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청(파르티잔스크)으로 돌아와 군사학 서적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김경천 장군과 수청(파르티잔스크3부 - 장군과 수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담합!
김경찬 장군과 수청(파르티잔스크)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해방의 운동의 무대가 팔레스타인이었지만 주요 무대가 갈릴리였던 것처럼 김장군의 무대는 연해주였지만 주요 무대는 수청이었다.
첫째, 그는 망명 후 수청에서 군사 지휘관으로 무장독립투쟁의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독립군 사병을 모집하고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들과 전투를 치러 마적의 약탈에 속수무책이었던 수청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다.
둘째, 그는 수청지역 마적단을 소탕한 후 군정 책임자가 되었다. 창해청년단의 참모관이었던 정재관은 세금 관련의 민정을 책임자가 되었고 그는 수청지역의 범죄 문제 문제를 다루며 순회하며 치안과 민생 안정에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수청은 제 2의 조선인 거주 지역으로 활기찼으며 독립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셋째, 군 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이 인정되었다. 그는 수청에 도착하자마자 마적, 백군과의 전투를 시작하였고 적은 군인으로 많은 적들을 섬멸, 퇴치하였다. 그리하여 망명한지 2년 만에 수청고려의병대(연합 빨치산 부대)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었고 뜨레치푸진에 사관 훈련양성코스를 열어 군사학 교관으로서 장교들을 배출하였다.
넷째, 그의 전투 영역이 연해주로 널리 확장되었다. 그는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수청지역을 넘어서 마적 소탕과 백군 격파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만전투에서는 러시아와 조선인으로 구성된 통합부대를 이끌고 대승을 거두어 연해주 전체 빨치산부대 혁명군사위원회로부터 포시예트 및 훈춘 구역 빨치산부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활동지역은 추풍과 연추지역까지 확장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에 시작되어 6일에 끝난 전투이며 홍범도와 최진동과 간도국민회, 신민단의 독립군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인 것은 6일 하루 몇 시간뿐이었다. 청산리전투로 유명한 홍범도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의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에서 26일에 있었던 두 독립군부대의 6일간의 전투로 치고 빠지는 전투였다. 그러나 김경천의 전투는 1920년 5월에서 시작되어 1922년 5월까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에게 그의 전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경천아일록⌟, 150쪽에 나오는 그의 시 “영하 사십도 시베리아 추위에 여름 모자 쓰고서 홑저고리로 밑 빠진 메커리(짚신)에 간발하고서 벌벌 떨고 다니는 우리 독립군”의 피어린 “이만전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섯째, 그는 수청 나제즈다(희망) 협동농장을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극동러시아의 안정을 위하여 일본과 비밀협상을 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이 극동러시아에서 물러가는 조건을 다 수락하였다. 사할린 섬을 할양하였고 사할린선 위쪽에서의 어업권을 허락하였으며 조선인연합유격대에게 무장해제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천명한 러시아 소비에트는 1922년 11월 모든 조선인유격연합부대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무장 해제를 당한 김경천 장군은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수청 금갱리에 터를 잡고 나제즈다(희망)협동농장을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래의 전투를 생각하며 틈틈이 군사학 서적을 번역하며 수시로 동료들을 만났다.
수청은 그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경천아일록⌟을 완성한 곳이며 또한 망명 후 6년 만에 아내와 함께 가정을 꾸린 곳이고 두 아들과 막내딸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청은 그의 제 2의 고향이며 동시에 조선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 희생의 제단이기도 하다. 그는 1932년 하바롭스크 정치부에 이어 블라디보스토크 국제사범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수청을 떠날 때 까지 11년 동안 거주하였다. 물론 도중에 우수리스크에서 거주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청(파르티잔스크)에서 그의 흔적은 찾아 볼 길이 없다. 전투 현장, 사령부 사무실, 부대와 함께 이동했던 길, 사관양성소, 순회했던 길, 살았던 집들 등이 팔십여 년의 세월 동안 파괴되고 방치되어 완전히 지하에 묻혔다.
스탈린의 소수민족 박해정책으로 조선인들이 뿌리 뽑혀 중앙아시아 추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홍범도처럼 카자흐스탄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오래 살지 못하고 한 달 만에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통 끝에 일찍이 세상을 떠나 동포사회에서 잊혀 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수청과 함께 수청고려의병대 사령관으로 포시예트 및 훈춘 구역 빨치산부대 총사령관으로 우리민족의 독립투쟁역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23년 무장 해제를 당한 이후 김 장군의 행보를 생각한다.
첫째, 그는 재망명하지 않았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보다 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임정이 있는 상해나 북경, 북만주 등지의 대도시로 떠날 수 있었으나 그는 수청으로 돌아와서 군사 서적을 번역하여 출판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이라는 명분을 추구하지 않고 망명의 자리에서 수청의 노동자, 농민 조선인들과 함께 하며 전투에 필요한 군사지식을 계속 연마하였다.
