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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돌 타래모음3 `내 나라는 공사 중`

작성자산음|작성시간09.02.05|조회수21 목록 댓글 1

 

한돌 타래모음3 '내나라는 공사중'

 

1. 먼지나는 길
2. 달아달아 밝은 달아
3. 용서의 기쁨
4. 산삼의 나라
5. 고운동 달빛
6. 조율
7. 껍데기 세상
8. 금강초롱

 

한돌의 음반 타래모음3 '내나라는 공사중'의 각 곡들에는 한돌님이 쓴 글들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가사 밑에 글들을 올려놓았습니다. 글들을 읽으시면 노래를 좀 더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들은 누리공간에는 없는 관계로 모두 직접 두손가락으로(제가 게을러서 앞으로도 계속 두손가락으로 글을 쓸 것 같습니다.) 쳐서 올렸는데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한돌 타래모음3 '내나라는 공사중' 전곡듣기♬

 

 

1. 먼지나는 길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먼길을 지나오면서 나 모르게 때가 묻었지
때묻은 내 모습 바라보며 사람들은 놀려댔지
내 모습보고 싶어 나를 만나고 싶어
슬픈 내 이름을 불러 본다 오늘도 먼지 나는 길
천국이 어디냐고 길을 묻는 사람이 있어
십자가의 종소리는 오늘도 주님을 믿으라 하네
주님은 어디계신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하늘엔 하느님이 너무많다 오늘도 먼지나는 길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가르침도 배움도 아니었어요 어느 길로 가야 하나요
선생님의 눈물 속에 맴도는 우리의 모습
길마다 공사 중인 내 나라는 오늘도 먼지 나는 길
먼지 나는 이길 위에 우리가 빗물이 되어
어린 햇살 반짝이는 그 마음에 비 개인 아침이 되자

 

차라리 흙먼지 나는 옛길이면 솔직하고 좋았을 것을. 지금은 그런 먼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먼지가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느님을 믿으려해도 너무 많아서 어느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인지 알수가 없다. 뜻깊은 우리 선생님 소리없이 사라지고, 겉멋들은 제자만 남았다. 아이들에게 만큼은 우리 스스로가 비개인 아침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먼지를 일으키고 다니니 그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또 먼지를 일으키고 다닐것이 아닌가.

 

가는 곳마다 공사중이어서 이 나라가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공사가 부실공사로 끝나기 때문에 어지러운 것이다. 교육문제, 경제문제, 종교문제 등등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그 어떤 틀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자주 무너지니까 사람의 마음까지 흉하게 변해가는 건지도 모른다.

 

(한돌, 1994년 오대산 겨울)

 

1. 먼지나는 길

 

 

2. 달아달아 밝은 달아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1910년 8월 29일! 치욕의 날이었었지
통곡의 날이었었지 그 아픈 세월을 지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냥 꿈이었던가
벌써 잊었단 말인가 혼이여 혼이여 혼이여
분노의 세월이었지 피 끓는 세월이었지
뼈저린 어둠을 지나 우리는 무얼 했는가
그냥 꿈이었던가 벌써 잊었단 말인가
혼이여 혼이여 혼이여
아 구정물 흐르는 저 강물 속에
일본 달이 있네 미국 달도 있네
우리 달은 어디에 어디로 갔는가
우리 달은 밝은 달은 어디로 갔는가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갔나
강물이 더러워서 숨어 버렸는가
또 다른 분노가 이 가슴을 후빈다
우리 달은 밝은 달은 어디로 갔는가

 

제발 신세대니 X세대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언제 부터 누가 시작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의미도 없고 오히려 세대간에 벽만 두터워졌다.자기일에 수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 든든한 대한민국인데 얼마 되지도 ?莩? 신세대 X세대들이 힘센 방송이나 신문, 그밖에 광고에서 판을 치니 잘 할려고 해도 기운빠지는 대한민국이다.

