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苯傳
鄭汝昌作
有坦禪者, 少與吾父遊。 父旣沒, 數來見我, 仍語曰: ‘鄭苯之守廬也, 始與相交。 及付處光陽, 亦往從之。 一日邑人來言: ‘有朝官自京下來。’ 俄而官差來, 促苯入縣, 苯沐浴, 具冠帶, 出其先世神主, 再拜訖, 剖破焚之, 遂脫冠帶, 服雨裝衣, 帶手巾, 與妻永訣而出, 其妻牽衣而哭。 苯止之曰: ‘朝命難拒。 身後事汝其治之。’ 官差又促, 苯卽隨去。 自京來監刑官, 將以明日行刑, 欲拘係, 督入官, 苯不從, 却立門外曰: ‘何必入去? 在此死耳。’ 監刑官與縣官, 令人將絞, 苯曰: ‘死等耳, 然名節有異。 吾若有二心, 死後晴天依舊, 不然, 必有天變。’ 旣死, 忽雲合雨作。 兩官張傘入縣, 我護喪至蟾津告去。 苯妻泣謂我曰: ‘家翁爲西京觀察使, 待僧甚款, 正爲今日也。’
此僧之言, 不可信也。
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 단종조의 상신 / 정분(鄭苯) 조에 인용된 《장빈호찬(長貧胡撰)》의 내용은 정여창의 <정분전>과 같다. 유전된 것을 인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 적소에 있을 때에 중 탄선(坦禪)이란 자가 같이 있었는데, 하루는 읍 사람들이 전하기를, “경관(京官)이 왔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관원이 공을 잡으러 왔는지라, 공이 목욕하고 관디를 갖추고 조상의 신주에 재배한 뒤에 신주를 태우고, 관디를 벗고 우장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 아내와 영결하니, 그 아내가 공을 붙들고 통곡하매,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다.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 하고, 드디어 잡혀갔다. 감형관(監刑官)이, “내일 형을 집행하겠다.”고 하며, 관아에 가두려 하자, 공이 따르지 않고 관아 문밖에 서서 말하기를, “관아에 들어갈 것이 있느냐, 여기에서 즉시 죽겠다.” 하였다. 감형관이 형을 집행할 때에 목을 끈을 매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끼고 비가 쏟아져서 형관과 지방관이 우산을 받고 성에 들어갔다.” 《병자록》 《장빈호찬(長貧胡撰)》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 윤기헌(尹耆獻,1548∼미상) 지음. 윤기헌의 자는 원옹(元翁), 호는 장빈자(長貧子),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호조 판서를 지낸 윤자신(尹自新)의 아들인데, 선조 때 사마시에 합격, 선조 33년(1600) 죽산 현감(竹山縣監)으로 시작하여 뒤에 한성부 좌윤을 지냈고, 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에 특히 밝았고 문명이 높았다. 《장빈거사호찬》은 약칭 《장빈호찬(長貧胡撰)》으로 불리운다. ‘호찬(胡撰)’이란 말은 되는 대로 지었다는 뜻이니 자기의 찬술에 대한 겸사로 붙인 이름이다.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9일 계축 3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鄭汝昌供:
"去己酉年間, 與馹孫遊智異山。 語及禪家事, 臣語馹孫云: ‘有坦禪者, 少與吾父遊。 父旣沒, 數來見我, 仍語曰: ‘鄭苯之守廬也, 始與相交。 及付處光陽, 亦往從之。 一日邑人來言: ‘有朝官自京下來。’ 俄而官差來, 促苯入縣, 苯沐浴, 具冠帶, 出其先世神主, 再拜訖, 剖破焚之, 遂脫冠帶, 服雨裝衣, 帶手巾, 與妻永訣而出, 其妻牽衣而哭。 苯止之曰: ‘朝命難拒。 身後事汝其治之。’ 官差又促, 苯卽隨去。 自京來監刑官, 將以明日行刑, 欲拘係督入官, 苯不從, 却立門外曰: ‘何必入去? 在此死耳。’ 監刑官與縣官, 令人將絞, 苯曰: ‘死等耳, 然名節有異。 吾若有二心, 死後晴天依舊, 不然, 必有天變。’ 旣死, 忽雲合雨作。 兩官張傘入縣, 我護喪至蟾津告去。 苯妻泣謂我曰: ‘家翁爲西京觀察使, 待僧甚款, 正爲今日也。’
乙卯年臣爲安陰縣監, 馹孫通書於臣, 請錄示坦禪事。 臣意謂, 禪本詼諧難信, 而其所言晴天忽雨, 及明日欲行刑, 而以苯不入門, 卽日行刑, 似不實。 初不欲書送, 竟以苯從容就死, 坦有信可取, 宜作傳, 乃書送, 遂書其末云: ‘此僧之言, 不可信也。’
其後黃澗縣監金銓過臣任所, 而言馹孫修史藁, 記坦禪事。 臣驚曰: ‘其事難信, 何以書之?’ 臣於宗直, 未嘗受業。 但臣母居咸陽, 而宗直來守本郡, 時時往見而已。 其詩文集時未見, 所謂六君, 不知指何人也。"
........................
대동야승 > 해동잡록 > 海東雜錄[六] > 최종정보
海東雜錄[六] 權鼈
鄭苯
晉州人。郊隱之子。我太宗朝登第。文宗末年爲右相。有器局。魯山元年。與皇甫仁之亂。謫安樂。公在謫所。奉先神主祭祀。一夕睡起。謂家人曰。汝精一飯來。告祭吾祖。旣祭。盡焚其神主。俄而使至賜死。瑣錄
........................
