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과 거짓의 기준은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뤄온 주제다. 참과 거짓의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는 철학자들이 있다. 플라톤 같은 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참과 거짓의 객관적인 기준은 없으며 주관적 기준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믿는 철학자들이 있다. 소피스트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가입해 있는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서 송혜교의 팬들과 전지현의 팬들이 논쟁을 벌였다. 송혜교와 전지현 중 누가 더 예쁘냐가 주제였다. 논쟁은 비방이나 욕설 없이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진행됐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의 토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론의 주제가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더 예쁘냐를 가지고 논쟁한다는 것이 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더 나아가 여성을 외모로 평가한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측면이 강하다.
▲ "송혜교가 예쁘냐, 전지현이 예쁘냐?" 일상에서 자주 겪는 문제들 속에 철학은 숨어있다 |
사람은 외모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란 것이 있다. 성격도 있다. 개인의 다양한 측면들이 종합되어 한 명의 사람을 구성한다. 그중에서 굳이 외모만 따로 떼어내어 비교한다는 것은 여성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일 수 있다.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사고한 것일 수 있다. 송혜교와 전지현의 열성 팬들에 의해 송혜교와 전지현은 외모로만 평가받았다. 어떻게 보면 문제가 많은 토론이었던 셈이다.
제 눈의 안경이라고?
문제가 있는 토론이기는 하지만 철학적으로 논란거리가 있는 토론이기도 했다. 이 글의 주제인 참과 거짓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는 토론이다. 이 토론은 형상적으로 두개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송혜교가 전지현보다 더 예쁘다’란 명제가 있다. ‘전지현이 송혜교보다 더 예쁘다’란 명제도 있다. 이 두개의 명제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두개의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둘 중의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일상에서 자주 겪게 된다. 철학적인 문제란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마주하게 된다. 짬뽕보다 자장면이 더 맛있다는 주장을 마주하게 된다. 액션영화보다 에로영화가 더 재미있다는 주장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철학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제 눈의 안경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시기에 따라 참과 거짓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송혜교가 더 예쁘다’가 참이라면, 당신에게 ‘전지현이 더 예쁘다’가 참일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참, 거짓이 달라질 수 있다. 일면 그럴듯해 보인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듯 하다.
모두가 같은 안경을 끼다
제 눈의 안경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토론과 합의를 중시한다.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토론하여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눈의 안경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황상윤과 조인성 중에 누가 더 잘 생겼나요?”
이 질문을 던지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고민해보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조인성이 더 잘 생겼다고 대답한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그렇게 대답했다. 황상윤이 조인성보다 잘 생겼다고 대답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단 한사람도! 빌어먹을!
제 눈의 안경이라면서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모두가 비슷한 안경을 껴서 그렇다고 변명한다. 시대 상황에 따라, 문화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은 비슷한 안경을 끼게 된다는 것이다. 일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단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아일 뿐이다.
주관적인 취미판단, 객관적인 사실판단
많은 사람들이 제 눈의 안경이라고 생각하는 판단들이 있다. 자장면이 맛있다, 에로영화가 재밌다, 송혜교가 예쁘다와 같은 판단들이다. 플라톤 같은 이는 이런 판단도 참과 거짓의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관적이라 생각한다. 가치판단 중에서도 취미판단에 속하는 판단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판단을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판단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광주항쟁은 1980년 일어났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등과 같은 판단들이 그것이다.
2006년 국정감사 때였다. 산업재해에 대한 자료가 발표되었다. 국감에서는 장해자로 발표됐지만, 나는 장애인이라 고쳐 사용할 것이다. 사실에 관한 자료로 내용은 이렇다.
2001년 산업재해 장애인은 2만 5,360명이다.
2005년 산업재해 장애인은 3만 6,973명이다.
이 사실들을 통해 4년 동안 산업재해 장애인은 45.8%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1년과 2005년 사이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산업재해 장애인은 45.8%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석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입장
여기에서 하나의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산업재해 장애인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노동조건이 열악해졌다는 의미이며,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 정책이 잘못됐다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산업재해 장애인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산업재해로 판정받을 수 있게 됐다는 의미이며,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 정책은 올바르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 해석의 차이는 주어진 사실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를 ‘당파성’이라 부른다.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이란 것도 기실 따져보면 또 하나의 당파적 입장일 뿐이다.
단일한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해석하고, 분석하고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그 해석과 분석, 원인 추적은 사람마다 다르다. 처지와 조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처지와 조건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분석되고 해석된다. 어느 당파적 입장에 서 있느냐에 따라 같은 세상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황혼녘에 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고자 한다. 세계를 분석하고 원인을 찾고 정당화한다. 그것이 철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헤겔은 말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난다고.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이다. 올빼미는 미네르바의 분신이다. 그러니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지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철학인 셈이다. 이 철학은 새벽녘에 날지 않는다.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노동 정책이 존재한다. 누구는 노동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한다. 누구는 노동 정책이 잘못됐다고 평가한다. 하나의 노동 정책을 바라보는 당파적 입장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철학은 이 노동 정책에 대해 바로 해석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은 지난한 역사의 과정을 거쳐 이 노동 정책이 완전히 구현되었을 때 비로소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절대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해석을 내릴 정도로 인간 이성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해석을 넘어 변혁으로
그리고 해석 그 자체만으로 중요하지도 않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당파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해석이 다른 모든 해석을 억누르고 유일한 해석으로 등극할 수는 있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했을 경우에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의 사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 정책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다른 모든 해석을 평정하고 유일한 해석으로 등극한다 하더라도 4년간 산업재해 장애인이 45.8% 증가했다는 사실이 달리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사태 자체가 달라지면 그 해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노동 정책이 변경되면 노동 정책에 대한 해석은 또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철학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진리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 속에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세계의 변혁 속에 구현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황상윤 45jung1004@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