 

이태원엔 미국달이 뜨고 압구정동에는 일본달이 뜨는데 한강물에 출렁이는 저 달은 누구의 달인가? 밀려오는 물결에 혼까지 뺏겨버리면 이나라는 누가 지키나! 그 흔해 빠진 사랑 놀음에는 자존심 들먹이면서 나라 사랑에는 왜 들먹이지 않나. 1910년8월29일은 국치일이다.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넘어간 날이란 말이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이제 해방된지 50년이 된다. 집집마다 태극기는 달겠지만 과연 진정으로 우리가 해방이 된건지 아직도 치욕의 날을 살고 있는것 같다.

 

(한돌, 1993년 북한산 여름)

 

2. 달아 달아 밝은 달아

 

 

3. 용서의 기쁨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비에 젖은 그대 뒷모습
아무말 못하고 떠나가네
나도 모르는 미움 속에서
그대 이름 불러 본다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가시밭길을 가는 사람아
내 어찌 그대의 추운 마음을
안아 주지 못했는가
우우 소낙비야 날 용서해 다오
내 마음속에 먼지를 모두 씻어 다오
비에 씻긴 저 산의 초록을 보라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가

 

그날 지리산에는 장대비같은 비가 하루종일 내렸다. 그날 새벽까지 진행된 피아골 산장의 술 덕분에 반 탈진 상태로 산행을 하다가 수십번 나가 자빠졌다. 그날 비만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큰일을 치를뻔 했다. 산신령님한테 호된 꾸지람을 받고 해질 무렵에서야 연하천산장에 도착했다.

 

다음낭 아침 비에 씻긴 초록을 보았다. 하늘은 죄많은 이 세상을 씻어주고 용서해 주고 있었다. 나는 비로서 하늘이 왜 하늘인지 알게되었다. 하지만 난 용서받아야 될 것이 너무 많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세월이 마음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 소낙비야 내마음의 먼지도 함께 씻어 주렴. 비에 씻긴 초록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내 마음도 그렇게 씻어다오.

하느님 제가 저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사랑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용서의 기쁨인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

 

(한돌, 1991년 지리산 여름)

 

3. 용서의 기쁨

 

 

4. 산삼의 나라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산삼을 심어보자 산삼을 심어보자
우리의 뿌리를 심어보자 흔들리지 않게
산삼은 다 캐 먹고 인삼이 남았구나
그나마 농약에 찌들은 인삼이 판을 치네
허우대는 멀쩡하지 희멀건 인삼이여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인걸 그대는 아는가
산삼을 심어 보자 산삼을 심어 보자
우리의 뿌리를 심어 보자 흔들리지 않게
사라지는 산삼이여 나약해진 내 겨레여
우리는 어디로 가고있나 우리는 누구인가
병든 내 나라여 신음하는 내 나라여
어디가 그렇게 아픈거냐 산삼이 없다더냐
산삼을 심어 보자 산삼을 심어 보자
우리의 뿌리를 심어 보자 흔들리지 않게
이 산 저 산 모두 산삼밭이 되는 날
허약해진 내 나라 내 겨레 되살아 나리라
백두산에 산신령님 지리산에 산신령님
이제는 하나가 돼야지요 통일을 해야지요
산삼을 심어 보자 산삼을 심어 보자
우리의 뿌리를 심어 보자 흔들리지 않게

 

우리는 참 이상하다. 인삼까지 미국것을 먹는 사람이 있다. 미국 인삼은 우리의 인삼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선 미국에는 산신령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것이라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농약에 찌든 중국 인삼이 우리시장에서 판을 치고 있는데도 우리는 나 몰라라한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이다. 산에 산삼이 많이 있어 우리는 그 산삼의 기를 받고 태어난 민족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피둥피둥 살만 찌고 정신적으로 너무 나약해져서 오죽하면 발딛고 사는 이 땅도 신음소리를 내겠는가. 누군가가 산삼을 다 캐먹었다는 얘기다. 산에 산삼이 다 빠져나가니 산이 허해질 것은 뻔한 일이고 산이 허해지니 내 나라 내 겨레도 허해질 수 밖에 없는것 아닌가. 지금도 즉지 않으리 우리는 산삼을 심어야 한다. 이 산 저 산 산삼을 심어 온 산이 산삼밭이 되면 우리 후손들은 마음 건강하게 이 나라를 지켜나갈 것이다.

