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성지 용정을 아십니까? 1부 수정 – 용정시 역사 유적지 안내
북간도 독립운동의 성지 용정을 아십니까? – 용정시 역사 유적지 안내
연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모아산 종점에서 내려 용정 행 시내버스를 타고 용정시내에 들어가 걸어서 혼자 유적지를 탐방하는 역사 기행은 나로 하여금 북간도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의 역사와 한국의 독립운동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주었다. 1920년 경신년에 대대적인 학살사건이 있었던 장암동의 경우 수차례 방문하는 과정을 통하여 사건을 보는 나의 시각이 신채호를 극복하고 랑케를 디디고 일어서 E. H. 카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운동의 성지인 용정을 방문하는 것은 나에게 거룩한 순례가 되었다.
우리들에게 중국여행은 무조건 단체 패키지 투어로 가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중국과 수교가 되고 여행이 시작된 1990년대에는 단체가 아니면 비자 받기도 어려웠고 사회주의 국가의 경직성과 통제는 물론이고 여행제반 시설이 낙후하여 개별 여행이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자 없이 여행이 가능하고 유쾌한 여행에 필요한 모든 시설의 수준이 한국처럼 높아졌다. 특별히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우리 한글이 통하고 비행 거리가 가깝고 여행 경비가 그리 비싸지 않기 때문에 자유여행을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 때문에 자유여행을 선 듯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반복된 학습과 이념이 주는 고정관념을 깨고 용기를 내어 중국 땅 북간도 용정에 서보라. 그러면 조선의 멸망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실상과 의미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이다.
먼저 용정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난 뒤에 용정시 안에 있는 유적지를 번호대로 안내하고자 한다.
육도하가 해란강에 합수되는 합수목
용정지명의 기원이 되는 우물
용문교와 해란강
해란강
1677년 ~ 1884년 : 청나라 봉금령 시대의 용정과 조선인들의 월강(越江)
용정은 연변자치주 6개의 시와 2개의 현 중에서 한국식으로 붙여진 유일한 지명이다.
용정은 해란강 하류 충적평야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육도하가 서남부에서 해란강으로 합수되고 있어 원래는 “육도구”로 불리었다. 이 육도구가 용정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인들의 용정 개척사와 관련이 있다.
용정일대의 선주민인 건주여진 왈하부인들은 1644년 청나라가 북경을 쳐들어갈 때 청나라 대군을 따라 중국본토로 들어갔다.
1677년 청나라 조정은 여진족(만주족)의 대이동으로 무인지경이 된 압록강 북안의 흥경 이동(以東)과 길린성 이통의 이남(以南)과 두만강 이북(以北)의 1,000여 리 되는 지역을 여진족(만주족)조상의 발상지, “용흥지지”로 명하고 “봉금령”을 선포하여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 후 200년의 세월이 흐르고 조선의 천민들은 삼정의 문란과 양반과 관리들의 수탈로 살기 어려워지자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1858년 봄, 함경북도 유선 돌골의 방영삼과 이호철 등이 “봉금령”으로 무인지경이 된 두만강을 건너 칠십 여리 밀림에 들어가 농막을 짓고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여 돌아가는 계절 농사를 지었다.
1869년 기사년과 1870년 경오년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자 함경도 북관의 기민(飢民)들은 월강(越江)은 사형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밀입국하여 해란강 줄기를 따라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1877년 봄, 평안북도 이재민 김언삼과 함경북도 회령 출신 이재민 장인석과 박윤언 등 14명의 남녀노소를 거느리고 삼합으로 들어와 육도하를 따라 해란강 합수목(토성보)에 정착하였다.
조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숨어들어 봉금의 땅을 개간하는 10여년 사이에 청나라는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중국 본토 한족(漢族) 빈민들의 만주행 러시에 직면하여 1875년에 이민실변 정책을 압록강이북지역에 먼저 실시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비로소 두만강 이북 땅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1년에는 먼저 한족(漢族)을 대상으로 봉금을 해제하여 많은 혜택을 주며 적극적으로 이민을 권하였다.