대동야승 > 해동야언 > 海東野言[二] > 최종정보
海東野言[二]
魯山君
魯山在諒闇時。光廟居首相。以儲嗣之重。宜早納妃。旣定其議。遣舍人黃孝元。往告于右相鄭文成公曰。明日當納妃。須早會議。公曰。居喪納婦。豈禮哉。責黃曰。爾亦儒者。奚以是言聞於我乎。黃難於回語。以遜辭啓曰。右相似有採薪之憂。不肯發言。光廟曰。事在明日。不可不急。爾當復往。且曰。楊嬪亦囑以宜早納妃。不可不從。黃又往。則鄭怒曰。楊氏雖世宗封爲嬪。是固賤女。豈知國家事。黃退跪曰。下官安敢以是言回啓。請公開示方略。鄭乃笑曰。明日吾亦早詣闕耳。語饔官。多備酒醪以待。明日鄭果早赴。纔會坐。擧大鍾迭相酬酌。至于酣醉。竟不能發議而罷。出諛聞瑣錄
魯山之遜于壽康宮也。昏夜無火擧。只從五十餘人。下鍾樓時。左右行廊皆哭。止之不得。尹壎爲司禁。爲余云。出秋江冷話下同
魯山之遜也。始於謀臣權擥。而成於大臣鄭麟趾之議。金自仁時年十二。見其議。胷如火焰云。魯山遜于寧越。自作哀歌曰。月欲低 蜀魄啾。相思憶倚樓頭。爾聲若我聞哀。無爾聲無我愁。爲報天下苦勞人。愼莫登春三月子規樓。國人聞之無不涕泣者。及遇變。春秋十七。卽時雷雨大作。咫尺不辨人物。家奴石池之父時行商適寧越。見其變。石池爲余云。
鄭右相莽有器局。靖難時。方自嶺南回至忠州。見徇首行至用安驛前。京官馳馹來遇路上。喝有傳旨。公卽下馬再拜。問京官曰。受刑路中不祥。可就驛官否。官曰不然。某但受旨狎歸謫所耳。公又再拜生我耶。還上馬與官偕行。官曾爲公郞吏。謂公必問朝廷事。難於應答。而赴樂安郡十餘日。朝暮同處。一不開問。到謫所。勞苦辭別而已。公在謫。常奉祖先神主祠祭。一夕睡起。謂隨行僧曰。汝精具一飯。吾祠吾祖。旣祭。盡焚其神主。俄而使至賜死。出謏聞瑣錄
........................
國朝人物考四十三 / 莊光禪代時立節人
鄭苯 遺事
鄭苯, 晉州人, 高麗檢校贊成事文宣公郊隱以吾之子。 有器局, 世祖誅金宗瑞時, 以全、慶道等都體察使, 自嶺南回至忠州見徇首。 行至用安驛前, 京官馳馹來喝云: “有傳旨。” 公卽下馬, 再拜問曰: “受刑路中不祥, 可就驛館否?” 曰: “某但受旨押歸配所耳。” 公又再拜曰: “生我耶?” 還上馬, 與官行赴樂安。 官卽舊公郞僚, 行十餘日, 一不問朝廷事, 到謫所, 勞苦謝別而已。 公在謫, 常奉神主, 一日睡起, 謂隨行僧曰: “精具一飯, 吾祀吾祖。” 旣祭, 盡焚其神主, 俄而使至賜死。
........................
羣豹一斑下 / 癸酉錄
鄭苯
鄭苯字子㕀, 晉州人, 文定公以吾子也。 太宗朝登第。 官至右相。 《粹談》曰: “有器局。 癸酉靖亂時, 方自嶺南回, 至忠州, 見徇首。 行至用安驛前, 京官馳馹來, 唱有傳旨, 卽下馬再拜, 問京官曰: ‘受刑路中不祥, 可就驛館否?’ 官曰: ‘不然。 但受旨押歸謫所耳。’ 公又再拜, 曰: ‘生我耶?’ 還上馬偕行。 官曾爲公之郞吏, 謂公必問朝廷事, 難於答應, 而赴樂安郡十餘日, 朝暮同處, 一不開口, 至謫所, 勞苦謝別而已。 公在謫所, 常奉先世神主祠祭, 一夕睡起, 謂隨行僧曰: ‘汝精具一飯, 吾祀吾祖。’ 旣祭, 盡焚神主, 俄而吏來賜死。”
[주-D001] 㕀 :
底本에는 “由”로 되어 있다. 《雪壑謏聞ㆍ癸酉錄》, 《豊墅集ㆍ右議政鄭公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大東韻府群玉ㆍ二十四敬ㆍ鄭》 姓氏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2] 定 :
底本에는 “正”으로 되어 있다. 《雪壑謏聞ㆍ癸酉錄》, 《世宗實錄》 16年 8月 11日, 《新增東國輿地勝覽ㆍ慶尙道ㆍ晉州牧》 人物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3] 談 :
《雪壑謏聞ㆍ癸酉錄》에도 “談”으로 되어 있다. 《昭代粹言ㆍ海東野言ㆍ魯山君紀》에 根據할 때 “言”이 되어야 한다.
........................