 

산삼 씨앗을 산속에서 발아시킨 이 삼년생의 묘삼. 바로 그것을 산에 되심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가 산삼이 되는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산삼이 다시 생겨나고 내 나라 내 겨레도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산삼을 캘때도 목욕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데 산삼을 심으려는 마음 자세도 그리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백무산, 지리산의 산신령님 이제 그만 만나보시지요 때가 되었사옵니다.

 

(한돌, 1994년 백무산 봄)

 

4. 산삼의 나라

 

 

5. 고운동 달빛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마음의 옷을 벗고 달빛으로 몸 씻으니

설익은 외로움이 예쁜 꽃이 되는구나

해맑은 꽃내음을 한사발 마시고 나니

물젖은 눈가에 달빛이 내려앉는구나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사랑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아프게 사라지지만 산은 울지 않는다

외로운 구름아 어디로 떠나려는가

꽃과 새들의 눈물속에 산도 지쳐 돌아 눕는구나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지리산 지리산아 사랑하는 지리산아

지리산 지리산아 나의 사랑 지리산아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용철이는 말했다. "여기서(삼신봉에서)고운동 까지는 한 두어시간 걸릴테니 거기가서 국수로 점심을 때웁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물통에 남은 물까지 다 버리고 베낭 무게를 줄였다. 그길은 낙남정맥(김해 신어산에서 지리산 영신봉까지) 종주를 위한 훈련이기도 했지만 고운동 마을을 봐야 한다는 까닭도 있었다. 왜냐하면 양수댐 건설에 대한 환경단체의 반대 운동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큰일이 생겼다. 이 길은 길이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되돌아 가기엔 너무 깊숙히 들어왔다. 산죽에 엉켜 헤엄을 치다가 진이 다 빠져버렸다. 차라리 겨울산은 앞이라도 보이지만 이 산죽은 왜 이리 키가 큰지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곳은 한발작 움직이는데 이삼십분이 걸리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조난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용철아, 용철아" 부르다가 잠시 눈을 감았는데 어디서 물소리가 들렸다. 계곡이었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계곡에 닿자마자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셨다.

 

산장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저물고 어둠이 내려 앉았다. 정말 눈물나는 훈련이었다. 그날 밤 그 좋아하는 술도 못마시고 길게 뻗어버리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천국이 눈앞에 보였다. 아, 고운동!  아무말로도 이 풍경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 이런 천국을 물에 잠기게 하다니 그건 미친짓이다. 양수댐 만드는데 사천억원이 아니라 그 돈의 수백배가 들어도 이런 고운동같은 마을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은 양수댐 같은 것이 아니라잘 보존 된 산이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밝은 불빛아래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그림자도 못보고 산다. 슬픈 일이다. 휘엉청 밝은 달빛아래서 상큼한 그림자를 밟고 밤길을 가던 어린날이 생각난다. 나는 보름날을 택해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을 데리고 고운동으로 갔다.

 

"무섭니?"

"아니요"

"기분좋지?"

"네"

"미안하다. 진작보여주는 건데."

"괜찮아유 헤헤헤"

"어, 조심해라 그림자가 저 밑으로 떨어질라."

 

아이얼굴에 어느새 해맑은 꽃내음과 달빛이 내려 앉았다.

 

(한돌, 1993년 지리산 여름)

 

5. 고운동 달빛

 

 

6. 조율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담장밑에 해바라기 고운 꿈을 꾸고 있네
담장너머 세상을 본후 고개를 숙여 버렸네
꿈 줄이 풀어졌네 끊어지면 어떻하나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

 

정다웠던 시냇물이 검은 물로 흘러가네
어린날의 옛동산이 병들어 누워 있네
사랑 줄이 풀어졌네 끊어지면 어떻하나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

 

메마른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 본다
달이 가고 해가 가도 아무런 소식이 없네
믿음과 소망 줄이 풀어졌네 끊어지면 어떻하나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

 

담장너머 세상을 마을껏 바라볼 수 있는 해바라기의 두툼한 눈 웃음속에 하늘 빛이 소복히 쌓여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담장너머 세상 구경을 할 수 없는 채송화의 상큼한 눈웃음속에도 하늘빛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담장 밖의 세상이나 담장안의 세상이나 하늘빛이 너무 고와서 벌, 나비가 찾아와 서로 다른 사랑 타령을 해도모두들 별 탈 없이 잘 지냈었다.

