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북주 멸망의 요인
북주北周의 3대 황제 우문옹宇文邕(543-578, 자는 예나돌禰羅突)은 문제文帝 우문태宇文泰의 넷째 아들로 모친은 문선황후文宣皇後 질노씨叱奴氏입니다. 재임 중에 권신權臣 우문호宇文護를 주살하고, 선비족鮮卑族의 옛 풍속을 탈피하여 관리체계를 정돈했습니다. 정치가 투명했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국세國勢가 강성해졌습니다. 그는 절검을 숭상해 평소 베로 만든 옷과 이불을 사용했습니다. 금은보옥 장식도 몸에 지니지 않고 궁궐과 의복 역시 사치를 일절 금했습니다. 또한 이전의 왕조가 축조한 화려한 궁궐 장식을 모두 떼어내게 했습니다. 그는 19년의 재위 기간 동안 먼저 몸을 낮추고 인내하며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북제北齊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우문옹은 친정에 나설 때면 걸어서 산곡과 위험한 계곡을 지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반인조차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무제 우문옹은 이를 달게 여겼습니다. 그는 행군 때 병사가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고는 친히 자신의 신발을 벗어 신겨주기도 했습니다. 적과 대치했을 때는 선봉에 섰습니다. 여러 번 제왕의 몸으로 적진에 돌진하기도 했습니다. 제나라를 멸한 후 북쪽으로 돌궐突厥의 항복을 받고, 남쪽으로 진나라를 깨뜨렸습니다. 당시 북주의 기세를 보면 1, 2년 내에 천하를 통일할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북벌 도중 문득 폭질暴疾(갑자기 생긴 위중한 병)에 걸려 진중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578년 12월 그의 나이 36세였습니다. 그의 유조에 따라 우문빈宇文贇(559-580)이 뒤를 이었습니다.
맏아들로 태자가 되었지만 주변에서 자질을 의심받아 아버지 우문옹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578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대성大成으로 하고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황실과 군부의 중진으로 북제 공략의 공적자인 제왕齊王 헌憲을 주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무제武帝 시대의 옛 신하를 숙청해, 대규모 궁전을 축조하는 등의 사치를 했습니다. 579년 7세의 아들 우문연宇文衍에 양위하고 스스로는 천원황제天元皇帝로 자칭해, 천원황후天元皇帝(楊皇后), 천황후天皇后, 천우황후天右皇后, 천좌황후天左皇后, 천중대황후天中大皇后 다섯 명을 맞아들이고, 주색에 매달렸습니다. 정치를 외척에 일임하여 황후의 부친인 양견楊堅(훗날의 수隋나라의 개국황제开国皇帝)의 전횡을 불렀던 것이 북주 멸망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우문옹이 활약할 당시 그는 자식들과 매우 엄한 약속을 했습니다. 태자 우문빈이 작은 실수를 저지르기만 해도 몽둥이로 후려치며 이같이 경고했습니다.
“자고로 폐위된 태자는 무수히 많다. 나의 자식이 대통을 잇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동시에 그는 동궁의 속관들에게 매달 동궁의 동정에 관해 상세히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색을 극도로 좋아하는 태자 우문빈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철저히 감춰야만 했습니다. 사서에 따르면 우문옹의 장례를 치를 때 우문빈은 전햐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리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큰 소리로 부황 우문옹의 관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죽는 것이 참으로 늦었다!”
그는 곧바로 부황의 비빈들을 면전에 일렬로 세운 뒤 미색이 뛰어난 자들을 모두 자신의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어 그는 태자 시절부터 줄곧 모사로 활약해온 형양滎陽 개봉開封 사람으로 이부의 하속 정역鄭譯(540-591)을 개부의동대장군, 내사중대부에 임명해 조정을 총괄하게 했습니다. 정역은 2년 뒤 우문빈이 죽자 양견에게 몸을 맡긴 뒤 거짓 조명으로 양견을 보정대신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훗날 양견이 북주를 찬탈하는 데 최고의 공훈을 세운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