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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에 대한 추억

작성자임한율(월파)|작성시간26.06.09|조회수41 목록 댓글 2

 

삼촌에 대한 추억 / 이O순

 

지금부터 제 삼촌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렵니다. 작은아버지시지만 ‘삼촌(三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친근하게 느껴져 그렇게 부를게요. 6·25 전쟁 때 울 아버지께서 안타깝게도 행방불명(行方不明) 되신 후, 학교 교사이신 어머니께서는 삼촌과 함께 시댁인 영양군 수비면 큰할아버지 댁에서 사셨습니다.

어느 날 삼촌이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여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요즘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형수님이 한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해서 만나보니 키는 큰 데다가 얼굴은 말상이고 여성스러운 면이 전혀 없어 어머니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삼촌이 “그 여자가 나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라고 말하니 받아주어야 할 것 같다고 하여 결국 둘은 결혼하였답니다. 삼촌은 워낙 깔끔하게 잘생긴 분이라서 어머니는 삼촌이 너무 아까웠다고 해요.

삼촌은 경북대학교 졸업한 후 대구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교편(敎鞭)을 잡으셨는데 숙모를 끔찍이 아껴주었지요. 그런데 계속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많았답니다.

 

내 오빠가 국민학교 입학할 무렵 당시 시골 영양에 살고 있었지요. 삼촌은 큰 도시 대구에서 학교 다니는 게 좋지 않겠냐며 자식처럼 잘 돌봐주겠다고 하여 오빠는 삼촌 집에서 학교 다니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던 삼촌네는 오빠를 아들처럼 애지중지 귀여워하며 보살폈지요. 그러던 중 결혼 10년 만에 정말 귀하게 아들을 낳고, 2년 뒤엔 또 둘째 아들을 낳았지요. 그래도 우리 오빠를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삼촌께서 거두어 주셨답니다.

오빠는 미술에 소질이 있어 서울대 미대에 가고 싶어 했으나 집에서 뒷받침을 못 해주니 서라벌예대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나는 경북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합격하여 가족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지요. 그런데, 면접시험 후 삼촌께서 찾아와 내게 “네 키가 너무 작아 교사로서 잘해 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교수회의가 열렸다고 말씀하더군요.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지요.

다행히 삼촌 덕분에 합격은 하였으나, 어머니는 오빠 뒷바라지 하겠다며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삼촌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어요.

삼촌 집에서 지낸 1년 동안 나에게 부족하거나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시고 항상 자상하게 신경 써주셨죠.

그런데 나는 삼촌이 전해준 충격적인 ‘키가 너무 작아서’ 그 말을 들은 후 학업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1학년을 마친 후 더 이상 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어 삼촌께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다시 생각해 보라고 간곡히 만류하셨지요. 많이 죄송했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삼촌께서도 정말 안타까워하셨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삼촌께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5년 뒤 저는 5급 을류 행정직(지금의 9급) 시험에 합격하여 평생을 공무원으로 근무한 나의 선택을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숙모는 그 뒤 두 아들을 키우며 살림을 하였는데, 나중에 어처구니없게도 그 몹쓸 노름에 빠져 빚을 많이 지셨나 봐요. 내가 삼촌 댁에서 학교 다닐 때부터 이미 도박 때문에 매일 늦게 집에 들어오고, 여간해서 화를 내지 않은 삼촌은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화를 삭히셨죠.

몇 년 뒤 삼촌이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데, 이사하는 날 “왜 빚을 갚지 않느냐?”며 빚쟁이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리고 난리가 아니었대요. 삼촌께서 어떻게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그들은 물러갔고, 삼촌은 그 후로 빚을 갚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셨죠.

학교 퇴근 후엔 또 학생들 과외까지 하며 애쓰시다가 결국 건강에 무리가 와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다가 결국 오십 대 중반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빈소에 다녀오셨는데 막내아들이 “누가 울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느냐?”며 펑펑 울더랍니다. 그런데 빈소에서 울던 숙모가 갑자기 조용해서 어머니가 살짝 보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더래요. 아마 그때 들어온 남자분이 애인이었던 것 같아요. 1년 후 삼촌 제삿날 제가 대구에 내려갔는데 제사는 산소에서 조촐하게 지냈어요. 그렇게 산소에 다녀온 다음 날 숙모가 근처 다방으로 나를 나오라고 해 나갔더니 상이군경인 빚쟁이들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숙모가 나에게 잠시 후에 올 테니까 여기 잠깐 있으라 하고 잽싸게 나갔지요. 두 시간쯤 후 얼마간 돈을 갚았는지 숙모는 겨우 풀려났지요.

다방에서 나오니 건너편에 남자 한 분이 서 있더라고요. 그 후 1년이 지나고 숙모는 빚잔치로 거의 빈 몸으로 나와 월세방을 전전하며 두 아들과 생활하였지요. 그렇게 귀하게 얻은 두 아들을 보따리 장사한답시고 거의 방치한 채 집에는 가끔 들렸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가보니 아이들이 불쌍하게도 하루 한두 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더래요. 세상에 이럴 수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 흘러 사촌들도 이제 성인이 되었지요, 하루는 큰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며 인사를 드리러 와서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어요. 그런데 며칠 뒤 숙모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다고 해 급히 병원에 달려가서 너무나 놀라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결혼한다고 아이들 이모네 집에 숙모와 아들 그리고 예비 신부 셋이 인사차 갔었대요. 그런데 갑자기 숙모가 집에 빨리 가자며 재촉하는 바람에 택시를 탔는데, 그만 교통사고가 크게 발생했대요. 숙모와 예비 신부는 뒷좌석에 앉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데 앞좌석의 큰아들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답니다.

내가 병원에 갔을 때 숙모는 자기 아들이 사망했는데도 자기 아픈 게 무에 그리 대단한지 앓는 소리가 진동하더군요.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 엄청 똑똑한 데다가 인물도 훤칠한데... 나 같으면 그런 아들 잃고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둘째 아들은 어머님이 원망스러울 만한데 극진히 효도하더군요. 결혼해서도 어머님 모시고 살며 칠순 잔치도 거하게 해드리고 암으로 투병하실 때 병간호도 최선을 다하고, 팔순이 될 무렵 돌아가실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더라구요. 그래도 복 받은 노인네죠. 나 같으면 언감생심, 그렇게 모시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도 먼저 가신 삼촌이나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옵니다. 참으로 좋으신 삼촌이셨는데, 저 세상에서라도 부디 평안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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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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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버들 | 작성시간 26.06.10 남자든 여자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경로가 결정되는가 봅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게 훨신 좋은 인생이라 생각이 듭니다.
  • 답댓글 작성자임한율(월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0 옳거니~ 맞는 말씀이네요.
    "만남의 인연" 참으로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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