여 반성(班姓)으로 행세하였다.

중길(中吉)은 평택(平澤)에 입향(入鄕)하여 그 후손들이 퍼져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으며, 세조 때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인 운로(雲露)의 후손들은 화성(華城), 양평(楊平), 홍천(洪川)에 자리잡았고, 현령(縣令)을 지낸 조(稠)의 후손들은 장성(長城), 고창(高敞)에, 종(種)의 후예들은 부여(扶餘) 쪽에 많이 살고 있다. 또 고려 충숙왕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이며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진 광봉(光逢)의 후손들은 전북의 고창(高敞), 부안(扶安)과 함평(咸平) 일대에 만영(萬榮), 장영(長榮) 형제들을 입향조(入鄕祖)로 하여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지낸 춘령(春齡)은 양양(襄陽)에 입향(入鄕)하여 자리를 굳혔고, 수년(秀年)은 여주(驪州)에 기반을 두었다.

  이외에도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영광(靈光), 무안(務安)등을 꼽을 수 있다.

기타(其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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