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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문학

국조보감 제67권 / 영조조 11 / 44년(무자, 1768) 命錄用故相臣鄭苯後孫

작성자지리산문학관|작성시간26.06.12|조회수17 목록 댓글 0

[戊子四十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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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四十四年。春正月。下綸音飭大小臣工。○敎曰。周禮獻民數於王。王拜受之。顧不重歟。今式年捧單加减。其令以聞。於是。漢城府進戊子式年戶口之數。京五部及八道戶一百六十七萬九千八百六十五。口七百萬六千二百四十八。大抵比孝宗八年丁酉版籍。戶加一百二萬零。口加四百八十萬零。休養生聚於斯爲盛云。○减江界蔘貢之數。敎曰。 

宋以花石綱。明以課銀。民皆離心。豈非鑑戒處乎。蔘産不古。蔘價日高。東西民難支。故關東蔘。旣作詳定。又作京貢。今覽關西伯之章。江民無論男女。擁馬垂涕云。若親聞覩。今欲减數。宜先御供加定三斤。特爲革除。內局猶然。况其他乎。陳章中數件條列。大臣備堂消詳回啓。登對以奏。於是。地部京上司年例別貿之蔘裁减者。甚多。○上聞先正臣趙光祖祠板自鄕來江郊。命戶曹助給家舍之價。親製祭文。遣承旨致祭。○夏六月。命錄用故忠 

臣高敬命後。初左議政韓翼謩。以敬命祠版親盡當祧。請依宋象賢例。特許不祧。領議政金致仁。以爲勳臣則不祧而忠臣無此例也。上是致仁言。只命錄用其奉祀孫。○命羅里舖折米二千石。以地土船輸送濟州。以濟州歲歉也。○秋七月。命錄用先正臣金宏弼鄭汝昌之後。○湖南旱蝗。命行酺祭。敎曰。姚崇焚蝗。雖爲目前捄急。盧懷愼之言。不無意見。蟲之蝕穀。良由否德。彼雖微物。一號令而炙之。此何異於勸人殺人。而又以法殺之者乎。此後申飭道臣。所拾蟲。坎而瘞之。勿焚炙。○上御崇政殿月臺。召見八十至九十歲人。特許扶杖。子弟隨以入。上起立以待之。賜米帛有差。○冬十二月。大臣禮官。以聖壽請宴。上曰。大臣葬前也。何可使我招杜擧之譏乎。盖是時故領議政尹東度卒未葬也。○耽羅貢柑船渰溺。上命加恤典。仍命今年唐柚子薦新數外。勿復封進。○命錄用故相臣鄭苯後孫。初端宗朝三大臣。雖命復官。而鄭苯後孫。未知其爲誰某。尙未擧貤典。會長興鄭姓人爭訟山地。自官掘驗其先墓。得誌石二片。卽鄭光露之墓。而光露以苯之子。預知時事之艱。佯狂匿跡。及其歿也。其子具事實埋誌。遺戒秘諱來歷。至是。因誌石。始詳得其世派。果苯之後也。筵臣以爲言。上曰。異哉。有是命。

 

국조보감 제67권 / 영조조 11 / 44년(무자, 1768)

 

○ 1월. 윤음을 내려 대소 신하들을 신칙하였다.

○ 하교하기를,

“《주례(周禮)》에, ‘왕에게 민수(民數)를 올리면 왕이 절하고 받는다.’ 하였으니,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식년(式年)에 단자를 받들어 가감(加減)을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한성부가 무자 식년 호구수를 올렸는데, 서울의 오부(五部) 및 팔도의 호(戶)는 167만 9865이고, 인구는 700만 6248명이었다. 대개 효종 8년 정유년의 판적(版籍)과 비교하였을 때, 호는 102만이 늘어나고 인구는 480만 명이 늘어났다. 조세를 경감하여 여유있게 만들어주고,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아 국력을 양성하는 것이 이에 성대하였다고 하겠다.

