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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학연구소

연암 박지원과 함양을 찾아

작성자지리산문학관|작성시간26.06.17|조회수24 목록 댓글 0

 

연암 박지원과 함양을 찾아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13년) 서울 야동에서 출생하였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든거다." 조병화 시인의 삶의 철학이 담긴 「천적」이란 짧은 싯귀로 서릿발 같은 매를 맞고 나니 아득했던 정신이 아득했던 정신이 번쩍 든다.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살아 있음에 행복하였노라」는 누군가의 말은 결 고운 가을 햇살담은 행복이란 포대를 넉넉하게 풀어 놓는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실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을 찾아 함양 가는 천리 길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 행복이란 포대를 위한 연암의 높은 정신 때문이 아닐까,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13년) 서울 야동에서 출생하였다. 69세에 생을 마감한 박지원의 묘는 북한에 있다. 함양은 연암이 4년7개월 동안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며 사랑을 받아오던 곳으로 최치원, 정여창, 김종직을 비롯한 동방오현 거물들이 정치를 해온 행운을 갖은 도시이다.



  피의 바람 '무호사화' 의 계기가 되었던 학사루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세우고 학사루 누각에 올라 시도 짓고 생각에 잠겼던 곳이라니 천년이 넘은 누각이다.



무호사화 발단의 계기란?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재직 시 유자광이(도지사)관찰사로 있었는데 유자광이 시를 지어 학사루에 걸어 놓은 것을 유자광을 싫어하는 김종직이 유자광 시를 떼어 불태우게 된다. 이에 분노한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비판 글)을 발견하여 연산군에게 보고하여 사림파 제거를 꾀하게 된다. 피바람분 무호사화는 김종직을 부관참시까지 하게 되고 김일손과 많은 제자들이 죽고 김종직을 스승으로 만난 정여창(일두)은 1500리 먼 길을 걸어 함경도로 유배가게 된다.

대유학자가 유배지에서 군 불 때는 일을 하다 54살에 죽음을 당하니 그를 서러워한 정여창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2개월에 걸쳐 수송하여 모셔 왔다 한다.

사후 50년에는 강익 선생을 주축으로 정여창을 기리는 남계서원을 건립하고(소수서원 다음으로 건립) 정여창 선생의 무고함을 거듭 상소하여 사후 영의정까지 올려 드렸다하니 스승과 제자의 정이 눈물겹다.

유자광은 후에 눈이 멀고 처와 자식이 죽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함양초등학교엔 600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불멸을 기약하며 한을 담고 서 있는데 이 느티나무는 김종직이 5살 된 아들을 홍역으로 잃고 슬픔을 달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애닮은 심정을 아는지 경이감까지 느끼게 하는 석양 속 큰 나무는 가지마다 노을을 안고 아들을 대신하듯 말이 없다.

아들을 여윈 김종직의 시를 들어 본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 하구나」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이 600년 세월이 흐른들 어찌 희미해지겠는가, 육백년 늙은 느티나무지만 5살짜리 어린 나무로 만 보인다. 어린 아이를 두고 오는 것만 같아 자꾸만 뒤돌아보며 우리는 남계서원으로 향한다.

 





  남계서원은 정여창 선생이 청계서원은 김일손 선생이 모셔져있다. 두 서원이 정겨운 모습으로 가만히 후손들을 내려다보시며 100m 간격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정여창 선생 사후 100년 후에 지어졌다는 일두 정여창 고택은 대지가 3,000평 규모인데 KBS 토지의 촬영지였다. 10칸의 곡식 창고를 두어 배고픈 사람이면 누구든 자유롭게 쌀을 가져갈 수 있게 해 '노불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실천했다 하니 그 넉넉함이 고택의 지붕마다 그리고 기둥마다 배어있다.

이 집의 사랑채에선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등 조선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묵고 갔다 한다. "백 년 동안 맑은 바람이 부는 집" 이란 '백세청풍' 은 추사의 글로 사랑방 높은 벽에 푸른 바람을 일으키며 걸려있다.

 





  중국을 답사하고 '열하일기' 를 쓴 박지원은 상당한 애서가였다고 한다. 그의 '연암집' 에 실려 있는 그의 책 숭배사상을 들어본다. "책을 대할 때는 하품과 기지개를 켜지도 말고 졸지도 말라, 만약 기침이 날 때는 머리를 돌려 책을 피하고 책장을 뒤집되 침을 묻혀서 하지 말라, 표지를 할 때 손톱으로 표시하지 않고 책을 베지 말라, 책으로 그릇을 덥지 말고 먼지를 털고 좀 벌레를 쫒으며 맑은 날에는 햇볕을 쪼이라."



  열하일기는 연경(북경)으로 황제를 알현하러 간 조선사절단의 여행을 기록한 책으로 열하를 여행하고 박지원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조선은 멸망한 명나라를 잊지 못하여 청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지원은 안의 현감 때 물레방아를 최초로 만들어 디딜방아를 연자방아로 돌렸다.

박지원은 안의 현감으로 49살에 부임하여 5,000명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 북학 실학을 실천하며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렸다. 4년 7개월간의 현감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땐 몇 천 명이 거리에 나와 울었다고 한다.

 





  또 함양은 신라시대의 최치원이 만든 '상림' 이라는 인공 숲이 천년을 보존하고 있다. 하림은 없어지고 상림만 남아있는데 50,000평 부지에 조성된 인공 숲이 지키고 있는 '사운정' 은 고운을 생각하는 정자라고 한다.

함양을 빛낸 인물들을 상림 숲에 조성한(함양 역사인물 공원)은 함양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조상의 정신을 알리고 보존하자는 의지인데 이 모습만으로도 함양 사람들이 훌륭한 행정가를 만날 수밖에 없는 착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라시대에 당에 유학을 하고 당에서 벼슬까지 지낸 최치원은 신라의 혼란기에 신라를 위해 돌아온다. 하지만 썩을 대로 썩은 신라의 골품제도에 환멸을 느낀 최치원은 고승의 일대기를 쓰며 후대를 위한 숲을 조성하게 된다.

천년을 안고 있는 상림의 5만 여 평의 숲엔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가진 최치원을 영원히 사랑하듯 붉은 상사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농월정'은 정자가 4년 전에 화재로 없어졌지만 어찌 이곳에서 달만을 희롱했겠는가!

흐르는 물소리에 발을 담그고 선비들로 탁족을 즐겼다 하니 사람마다 발을 담가 청풍에 명월이가 되어본다.

보름은 아직 멀리 있는데 어찌 농월정 달은 질 줄을 모르는가!

어디선가 나즈막히 달을 희롱하는 소리에 놀란 달빛은 농월정 가득 은가루를 쏟으며 나그네 길을 막는다.


언론사 방방곡곡 서용선 기자

 http://www.bbggnews.com/news/2635

발행일: 2008/10/05  서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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