둘째, 그는 독립운동의 분열과 대립에 좌절하였으나 초연하였다.
1923년 1월 1일자 일기에서 그는 “…생략 … 몇 년 동안 분분하던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의 당파싸움에 대해 자세 자세히 듣고 그 내막도 알았다. … 생략… 이용호가 왔다. 나는 요즘 상해파 사람과 상종이 많다. 그러나 내가 상해파에 든 것은 아니다. 나는 양자를 냉철히 관찰하는 것뿐이다. 어느 파에 대해서도 나는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볼 것이다.” ⌜경천아일록⌟, 142쪽
또한 그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분열만 일삼는 독립 운동가들의 국민대표회가 일치하여 의미 있는 일을 결정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상해국민대표회의에 가는 사람도 많다. 나도 가기로 결정이 되었다. 상해파에서 나를 대표회의의 싸움꾼으로 추거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싸움에 무관한 까닭에 거기로 가려한다. …생략 … 국민대표회에 가는 나의 목적은 단지 내외지의 활동가들을 이 기회에 만나보자 함에 있다. 그 외에 이것으로 이번에 하등의 효과를 크게 내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경천아일록⌟, 143쪽
그는 1923년 국민대표회 참석 후 그는 주도권 다툼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상해에서 온 국민위원들과 공산당원 일파의 배타성과 상호 비방에 절망한 나머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중동철로선에 있는 김규식 일파가 혁신군을 조직하고 그를 군무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1924년 1월 1일에 부치는 노래에 그의 비참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의 일신도 한심하거니와 나의 집도 한심하다.
우리 사회도 한심하고 독립운동도 한심하다.
일꾼도 한심하고 민족도 한심하다.
따라 죽자하여도 한심하다.”⌜경천아일록⌟, 149, 150쪽
셋째 그러나 그는 결코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은 외출도 하지 아니하고 최수산과 더불어 장기로 소일하였다. 추운 정도가 엄동이 완연하다. 해항무관학교 장꼴랴 한테서 편지가 왔다. 나는 겨울에 러시아어 공부를 하여 보고자 한다. 어찌 될 런지 계획해 보아야지.
오늘 최수산과의 대화중에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의견이 다르다. 그는 2-3년간만 더 기다려 보아서 현재 상황대로 있으면 독립운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부치겠다고 말하니 나는 매우 의미있게 듣는 동시에, 그 소리가 구차스럽게 들린다. 세력이라는 다 그런 것인지!
…생략 …
독립운동이 세계대세가 되어 자연히 침착해져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사조의 발흥이 독립운동을 더 큰 의미로 넓혀준다. 말하자면 혁명운동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외관은 평정상태에 있으나 내용은 지나간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이상이다. 조직적으로 들어간다. 파괴하기 위하여 건설로 간다. 그러므로 최수산의 말과 같이 2-3년까지 현재 상황대로 가면 독립운동이 불가능하다 하는 것을 나는 오해로 안다.
그러나 나는 조직시대에 준비를 하여야 하겠다. 훗날에 대웅비할 기능을 더 기르자 한다. ”⌜경천아일록⌟, 183쪽
1925년 12월 8일 화요일의 일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다.
“어제부터 내린 눈이 한 척이상이나 쌓였다. 경천이 이 시베리아에 내린 눈을 밟은 지가 이미 7년이 곧 끝나고 8년을 맞으려한다. 그사이 심신의 고통도 많았지만 심신의 단련도 많았다. 그러나 혁명의 뜻이라는 이름으로는 한 일이 적다. 적은 것은 그만두고라도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을 하지 못하고 오늘 이래 묵은 올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니, 아까운 날과 달을 보내니 실로 죽지 못하여 사는 것 같다. 나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자거나 또 무슨 일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것 외에는 드문드문 가슴이 뜨끔뜨끔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이 어찌 되나 어쩌면 좋을까하고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여느 때에나 마음이 불안한 신경상태에 있다. 번뇌중이다. 그리하여 몸이 건강해지지 않는가 한다. 우주를 지으신 분은 어찌하여 나에게 혁명의 사상만 주고 그 권세를 주지 않는가. 권세는 스스로 준비하라는 것이겠지?
이것이 요즘 나의 표어이다.” ⌜경천아일록⌟, 184쪽
1925년 12월 15일 화요일의 일기에 민족을 향한 희망이 절절하게 나타난다.
❲부여족이 웅비하는 달❳
“이전 겨울로는 오늘이 제일 춥다. 장작림이 다시 일본의 원조를 얻어 봉천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지나 ❲중국❳의 오늘 형편인가 한다.
동양의 중앙부가 이같이 어지러운 때에 우리 부여민족의 혁명운동은 적적하니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해외에 널려있는 부여족은 그 분산거주 상태를 보아서는 무슨 일을 할듯하나 실제로 들어가면 어쩌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답답하다.