燃藜室記述卷之四 / 端宗朝故事本末
端宗朝相臣
鄭苯
鄭苯字子㐕晉州人高麗檢校贊成郊隱以吾之子太宗丙申文科壬申拜右相癸酉配靈光賜死 一作配樂安 忠莊公 肅廟朝復官爵英廟戊寅贈諡
○公有器局靖難時方以全慶道軆察使自嶺南回至忠州見徇首行至用安驛前京官馳馹來遇路上喝有傳旨公卽下馬再拜曰受刑路中不祥可就驛舘否官曰不然某但受旨押歸謫所耳公又再拜曰活我耶還上馬與官偕行官曾爲公郞吏謂公必問朝廷事難於應答而赴樂安郡十餘日朝暮同處一不開口到謫所勞苦謝別而已公在謫常奉祖先神主祀祭一夕睡起謂隨行僧曰汝精具一飯吾祀吾祖旣祭盡焚神主俄而使至賜死 日月錄
○在謫有山僧坦禪者往從之一日邑人傳有京官來俄而官差來捕公沐浴具冠帶出其祖先神主再拜焚之遂脫冠帶服雨裝衣帶手巾與其妻永訣妻牽衣而哭公止之曰朝命不可拒身後事君其治之遂被執去監刑官將以明日行刑欲拘繫於官公不從却立門外曰何必入官在此卽死耳監刑官將欲絞公曰死等耳然名節有異吾若有貳心死後晴天依舊不然必有異常旣死忽雲合雨作刑官與地方官張傘入城 丙子錄長貧胡撰
○徐師川有感詩云經濟三朝一老臣廟堂深處儼垂紳當年事業人休問神殿神宮不日新自註曰詩相鄭苯以三朝元老佐幼主不能輔噵德義以土木相尙癸酉六月昌德宮殿成民力大困或有言者則曰當今太平捨此無餘大事云<나는 이것을 서하(西河) 임공(任公 임원준)에게서 들었다 自註曰。時相鄭笨。以三朝元老佐幼主。不能補導德義。以土木相尙。癸酉六月。昌德宮殿成。民力大困。或有言者。則曰。當今太平。捨此無餘大臣云。予聞之西河任公。 .> 謏聞瑣錄<조신(曺伸) 찬(撰)> 嶺南野言作李石亨詩
| 조신(曺伸) | 1454 | 창녕(昌寧) | 조계문(曺繼門) |
| 임원준(任元濬) | 1423 | 1500 | 풍천(豐川) | 자심(子深) | 사우당(四友堂), 사우(四友) | 임견(任肩) |
| 徐俯,宋代诗人官员 徐师川即徐俯,是北宋末南宋初的著名诗人、官员,江西诗派重要成员,字师川,号东湖居士,洪州分宁(今江西修水)人,生于 1075 年,卒于 1141 年 。 .................................... 徐俯(字师川)分宁人,黄庭坚外甥(俯母是黄庭坚堂妹,见《师友谈记》)。绍兴初,官至参知政事,有《东湖居士集》(今佚)。《宋史》卷三七二有传。 徐俯(晚年)不尊黄庭坚诗。 東湖徐師川(俯),紹興初由諫垣遷翰苑,贊几命。煇乾道丁亥在上饒,從公季子(徐)珪游,因叩家集,云詩已板行,他無存者,久而得奏議於殘編斷簡中,猥並錯亂,不可讀。乃為整綴成十卷,附以雜文一卷,寫以歸之。公視山谷為外家,晚年欲自立名世,客有贄見,盛稱淵源所自,公讀之不樂,答以小啟曰:“涪翁之妙天下,君其問諸水濱;斯道之大域中,我獨知之濠上。”及觀序(黄庭坚)《修水集》“造車合轍”之語,則知持此論舊矣。——(南宋)《清波杂志》卷五 徐师川亦尝咏雪云:“积得重重那许重,飞时片片又何轻。”曾端伯以为警策,且言师川作此罢,因诵山谷“疎疎,密密”之句,云:“我则不敢容易道。”意谓鲁直草率,而己语为工也。——(金)王若虚《滹南诗话》卷中 《瀛奎律髓》卷二一“师川以山谷‘夜听疏疏还密密’一联为不然。” 吕居仁作《江西诗社宗派图》,……录其名字曰“江西宗派”,其原流皆出豫章也。宗派之祖曰山谷,其次陈师道(无己)、潘大临(邠老)、谢逸(无逸)、洪朋(龟父)、洪刍(驹父)、饶节(德操,乃如壁也)、祖可(正平)、徐俯(师川)……凡二十五人,居仁其一也。……若徐师川则固尝不平曰:“吾乃居行间乎?”——(南宋)赵彦卫《云麓漫钞》卷十四 宋南渡后,高宗最重苏黄诗文笔墨,求其子孙官之,徐俯师川亦以山谷之甥,驯至通显。其诗本江西派也。贵后,或以书贺之,稍及山谷渊源,师川答云:“涪翁之妙天下,君其问诸水滨。”噫,安得此负心之语。——(清)王士禛《分甘餘话》卷二 |
○長貧居士。 尹耆獻。牛溪門人。述長貧胡撰。
윤기헌(尹耆獻) 1548 남원(南原) 원옹(元翁) 장빈자(長貧子) 윤자신(尹自新)
장빈거사(長貧居士) :
윤기헌(尹耆獻, 1548~?)의 호이다. 자가 원옹(元翁)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자 우계(牛溪) 성혼의 문인이다. 저술로 시화, 일화, 필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수록한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이 있다.