○ 강계(江界)에서 진공(進貢)하는 인삼의 숫자를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송 나라는 화석강(花石綱)으로, 명 나라는 과은(課銀)으로 백성의 마음이 떨어져 나갔으니, 어찌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인삼이 생산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가격이 날로 올라 동서의 백성이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에 관동의 인삼은 이미 상정(詳定)으로 만들고 또 경공(京貢)으로 만들었다. 지금 관서 도신의 소장을 보니, 강계의 백성이 남녀를 막론하고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하니, 직접 보고 듣는 듯하다. 이제 숫자를 줄여주고자 하는데, 우선 어공(御供)으로 더 정한 3근(斤)부터 특별히 없애주도록 하라. 내국(內局)도 이와 같이 하는데, 더구나 다른 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진달한 소장 가운데 여러 건(件)을 조목별로 나열하였는데, 대신과 비국 당상이 소상하게 회계(回啓)하고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호조의 경상사(京上司)에서 연례(年例)로 별무(別貿)하는 인삼 가운데 헤아려 줄여준 것이 매우 많았다.

○ 상이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이 시골에서 강교(江郊)로 올라온다는 보고를 듣고, 호조에 명하여 가사(家舍)의 값을 도와주도록 하고, 제문을 친히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 6월.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 명의 사판(祠版)이 친진(親盡)되어 조천(祧遷)해야 합니다. 송상현(宋象賢)의 예에 의거하여 조천하지 않도록 특별히 허락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훈신(勳臣)은 조천하지 않지만 충신에게는 이러한 규례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치인의 말을 옳게 여겨, 그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라고만 명하였다.

○ 나리포(羅里鋪)의 절미(折米) 2000석을 그 지역의 배로 제주(濟州)까지 운송하도록 명하였는데, 제주에 흉년이 들어서였다.

○ 7월. 선정신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 호남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일어났다. 포제(酺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숭(姚崇)이 한 것처럼 황충을 태워버리는 것이 비록 눈 앞의 급선무라 하더라도 노회신(盧懷愼)의 말도 의견이 없지 않다. 벌레가 곡식을 갉아먹는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에게 말미암는 것이다. 저것이 비록 미물(微物)이지만 한번 호령하여 태워버린다면 이것이 사람에게 사람을 죽이도록 권해놓고 또 법으로 그를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후로 도신을 신칙하여 모아들인 벌레를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려, 태워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80에서 90세까지의 노인들을 불러보았다. 지팡이를 짚으며 자제(子弟)가 따라 들어오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상이 일어서서 맞이하고, 쌀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 12월. 대신과 예관이 성수(聖壽)를 이유로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장례를 치르기 전이다. 어찌 나로 하여금 두거(杜擧)의 기롱을 불러들이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때 고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졸하여 장사를 지내지 않은 상태였다.

○ 탐라(耽羅)에서 진공(進貢)하는 귤을 실은 배가 파선되어 선원이 물에 빠져 죽었다. 상이 명하여 휼전(恤典)을 더하도록 하였다. 이어 올해의 당유자(唐柚子)는 천신(薦新)하는 숫자 이외에는 다시 봉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고 상신 정분(鄭笨)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단종조의 세 대신에 대해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으나, 정분의 경우 누가 후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후손에 대한 은전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장흥(長興)에 사는 정씨 성을 가진 자가 산지(山地)를 쟁송(爭訟)하였는데, 관가에서 그 선묘(先墓)를 파서 검사하다가 지석(誌石) 두 조각을 발견하였다. 곧 정광로(鄭光露)의 묘였는데, 정광로는 정분의 아들로서 시사(時事)가 어려울 것을 미리 알고 미친 척하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죽음에 미쳐 그 아들이 사실을 갖추어 지석에 새겨 묻고는 훈계를 남겨 내력을 비밀히 감추도록 하였다. 이때 이르러 지석을 인하여 비로소 그 세파(世派)를 상세히 알게 되었는데, 과연 정분의 후손이었다. 경연 신하가 이 일을 아뢰니, 상이 기이하다 이르고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주-D001] 두거(杜擧)의 기롱 : 두궤(杜蕢)가 벌 순잔을 들어 올려 기롱하였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지도자(知悼子)가 졸하였는데, 그 임금 평공(平公)이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니, 재부(宰夫) 두궤가 대신의 상(喪)을 당한 날이라 꾸짖었다. 이에 평공이 자책하며 술을 마셔 벌을 선다는 뜻을 보이겠다고 하니, 두궤가 잔을 씻은 뒤에 잔을 들어올렸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禮記 檀弓下》

ⓒ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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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궤(杜蕢)가 벌 순잔을 들어 올려 ㅡ>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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