 

향기하나 믿고 잘난척하는 장미가 나는 싫다. 몸에난 가시를 생각하면 더더욱 싫어진다. 힘있는 자들이 장미꽃을 꽂고 춤을 추고 있을 때 가난하나 우리 이웃들은 맑은 시냇물에 꿈과 사랑을 띄우며 버들피리 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맑았던 시냇물이 조금씩 조금씩 검게 물들어 가면서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노래마저 검게 물들어 사랑과 꿈이 뭔지도 모르게 되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다가와야 할 아침 햇살이 이별로 스며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어둠으로 가득찬 마음속에서 우리네 인간들이 너무나도 못된짓을 했기 때문이다.

 

늘 그러하듯이 재일 먼저 해야 될 일은 악기를 조율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 여럿이 같이 연주를 하게 될 경우엔 서로 똑같이 조율을 해야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조율이 정확히  되었다 하더라도 서로의 소리를 앞세우다 보면 전체적인 음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무심코 바라 본 잿빛 하늘. 그 위대한 존재에게 미움이 앞선다.전화통화를 할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리고 편지를 보내 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부질 없는 짓이었다. 을씨년스럽던 어느 겨울 바닷가 차가운 모래 위에다 서투른 전보를 쳤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 빛 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하느님의 답변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의 마음이 조율되지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조율하란 말이야?"

 

강도, 강간, 최루가스 속의 아우성, 무너지는 산, 안타까운 생명, 생명들!

그렇구나! 이 세상을 조율 할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율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구나. 그 조율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우리네 인간들은 잘난 조율사로 남아 있을 뿐이구나.

 

(한돌, 1990년 설악산 겨울)

 

6. 조율

 

 

7. 껍데기 세상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사랑한다 말하지마라 무엇이 사랑이던가
사랑의 껍질 그 속에서 사랑이 울고 있네
꿈이었다 말하지마라 무엇이 꿈이었던가
꿈길에서 헤매이는 꿈들이 울고 있네
한줄기 햇살을 찾아 샘물 같은 노래를 찾아
유혹의 술 한잔을 뿌리치고 어둠 속을 달려왔지만
비겁하다 말하지마라 무엇이 비겁이던가
어둠의 껍질 그 속에서 햇살이 울고 있네

 

막다른 골목길에서 피멍들은 세월 속에서
몸부림치던 내 사랑마저 쓰레기가 되어 버렸네
더럽다고 비웃지마라 무엇이 더러움인가
사랑의 껍질 그 속에서 사랑이 울고 있네
어둠의 껍질 그 속에서 햇살이 울고 있네

 

양파는 너무 억을하다. 껍질로만 되어 있고 알멩이가 없다고 사람들이 비웃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파는 얼마나 솔직한가. 겉과 속이 똑같이 않은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은 착한 양파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만약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양파를 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한돌, 1992년 주륵산 겨울)

 

7. 껍데기 세상

 

 

8. 금강초롱 (작사:한돌 작곡:한돌 편곡:김명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금강산이건만
아무말 못하고 돌아섰네 산도 말이 없었네
구름바다에 배를 띄워 종을 울리고 싶다
구름이 제멋에 흩어지니 배는 못 띄우겠네

 

고개만 숙이고 살았는가 금강초롱아
이제는 뭐라고 말해야지 종을 울리려무나
금강산에도 설악산에도 종을 울리려무나
흩어진 구름아 모여 보자 큰배를 띄워 보세나

 

언젠가는 꼭 종을 울릴 것 같은 예감! 금강산과 틈틈히 연락을 취해 어느 날 몇시에 일제히 몸을 흔들어 종을 울릴 것 같은 그런 꽃! 바로 그 꽃이 우리나락 하나 되는 그날 그렇게 하리라. 그리고 온누리의 평화가 시작되는 그 첫날에 또한번 그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릴 것이다.