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단종조의 상신
정분(鄭苯)
정분은, 자는 자유(子㐕)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인데, 고려의 검교 찬성(檢校贊成)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태종 병신에 문과에 오르고, 임신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계유에 영광(靈光)으로 귀양가서 사사하였다. 낙안(樂安)으로 귀양갔다고도 한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숙종조에 관작을 회복시키고 영조 무인에 시호를 주었다.
○ 공은 기국(器局)이 있었다. 정난(靖難) 때에 바야흐로 전경도(全慶道) 체찰사(體察使)로서 영남에서 돌아와 충주에 이르러 황보인ㆍ김종서 등의 머리를 지방으로 조리 돌리는 것을 보고, 말달려 용안역(用安驛)에 이르니, 서울 관원이 말을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공이 곧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말하기를, “노상에서 처형을 받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한즉, 관원이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오 나는 다만 교지를 받아 공을 적소(謫所)로 압송하는 것이오.” 하였다. 공이 다시 재배하며 말하기를, “나를 살리는 것입니까” 하며 도로 말에 올라 관원과 동행하였다.관원이 예전의 공의 낭리(郞吏)로 있던 자인데, 그가 생각하기를, “공이 반드시 조정의 일을 물을 것이니, 대답하기가 곤란하겠다.” 하였는데, 낙안(樂安)까지 가는 십여 일 동안 조석으로 같이 있었으나, 공이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으며 적소에 와서 그와 작별 인사로, “수고하였다.”는 말 한 마디만 할뿐이었다.공이 적소에 있는 동안 항상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지내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수행하는 중에게 말하기를, “네가 밥 한 그릇을 정결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을 제사지내겠다.” 하고, 제사지낸 뒤에 신주를 다 태웠는데, 조금 뒤에 사신이 와서 사사하였다. 《일월록(日月錄)》
○ 적소에 있을 때에 중 탄선(坦禪)이란 자가 같이 있었는데, 하루는 읍 사람들이 전하기를, “경관(京官)이 왔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관원이 공을 잡으러 왔는지라, 공이 목욕하고 관디를 갖추고 조상의 신주에 재배한 뒤에 신주를 태우고, 관디를 벗고 우장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 아내와 영결하니, 그 아내가 공을 붙들고 통곡하매,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다.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 하고, 드디어 잡혀갔다. 감형관(監刑官)이, “내일 형을 집행하겠다.”고 하며, 관아에 가두려 하자, 공이 따르지 않고 관아 문밖에 서서 말하기를, “관아에 들어갈 것이 있느냐, 여기에서 즉시 죽겠다.” 하였다. 감형관이 형을 집행할 때에 목을 끈을 매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끼고 비가 쏟아져서 형관과 지방관이 우산을 받고 성에 들어갔다. 《병자록》 《장빈호찬(長貧胡撰)》
○ 서사천(徐師川)이 ‘느낌이 있다[有感]’는 제목으로 지은 시에 이르기를,
세 조정에서 정치하던 늙은 신하 / 經濟三朝一老臣
묘당(廟堂) 깊은 곳에 엄숙하게 띠를 드리웠네 / 廟堂深處儼垂紳
당년의 사업을 사람들아 묻지 말라 / 當年事業人休問
신전(神殿)과 신궁(神宮)들이 가까운 시일 안에 새로웠네 / 神殿神宮不日新
이라 하고, 자기가 주석하기를, “그 때의 정승 정분이 삼조(三朝)의 원로로 어린 임금을 섬기면서 덕의(德義)로 보좌하지는 못하고, 토목(土木)을 숭상하였는데 계유 6월에 창덕궁전이 이루어지니, 민력(民力)이 크게 곤궁하였다. 혹 이 일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답하기를, ‘이제 태평한 시대를 당하여 이것 외에는 크게 남아있는 일이 없다.’ 하였다”고 한다. 《소문쇄록(謏聞瑣錄)》 《영남야언(嶺南野言)》에는 이석형(李石亨)의 시라 하였다.
........................
저헌집(樗軒集) 이석형(李石亨)생년1415년(태종 15)몰년1477년(성종 8)자백옥(伯玉)호저헌(樗軒)본관연안(延安)시호문강(文康)
樗軒集卷上 / 詩 / 有感 時相鄭苯。以三朝元老。佐幼主。不能輔導德義。以土木相尙。癸酉六月。昌德宮殿成。民力大因。或有言者。則曰。當今太平。舍此無餘大事。
經濟三朝一老臣。廟堂深處儼垂紳。當年事業人休問。神殿神宮不日新。
炎天六月汗如流。誰念嗷嗷萬姓愁。舊谷已亡新未獲。朝飡難繼夕仍休。才聞役鼓雷霆振。俄見神宮雲漢浮。自是當今太平事。傍人愼莫道民憂。
........................