1883년 청나라와 조선은 ❰길림조선상민무역지방규약❱을 체결하여 화룡욕(용정시 지신진), 광제욕(용정시 개산툰진 광소촌), 서보강(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통상국검사소를 두어 양국민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1884년 청나라는 연변지역에서 한족(漢族)이민이 실패로 끝나자 조선인들의 개간을 합법적으로 허락하였다.
1885년 ~ 1905년 : 조선인 전문개간구와 조선인들의 벼농사 성공
1885년 청나라는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700 리, 너비 50 리 되는 지역을 조선인 개간구로 정하고 월간국에서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해란강 유역 도처에 조선인 마을들이 세워졌고 도합 5,590여 호에 이르렀다. 청은 조선 개간민을 관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을 4보, 39사, 129갑, 415패에 소속시켰고 용정은 용지사에 속하였다.
1886년 정준이 밭을 갈다가 돌담 아래 묻혀 있는 옛날 선주민, 여진사람들이 썼던 우물을 발견하였다.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용두레를 설치하였다. 봉금이 풀려 이주의 자유가 허용되어 개간지를 찾아 오가는 조선인들과 한족들이 우물가에서 목을 축이고 쉬며 인근에 정주하며 그 지역을 “용두레촌”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1세대 정착주민들이 용두레의 용(龍)자와 우물의 정(井)자를 합하여 용정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정촌은 조선인은 물론이고 청나라 관리들마저도 인정하여 공식 지명이었던 육도구를 대체하게 되었다.
1890년에 청나라가 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만주족처럼 머리를 깎고 만주족의 옷을 입는 치발변복과 청나라 국적으로 국적을 바꾸도록 입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최고의 예와 효로 여기는 적지 않은 조선인들은 토지집조와 경작권을 포기하고 러시아 연해주와 북만주와 남만주로 떠나갔다.
1893년 용지사(용정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개간민은 34호였고 개척지 면적은 243, 71정보였다. 이에 청 정부는 새로운 조선 개간민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처음 개간한 황무지는 3년 동안 지세를 내지 않고 3년 후부터는 정보당 1전 8푼의 세금을 내고 경작권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새로운 개간민들이 유입되고 그들의 열정으로 1900년경에 용정부근의 대교동에서 연변에서 최초로 관개 수로를 이용한 벼농사에 성공을 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연변 일대에 새로운 논밭이 개간되어 용정은 물론이고 연변 일대는 벼농사의 성공으로 비로소 먹고 살 만한 세상,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연변 특히 용정의 수전 재배의 성공은 경제적인 풍요와 함께 독립 운동을 꿈꾸는 망명 지사들과 청년투사들을 불러 들였다. 그리하여 용정은 “토지”의 서희와 길상이가 독립운동을 위해서 찾아가는 곳이요,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이 의병활동을 위해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용정은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본 경찰과 일본군도 함께 들어오는 곳이 되었다.
1903년 청나라는 ❰주정학당장정❱을 발표하여 신학교육운동을 제창하였는데 조선인들의 교육 또한 청나라의 신학교 교육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런 중국의 영향과 당시 조선을 휩쓸고 있던 조선의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조선인 마을에 신식교육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구(舊)서당이 신식서당으로 개편되었다. 신식서당(개량식 서당)과 학교는 조선어와 조선 역사, 조선 지리와 산수를 가르쳤다. 신식교육을 받은 교사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당과 학교와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고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1904년 4월 훈춘현의 옥천동에서 기독교장로교인 김창학집사와 최씨가 최초의 조선인 학교인 동광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용정시 지신진 광동촌에 동광학교와 용정시 지신진에 덕흥학교가 세워졌다.
1903년에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해 건설된 동청철도가 개통되어 연변일대의 조선인들이 철도연선을 따라 북만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포츠머스조약❱으로 장춘 이남의 동북영토가 일본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이에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은 용정의 땅의 일부를 조차하여 조계지❰영국더기❱를 만들었다. 이 ❰영국더기❱는 치외법권으로 조선 독립투사들을 보호하였고 3.13만세 시위를 비롯하여 1920년대 조선독립운동에 물심양면으로 크나 큰 기여를 하였다.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보호조약은 조선인들의 만주 이동을 촉진시켰다.
1906년 ~ 1915년 :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사립학교와 캐나다장로교회
2부로 계속
2025년 8월 9일 토요일 묘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