 

두고 보라. 온 세계가 우러러 볼 나라. 그 나라가 바ㅏ로 대한민국이 되리라!

 

(한돌, 1991년 설악산 여름)

 

8. 금강초롱

 

 

이산 저산으로 노래를 캐러 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강산이 두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100노래 정도 뿐이 캐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라고 본다. 하지만 노래 한뿌리 한뿌리 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노래옷과 녹음작업을 끝까지 함께 해 준 김명곤, 뒷노래를 책임져 준 노래를 찾는 사람들, 언제나 내마음을 지켜주는 하늘아이들과 김수호, 제발 안주 좀 먹고 술을 마시라던 목로주점의 이연실, 힘겨운 산행을 함께 해준 마산의 뫼벗 송용철. 생각해보면 할 수록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다.

 

산이 많이 망가졌다. 그래서 그럴까? 5년동안 12노래뿐이 캐지 못했다. 그 중 8노래를 다듬어 오늘 녹음을 마쳤다.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웬지 우울하기만 하다

 

한돌, 1994년 10월 23일

 

도와 주신 분들

 

배수연(드럼), 함춘호(기타), 김현규(베이스), 김명곤(건반, 북), 박영용(타악기), 김효국(하몬드올겐), 조유희(가야금, 장구), 박현원(피리), 하늘아이들(경수현, 김정섭, 김효정, 금재현, 이보경, 임요한, 김수호), 노래를 찾는 사람들(문진오, 김명식, 김은희ㅣ, 유연희, 이혜원, 박종홍), 김보성(노래를 찾는 사람들 우두머리), 정영아(뒷노래옷), 사운드비젼(김용년, 김호정), 청음녹음실 사람들, 나이세스 사람들 그리고 김정애

 

Credits 

 

레코딩 엔지니어 :  최병철

뒷노래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찰칵그림 : 김정명, 이한구
겉꾸밈 : 애드프래너
만든날 : 1994년 11월 그믐

 

 

한국적 정서의 멜로디로 음지를 덥혀준 '작은 돌'

최규성(가요칼럼니스트)

 

고집스럽게 한글 사랑을 실천해 온 포크 아티스트 한돌. 전국을 돌며 숨은 노래를 캐 온 그는 조동진과 함께 1980~90년대 언더 가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여울목’, ‘조율’, ‘유리벽’, ‘불씨’, ‘못 생긴 얼굴’, ‘터’, ‘개똥 벌레’, ‘홀로 아리랑’ 등은 당시 한국적 향내를 진동하며 유행했던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이다. 국토 사랑을 노래하고, 공장 노동자, 시장 상인, 판자촌 철거민 등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어의 마술사처럼 담아 낸 그의 아름다운 노래들은 혼란스럽던 대중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본명은 이흥건. 하지만 고교 졸업 후 여러 음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포크 음악에만 전념하려는 의지로 본명을 버렸다. 한돌은 ‘작은 돌의 역할이라도 하자’는 뜻을 지닌 순수 우리말 이름이다.

 