羣豹一斑下 / 丙子錄
錦城大君
錦城大君瑜, 世宗第六子。 安平之亂, 廢置順興府。 《魯陵遺事》曰: “一日夜, 瑜招府使李甫欽, 辟人密議, 傳檄于嶺南士民, 奉魯山踰嶺, 欲號召四方。 甫欽乃能文老文官執筆草檄, 有一句傳世曰: ‘挾天子以令諸侯, 孰敢不從!’ 府使及唱者疑其所爲, 潛塗壁以伺, 得知其機, 潛賂錦城眼前婢, 偸出檄文, 奔向京城。 適咸昌縣監者聞及唱謀, 替三四馬而追逐, 至用安驛, 奪其檄, 先走上變告, 遂得大功。 事發, 錦城一家皆投水而死, 甫欽及南中義士死者極多云。”
[주-D001] 其 :
底本에는 뒤에 “其”가 더 있다. 《雪壑謏聞ㆍ癸酉錄》에 根據하여 削除하였다.
[주-D002] 咸昌 :
《漁溪集ㆍ魯陵事實》에는 “豐基”로 되어 있고, 《鶴棲集ㆍ李大田先生傳》 및 《拓菴集ㆍ贈吏曹判書忠莊公大田李先生行狀》에는 “基川”으로 되어 있다.
[주-D003] 四 :
《雪壑謏聞ㆍ癸酉錄》에는 “匹”로 되어 있다.
급창(及唱) : 고을 관아에서 부리는 사내 종.
통인(通引) : 관장(官長)에게 딸리어 심부름하는 아전(衙前).
虞候. 成化二年丙戌, 始設. 武從三品. 佐治兵馬. 二周年交遞. 在家軍官三十人內, 兵房軍官二人. 守堞軍官二百五十人內, 兵房軍官二人, 掌務軍官二人, 執事二人, 以新選旗牌官差定; 軍器監官二人, 陪吏二人, 以營鎭撫定送; 知印十六人, 使令十九名, 軍牢二十名, 私賤兼役; 及唱二名, 房子一名, 汲水婢二名, 茶母婢一名, 以營奴婢定送.
................................
知退堂集卷之七 / 東閣雜記乾○本朝璿源寶錄
[世祖]
○世祖日表壞奇。射御絶人。年十六。隨世宗講武于王方山。一日朝射鹿獐數十。風拂毛血。表衣盡赤。老武李永奇等。見而垂淚曰。不圖今日復見太祖神武。初封晉陽大君。後改首陽。文宗嘗書其弓曰。鐵石其弓。霹靂甚矢。吾見其張。未見其弛。正統戊午間。世宗欲正圭表。令世祖及安平大君他儒臣等。上三角山普賢峯。觀日入處。石路危險。且臨不測。安平以下。目眩脚掉。不能前進。唯 世祖步履如飛。瞬息上下。見者絶服。以爲不可及。常衣闊袖衣。宮中笑之。世宗曰。如汝勇武之人。衣服如是寬大可也。景泰癸酉。以謝恩使赴京。道路見者必稱大將軍。皇城闕門八象見之。一時退縮跪伏。人異之。臨行。詢于權擥曰。誰可爲書狀官者。擥遂薦申叔舟。又慮其未還而事機或變。挾金宗瑞之子承圭,皇甫仁之子錫偕行。
○景泰癸酉。光廟之赴京也。徐居正以集賢殿副校理。隨行渡鴨綠江。宿婆娑堡。是夕。居正母訃卽至。光廟欲祕之。是夜。居正有異夢驚起流涕。同宿者問之。居正曰。夢月落空中。怪哉。夫月。母像也。吾有老母在堂。夢徵不詳。是以悲耳。有以此言告者。光廟歎曰。居正之誠孝。足以動天。遂以實言之。
○韓上黨明澮。在孕七月而生。四體猶未成形。乳媼裹以絮綿置密室。久而方成。旣長。骨格奇偉。少時讀書山寺。一日冒夜行山谷中。有大虎擁護而行。公語之曰。遠來相送。足見厚意也。虎爲俯首跪伏之狀。天且明乃去。又嘗遊靈通寺。夜半有一老僧形貌奇古者。密語曰。公之頭上。有光赫赫。此貴徵也。不出明年。公必得志。
○韓明澮少落拓有大志。不屑科業。年踰三十。猶在布衣。與權擥爲死交。光廟問擥以人才。擥以明澮薦之曰。如欲平定斯世。非此人不可也。光廟立使召入。明澮以幅巾布衣上謁。一見如舊。恨相知之晩也。每進見。或稱宗簿侍官員。或稱醫生。使人不疑之。又以昏夜難於叫呼。以繩繫宮奴林芸之臂而垂其端于戶外。引之則雖夜深卽入告。靖難之策。大抵多出於明澮。光廟嘗稱曰。吾之子房也。明澮因言漢高,唐宗。雖用張,陳,房,杜之謀。而非韓,彭,褒,鄂。無以成武功。薦武士洪達,孫楊汀,柳洙等三十餘人。卒獲其用。