4천 년 전 부터 만주 및 부여반도에서 웅비하고 또 흩어지던 우리 민족은 지금 이 같은 발전력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산재하지 아니한 곳이 없도록 분산되었다. 이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어떤 정부나 기관이 유도하거나 보호해서 된 것이 아니요 개인적으로 자연스럽게 살 길을 찾아나서 정주하여 이렇게 된 것이다. 우연이다. 그 열매는 언제 열릴까!”
⌜경천아일록⌟, 186,187쪽
넷째 그는 끝까지 민족주의자로 남았다.
그는 러시아 적군이 조선 독립군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과 수교를 맺고 대사를 파견하는 것을 보면서 러시아에 대한 신뢰를 내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추풍 재피거우에서 러시아 적군 기병부대가 재피거우 산 속에 있는 독립군 31명을 몰살한 일과 연이어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던 청년들 10여명을 학살한 사건에 분노하였다. 그는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고 일본군과 백군(황제파)을 패퇴시키기 위해 함께 싸운 전우요, 동지인 조선 독립군과의 의리와 약속이 러시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무고하게 피살당한 사람 중에 그의 휘하에서 있었던 청년이 있어서 그의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컸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겪은 러시아 혁명군들의 비인간적인 일들로 인하여 그는 공산당을 불신하였고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경천아일록⌟, 20쪽, 221쪽
다섯째 그는 조선 독립투쟁을 위해 세계정세를 주시하며 끊임없이 연구하였다.
그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정치의 흐름을 주시하며 미래전략을 구상하였다. 신문과 군사 서적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의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하여 동서고금의 영웅들과 전쟁, 전투에 관한 책들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는 일기뿐만 아니라 한시를 자작하였으며 자신의 희망과 생각을 수필로 쓰는 문인이었으며 교관으로, 교수로 활동한 지식인이며 지장(智將)이었다.
여섯째 그는 전투의 와중에서 일기를 썼다. 자신을 성찰하였다. 전투를 치루며 기록한 그의 일기는 길지 않지만 독립운동의 전투 현장을 누비며 기록된 것으로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의 일기는 당시 백군과 내전 상태에 있었던 연해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과 관계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료이다.
그는 1925년 5월, 수청 만춘동에서 그 동안 써왔던 일기를 모아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경천아일록⌟을 완성하였다. 일기에는 자신의 출생과 일본 유학. 망명을 결심한 과정, 지청천과 함께 망명하며 겪었던 일과 서간도의 경험, 신한촌 이야기, 수청지역에서 벌인 여러 전투 이야기, 국민대표회의 이야기. 독립투사들과의 교류 및 담화, 무장해제 당한 조선인 장군으로서의 고통과 좌절, 세계정세 등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김 장군의 부여족에 대한 꿈, 독립운동은 가혹하게 짓밟혔다. 1936년 그는 간첩죄로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았다.
스탈린이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추방하기 전에 적군 편이 되어 강력하게 러시아혁명을 지지하였던 2500여 명의 조선인 공로자, 사회주의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그 후 스탈린의 러시아는 망국의 백성인 조선인들, 황폐한 연해주 땅의 개척자이자 식량의 보급자였던 17만 2천여 명의 조선인들, 백군에 저항하여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위해 생명을 바쳐 헌신한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내던졌다.
김 장군의 가족들도 카자흐스탄에 내던져졌다.
김 장군은 2년 반 복역하고 난 뒤에 카자흐스탄에서 가족과 합류하였으나 1개월 만에 다시 간첩죄로 체포당하였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54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그가 1925년에 기록한 ⌜경천아일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4년이 되는 해 2005년 무렵에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저서를 통해서 시베리아 연해주 수청일대에서 마적, 백군 그리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조선 빨치산의 고통과 희망, 애환과 처참한 당시의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조선 독립 운동가들의 당파로 치닫는 분열상과 독립투쟁을 지원을 보장한 러시아가 망국 백성, 조선인을 일본군과 백군의 총알받이로 이용하는 러시아의 토사구팽을 소리 없이 보여준다. 그는 자강 없이 독립 없으며 독립은 말에 있지 않고 실력과 실천에 있음을 웅변한다.
2025년 5월 17일 토요일 묘시
우담초라하니
*참고 문헌
1.김경천 저, ⌜경천아일록⌟, 학고방, 2012
2.박환 저, ⌜러시아한인 독립전쟁⌟, 선인, 2022
3.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저, 이준형 역⌜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 역사비평사, 1990
4.송호근 저, ⌜연해주⌟, 나남, 2025
5.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러시아 • 유라시아 연구사업단 엮음 ⌜역사 속의 한국과 러시아⌟, 선인, 2014
6.이혜옥 저,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 글을읽다, 2021년
7.박시백 작,⌜35년 1921-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비아북,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