한돌은 약품 도매업을 했던 부친 이원수 씨와 모친 박정숙 씨의 6남 2녀 중 다섯째로 경남 거제도에서 1953년 1월 30일에 태어났다. 1ㆍ4 후퇴 때 두 명의 형과 누나를 함경남도 영흥에 두고 월남해 남쪽에서 얻은 다섯 형제 중 둘째였다. 늘 북에 두고 온 자식에 미안함이 컸던 부친은 “통일이 되면 북에 두고 온 형을 만나, 잠시 헤어진다는 생각이었지 버린 것이 아니라고 전해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의 가족은 강원도 춘천에 주저 앉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춘천 중앙초등학교 3학년 때 강원도 스케이트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는 것. 전국체전에 출전해 8명이 진출한 결선에서 경기내내 1등으로 내달리다 골인 지점을 앞두고 넘어졌다. 분한 마음에 눈물을 쏟는 그에게 선생님은 “끝까지 달려라”고 소리쳤다. 꼴찌로 경기를 마친 그에게 선생님은 오히려 “잘했다. 너는 8등을 했다. 기권을 했다면 꼴지도 될 수 없는 것”이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는 이 때의 교훈을 인생의 지표로 삼았고 명곡 ‘꼴지를 위하여’를 탄생시켰다.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 곡 때문에 수 많은 학부모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 교육이 남달랐다. 좋은 교육 환경을 위해 한돌과 그의 형을 서울로 전학 시켰다. 서울로 전학을 가는 그를 위해 반 친구들이 음악시간에 동요 ‘나뭇잎 배’를 합창으로 불러 주었다. 음악과 인연이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던 그가 처음으로 노래에 감동을 받은 순간이었다.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후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를 하던 어느날, 마취 주사를 맞고 멍한 상태가 된 것 처럼 펜을 놓고 말았다. 팝송 ‘The End Of The World'의 감미로운 멜로디 때문이었다. 당시 세상이 네모인줄 알았던 순진 무구한 학생이었던 그는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를 듣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입시에 몰두했던 그는 덕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경복중에 합격한 후 바비 빈튼의‘ Mr. Lonely' 등 팝송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고향 누나가 DJ로 일하는 이대 앞 박토리아 다방을 찾아가 판을 닦으며 노래에 빠져 들었다. 영화 감독을 꿈꿀 만큼 영화광이었던 그는 중2 때 또 한 번 음악적 충격을 경험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동네 전파상에서 흘러나왔던 노래가 그를 미치게 했던 것. 전파상 아저씨도 제목을 몰랐던 그 노래가 다시 듣고 싶어 그날 이 후 매일같이 모든 라디오 음악프로와 씨름을 했다. 다시 듣게 되어 뛸 듯이 기뻤던 그 노래는 피터, 폴 & 메리의 ‘500 Miles'. 이 때부터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고 점심을 굶어 가며 용돈을 모아 2,000원짜리 합판 기타를 장만했다.

 

학교예술제 출전을 위해 살롱의 기타리스트였던 친구 아버님에게 속성으로 한달간 기타를 배웠다. 하지만 예술제에서 미역국을 먹자 실망이 컸던 한돌은 그 때부터 공부는 뒷전에 두고 기타에 몰입했다.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아들이 낙제를 하자 실망이 대단해 기타를 부쉈다. 어렵게 경복고에 진학했지만 대학 진학보다는 음악을 택했다.

 

정식은 아니었지만 화성학 공부을 하며 창작의 물꼬를 튼 것은 고 2때. 12절의 긴 노래 ‘눈’은 첫 창작 곡이었다. 후에 이 노래는 6절로 줄여 취입을 했다. 이 시절 ‘빛을 잃은 별’ 등 곡 하나를 만들면 자아 도취에 빠졌던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제법 노래 잘하는 친구로 소문이 난 그는 71년 김진성 PD에 이끌려 박인희가 진행하던 CBS라디오의 ‘세븐틴’에 출연을 했다.

 

당시 부친이 부도를 당해 가세가 기울면서 무허가 건물에서 냉면집을 열었고 성남에서 조그만 약방을 운영했다. 고교 졸업 후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그에겐 황금 시절이었다. 노래 작업?위해 사방으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 “그 때 내 친구는 햇살, 바람, 비 그리고 술 등 넷이었다. 신기하게도 자연과 소통이 되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환경이 척박했던 광주 대단지의 구석 구석을 돌아 보면서 노래를 지었다. 바로 1980년대에 운동 가요로 사랑 받았던 ‘못생긴 얼굴’. 이 시절 집을 나와 경기도 부천에서 월세 5,000원짜리 초가집에 기거했던 그는 웃지 못 할 사건에 휘말렸다.