○魯山癸酉。皇甫仁,金宗瑞,鄭苯爲三公。而宗瑞尤多智略。時人目爲大虎。光廟欲先除之。十月十日。躬率武士楊汀柳洙柳淑及宮奴林芸等。乘昏往宗瑞家。使權擥,韓明澮等。守敦義門。戒之曰。雖鐘聲已盡。須勿閉門以俟吾。蓋以宗瑞家在門外也。宗瑞迎拜閑話。旣畢。送至門立庭中。又話良久。宗瑞子承圭不離於左右。光廟紗帽角忽覺盡落。光廟曰。請借政丞帽角。宗瑞使承圭入內取角。於是汀芸等擊宗瑞仆地。承圭奔救。伏於宗瑞之上。又擊殺之。光廟馳還。預與巡將洪達孫相約勿發巡卒侍之。遂領其軍。詣魯山時御所。時魯山出▦御校洞寧陽尉鄭悰家 從門隙告政院以宗瑞謀反事急。不及啓已誅之。請親啓其由。承旨崔恒開門出迎。光廟與之携手同入。魯山年幼驚起曰。惟叔父活我。光廟曰。是不難。臣當處之。卽出命牌招請宰。分部禁軍。圍把各處。又令排立作三重門。使韓明澮持生殺簿。坐門內。諸宰入第一門去傔從。入第二門。名在死簿者。則使武士椎殺之。皇甫仁及吏曹判書趙克寬,李攘等死者甚多。宗瑞復蘇。使人叫城門。使告于政府。以政丞爲人擊傷病重。速啓知于上。齎藥來救。無一應者。宗瑞裹瘡乘婦人轎。歷到崇禮敦義等門。以門閉不得入。光廟亦慮宗瑞還蘇。翌曉。使義禁府經歷李與商往審之。宗瑞匿于承圭房中。曳出之。宗瑞曰。我何以步往。將軺軒來。軍人斬之。
○光廟誅宗瑞之夕。先使訓鍊主簿洪允成。託稟公事往覘之。宗瑞在房內偃枕。三妾在後。招允成使之前詣。因曰。聞汝有力云。吾有强弓。試彎之。允成連折二張。宗瑞曰。樊噲不如也。使其妾酌酒大器飮之。允成飮三椀而出。
○金宗瑞等旣死。光廟又遣禁府都事愼先庚。押送瑢于江華。加棘安置。幷竄其子友直。瑢卽安平大君也。議者謂安平締交無賴子。陰有異志。又與宗瑞等宵晝相從。言計祕密。物情駭異。疑謗難掩也。以此揭爲罪目云。安平謫去時。泣謂家人曰。今日之竄。我實無罪。金左相知此乎。臨難相負。更何言哉。蓋不知宗瑞之死。而猶冀其濟己也。未幾。朝廷請誅瑢。魯山久不從。左相鄭麟趾使李季甸白于光廟。欲同辭更啓。光廟固辭曰。予之所懷。已盡曝於上前。然予之所陳者。私恩也。諸相所陳者。公論也。予何敢以私恩掩廢公論哉。但退伏吾室。恭俟上裁耳。麟趾等連請以大義斷之。魯山傳曰。朝議堅持。不得已勉從之。於是遣禁府鎭撫李伯淳。賜瑢死。徒友直于珍島。尋安置錦城大君瑜于順興府。亦以宗瑞之黨也。
○李澄玉。世宗朝宿將也。素有才武。累立戰功。六鎭之役。威名尤著。大爲金宗瑞所親信。典兵于咸吉道殆二十餘年。及宗瑞死。朝廷使朴好問往代澄玉。澄玉擊殺之。部勒軍馬。欲據五國城。將及渡江。行至鍾城。日暮。府使鄭種欲圖之。以甘言挽止其行。三更。種親率死士。掩其不備。奮槌拉殺之。
○光廟爲領議政。以嗣王幼沖。宮內空虛。且爲繼嗣之重。從權制議。固請納妃。累日不已。魯山傳曰。如是縷縷啓之。不得終守己志。於是策宋玹壽女爲妃。光廟又以爲喪中納妃。以是不服喪矣。因此而脫服卽吉可也。魚孝瞻爲禮曹參議。抗議曰。納妃之擧。則雖以宗社大計。不得已爲之。而至於短喪。有何不得已而强爲之乎。條辨不少屈。竟不見用。
○光廟旣誅金宗瑞等。拜領議政府事,判吏兵曹兼內外兵馬都統使。且作敎書。褒錄其勳。時集賢殿官皆逃去。獨柳誠源在官。不及避而製之。還家痛哭。人莫知其由。咸怪之。其後成三問等謀復魯山。誠源預焉。及事敗。誠源以司藝。方仕進本館。聞變索馬遽還。不脫冠帶。詣家廟。家人怪其久不還。往見之則仰臥。拔佩刀擬頸。以木片築之。救之不及。俄而。吏來取尸磔之。
○景泰乙亥魯山御慶會樓上。召光廟讓位。授以大寶。光廟涕泣辭不獲。是日。朴彭年臨慶會池欲自殞。成三問止之曰。上爲上王。我輩不死。猶可爲也。遂相與謀復魯山。俄而。彭年出爲忠淸監司。狀啓中不書臣字。代之以巨。授祿不食。封閉一庫。及事敗。光廟詰之曰。汝旣稱臣食祿。而復欲背之。是反覆人也。彭年曰。吾未嘗稱臣。亦不食祿。檢之果然。與子憲同日死。憲中生員。有時譽。先是。光廟爲領議政。宴府中。彭年有詩曰。廟堂深處動哀絲。萬事如今摠不知。柳綠東風吹細細。花明春日正遲遲。
○先王大業抽金樻。聖主鴻恩倒玉卮。不樂何爲長不樂。賡歌醉飽太平時。光廟令懸板府中。及禍作。剖而燒之。彭年裔孫忠。後居大丘爲賤役。府使朴應川落籍免役。今上初。除職。仁廟朝。經筵官韓澍啓曰。世祖於朴彭年等。心雖嘉之。而危疑之際。不得不加罪。故嘗下敎曰。當代之亂臣。後世之忠臣。恐其泯滅於後世。故爲此微言。以曉後世子孫也。
○光廟受禪之時。成三問以禮房承旨。奉御寶。不覺失聲痛哭。光廟方伏地固辭。時時擧頭望之。與朴彭年,李塏,河緯地,柳誠源,武人兪應孚及魯山舅權自新等。謀復魯山。金礩亦與其謀。彭年謂礩曰。事成。汝妻父鄭昌孫可爲領相。三問等擧事之期。屢違不諧。礩乃世於鄭昌孫。昌孫卽同礩詣闕密啓曰。礩與成三問等云云。罪當萬死。光廟出御便殿。三問以承旨亦入侍。光廟令武士捽下。以礩所告詰之。三問笑而對曰。皆是也。上王春秋方富。而一朝遜位。欲其復立。乃人臣之所當爲。更何問乎。進賜平日動引周公。周公亦有此事否。三問之所以爲此者。以其天無二日。民無二王也。顧謂金礩曰。汝之所告。猶回互不直。我等之意。直欲如是耳。燒鐵片置臍下。油火方煎。三問色不變。待冷卽曰。更使灼熱來。又斷肱。徐曰。進賜之刑。慘矣。時申叔舟在座。三問數之曰。昔與汝同直集賢殿。英廟抱元孫。步出庭中曰。寡人千秋萬歲後。爾等須念此兒。言猶在耳。汝豈忘之耶。叔舟無以爲答。光廟使叔舟出避之。三問顔色自若。臨刑。顧謂監刑官曰。若輩佐賢主致太平。三問歸見故主於地下耳。與父勝及弟三顧,三省皆死。
○成三問字謹甫。昌寧人。生於洪州赤洞里。卽其外家也。州人至今能言三問時事。蓋三問始生時。空中有問者三焉。故名之。旣長。文章淸秀。氣節卓犖。士林倚重之。號曰梅竹軒。世宗朝。登文科。魁重試。選入集賢殿。上每與之討論經史。諮訪治道。因褒曰。啓沃獻替。裨益弘多也。及應制累魁。皆賞以豹皮。直宿之夜。特給以讀書燭。天寒則遣中使宣醞。或送貂裘。又頻有書帙衣資之賜。時文宗在東宮。沈潛學問。晝夜不懈。每月明人靜。則手携一卷書。步來直廬。呼謹甫而入。三問驚惶迎拜。因展冊講劘。宵分而罷。嘗赴京。遼東鎭將以糊封畫障求詩曰。此白鷺圖也。願以爲題。三問不卽披見。口占曰。雪作衣裳玉作趾。窺魚蘆渚幾多時。鎭將笑而啓封示之曰。此水墨圖也。詩意無乃左乎。三問不應。卽續之曰。偶然飛過山陰縣。誤落羲之洗硯池。傍人莫不稱歎。行到夷齊廟。有詩曰。當年叩馬敢言非。大義堂堂日月輝。草木亦沾周雨露。愧君猶食首陽薇。言論之峻截如此。及魯山遜位。首唱復位之計。丙子六月。事覺。終不屈而死。臨沒。有詩曰。食人之食衣人衣。素志平生莫有違。一死固知忠義在。顯陵松柏夢依依。死時得年三十九。
○李塏。牧隱之曾孫也。詩文淸絶。爲世所重。英廟幸溫陽。塏與成三問等。使服隨駕。以備顧問。人皆榮之。預三問之謀。同下于獄。爲人瘦弱。而杖下顔色不變。見者壯之。光廟在潛邸。塏之叔父季甸。出入甚密。塏戒之。及是。 光廟曰。曾聞塏有此言。心以爲不肖。果有異心而然也。塏臨車載時。有詩曰。禹鼎重時生亦大。鴻毛輕處死猶榮。明發不寐出門去。顯陵松柏夢中靑。與三問等同日死。
○河緯地。善山人。英廟戊午科。擢文壯元。是時。英廟培養人才。於斯爲盛。而世之論者。推緯地爲首。及文宗上昇。辭職還鄕。魯山以右司諫徵之。官至禮曹參判。預成三問之謀。事覺後。光廟愛其才。密諭之曰。汝若諱初謀則可免。緯地笑而不答。臨鞠。緯地對曰。今日旣加以叛逆之名。其罪應死。更何所問也。光廟怒弛。獨不施烙刑。與三問等同日死。
○兪應孚。武人也。驍勇絶人。能起越墻屋。事母孝。官至正二品。與成三問等謀復魯山。約以昌德宮華使請宴時擧事。適於其日。世子不扈駕。又以地窄。令雲劍諸將不入。三問等止其謀。應孚猶欲入擊曰。事貴神速。世子雖不扈駕。羽翼皆在此。若盡除之。則何能爲乎。三問等以爲此非萬全之計。固止之。尋事敗。光廟問之曰。汝欲何爲。應孚曰。欲以三尺劍。廢足下復舊主耳。豎儒不可與謀事。若早從吾言。豈有今日。欲問情外之事。可問彼書生。聞者悚然。被栲掠至數百餘槐。又鐵灼三十餘度。終不服而死。吏籍其家。只有破薦。人服其淸。嘗於衆中奮臂曰。誅韓某權某。此擧足矣。曾爲咸吉道節制使。有詩曰。良馬五千嘶柳下。豪鷹三百坐樓前。可見其氣像。按六臣傳。乃南孝溫所著也。記事略而不詳。豈聞見有所未悉耶。且當時死事之人。不止六臣。而只曰六臣傳。何也。先王朝有經筵官。於榻前啓請刊布六臣傳。上不答。○又按慵齋叢話曰。世宗設集賢殿。揀文學之士。悉委以詞翰之事。不時召對。討論經史。勸奬備至。眷遇非常。於是多士爭相奮發。雄才倍出矣。如申高靈叔舟,崔寧城恒,李延城石享,鄭河東麟趾與朴仁叟,成謹甫,柳太初,李伯高,河中章。皆擅名一時。謹甫文潤豪縱。仲章疏劄勤懇。太初天才夙成。伯高詞鋒淸潁。然儕輩皆推朴仁叟爲集大成。蓋以經術文章。筆法俱善也。○又按松庵私記曰。兪應孚。身長九尺有餘。氣像雄偉。聲音洪遠。仰射飛鳥。發無不中云。
○天順丁丑正月甲午。諸宗親及交武官從二品以上合辭啓曰。上王 時魯山以上王居壽康宮 追闡揖遜之軌。安享頤養之道。而迺者成三問等始借復位之說。
罔測之變。雖已戡定。不軌之患。將必繼興。此皆上王不能防禁。舊臣醞釀禍機也。宜速善處。以祛危疑之慮。傳曰。自古帝王之興。必有天命。今予之事。亦天命也。雖有奸人。豈因上王而竊發哉。再啓曰。不可委之天命。當盡人事耳。請速決無留。使之出居于外。上以手札示之曰。國之大事。予亦不可以獨斷。政府其更收議施行。庚子。 上王出居于瑜舊家。從行宦官四人,洒掃差備四人,別監四人,侍女十人,火婢六人,水母二人,房子四人,外色掌十二人。幷分二番。晝則德寧府官員。輪次守直。夜則三軍鎭撫二人。各率軍士五十人。巡警守護。宋大妃,兩別室本家通問及物件出納時。則德寧府官員及三軍鎭撫以草記來啓于政院。
○丁丑六月癸丑。藝文提學尹士昀啓曰。平民金正修言內。判敦寧府事宋玹壽,行判官權完謀逆云云矣。上出御思政殿。召見鄭麟趾,申叔舟,韓明澮,權擥等。下玹壽,完于義禁府。仍下敎曰。前日成三問等。言上王預其謀。宗親文武百官合辭。以爲上王得罪于宗社。不宜安居京師。累日請之不已。予固不允。欲保初心矣。到今煽亂之徒。繼踵不熄。予豈得以私恩掩廢大法。不顧上天之命哉。玆以特從群議。因封爲魯山君。俾出居于寧越地。厚奉衣食。以全其終始。惟爾議政府。曉諭中外。甲寅。彗星見。 魯山發向寧越。僉知中樞府事魚得海以上命率軍士五十人護送。魯山臨程。謂餞行宦者安璐曰。成三問之謀。吾知之而不告。是吾罪也。後固政府啓辭。玹壽處絞。完依律極刑。
○魯山旣至寧越。初寓於西江淸冷浦。尋移居于客舍東軒。每於淸晨。且袞冕出坐大廳。容儀凝然肅穆。見者無不起敬。又乘月時時登觀風亭,梅竹樓。使人吹玉笛。自製王孫聽鵑曲。歌以和之。其辭曰。月欲低蜀魄啾。相思憶倚樓頭。爾聲苦我聞憂。無爾聲無我愁。爲報天下苦勞人。愼莫登春三月子規啼明月樓。每臨風一唱。聲徹遠村。老幼聞者。莫不流涕。又有詩曰。一自冤禽出帝宮。孤身隻影碧山中。假眠夜夜眠無假。窮恨年年恨不窮。聲斷曉峰殘月白。血凝春樹落花紅。天聾尙未聞哀訴。胡乃愁人耳獨聰。
○安置罪人瑜在順與謫所。謀復魯山。遂與府使李甫欽潛結嶺南豪橫。繕修軍器。一日。構成檄文。刻期發兵。基川縣 卽今豐基郡 監某聞某事奪檄。以飛騎上京告變。瑜及甫欽皆被收死。南中士民連累死者亦多。順興地界。革屬于基川,榮川,奉化三邑。漢南君瑛,永豐君瑔 皆世宗之子 寧陽尉鄭悰等。皆坐瑜黨。安置禁錮。
○丁丑十月。禁府都事王邦衍。以馹行下去于寧越地。魯山聞其來。具翼善冠袞龍袍。召邦衍問之曰。聞汝以公事到此。胡爲乎來哉。邦衍惶惑無以仰答。有一貢生常侍魯山者自當之。以一絛弓絃。從坐後挽頸而縊之。春秋十七。是月二十四日酉時也。貢生未及出門。嘔血卽死。是日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空。咫尺不辨。邑宰及從人。畏怯不敢收喪。獨縣吏嚴興道卽哭臨之。具棺斂襲。瘞于郡北五里冬乙旨。
○世祖三年天順丁丑。下敎印出大藏經五千件。板在陜川海印寺。遣敬差官尹贊,鄭垠蕫其事。且使僧信眉,竹軒等監督。諭旨于各道觀察使。助其費。戊寅二月始役。四月畢印。分藏于各道名山巨刹。凡入紙地三十八萬八千九百餘貼。役糧五千石。他物稱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