 

반공 정신이 투철했던 당시 마을 주민의 신고로 간첩으로 몰렸던 것.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기타가 살림의 전부이고 더욱이 집을 수리할 돈이 없어 방안에 텐트를 치고 살았기에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는 “완전 무장한 예비군들이 몰려와 집을 에워싸 포승 줄에 묶더니 잡아 갔다”고 웃는다. 이후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성남 약방을 지키게 되면서 그의 자유롭던 시대는 끝났다.


▲ 한돌 1집 '한돌 새노래'

 

자연 속에서 노래를 캐며 이땅의 상처를 보듬다

성남의 아버지 약방에 잡혀온 그는 무려 8년을 머물렀다. 당시 그의 동네엔 수많은 영세 공장들이 난립해 있었다. 어느날 야학에 다녔던 한 단골 여공이 야학선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울해진 사연을 들었다. 그는‘짝사랑도 아니고 서로 좋아했지만 남자가 장가를 가버려 벌어진 이런 사랑은 무슨 사랑일까’를 생각하다‘외사랑’을 떠올렸다.

 

사전에도 없는 제목 때문에 노래가 발표되자 한글 협회로부터 문의전화를 받을 만큼 독특한 표현이었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70년대 후반이 되서야 가능했다. DJ친목회 총무 서희덕의 권유로 명동 카톨릭회관 여학생회관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노래동아리‘참새를 태운 잠수함’무대에 다섯 차례 올랐다.

 

그래서 1979년에야 데뷔음반 녹음에 들어가 일반판매에 앞서 홍보용으로 200장을 이듬해에 발표했다. 당시 MBC는 음반을 낸 신인 가수들의 오디션을 보았다.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닌 진정성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한돌은 3번의 오디션에 모두 미역국을 먹었다. 그래서 가창력 부족이란 이유로 음반이 방송 금지가 되면서 사장되어 버렸다. 그의 공식적인 음악활동은 시작부터 삐그덕 거렸다.

 

80년대 초 어느날,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선배가수 김민기의 추수를 돕기 위해 내려갔다. 선배 어머니의 부탁으로 시장에 나가 고추시세를 알아보다 지게에 가득 담은 가지더미가 단돈 천원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막걸리 한잔 먹기도 부끄러웠다. 밭에 피어난 보라색 가지꽃을 몇일 간 쳐다보다 노래‘가지꽃’을 캤다. 이후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문승현이 한돌의 노래로 아현동 애오개 소극장에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노래 극‘가지꽃 공연’을 열었다. 많은 노동자들로 만석을 이룬 공연을 보러 서울로 올라온 한돌은 숫기가 없어 자신을 밝히지 못해 결국 입장을 못한 웃지못할 사연을 지니고 있다.

 

대성음반의 문예부장이 된 서희덕은 84년 4월 기획사 뮤직디자인을 설립해 신형원의 독집을 발매했다. 이 음반은 한돌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던 신호탄. 단국대 출신 신형원이 부른 한돌곡‘불씨’와 ‘유리벽’은 다운타운의 음악다방은 물론 각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청곡 1위로 등극할 만큼 뜨거운 반응을 몰고 왔다. 20만장이 넘게 앨범은 팔렸건만 가수 신형원은 TV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아‘얼굴 없는 유령가수’로 신비감을 더해갔다. 87년엔‘개똥벌레’와 ‘터’등 발표하는 곡 마다 연 타석 히트를 터트렸다. 하지만 음반에 수록된 노래가 부끄러워진 한돌은 자신이 관련된 모든 음반을 없애버리기 시작했다.

 

88년 8월 남산 숭의음악당. 한영애, 소울두울, 노찾사가 게스트로 참여해 첫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성음을 통해 그의 고유 로고인‘타래밭’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89년에 발표한‘홀로 아리랑’. 이 노래는 남과 북의 배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되는 곳이 독도라는 생각에 통일을 그렸던 서사시였다. 90년, 서유석도 이 노래로 10년만에 재기음반을 발표했다.

 


▲ 한돌 2집 '한돌 타래모음 2'

 

이후‘꼴지를 위하여’등을 수록한 독집과 청담초등학생들과 11곡을 담은 동요집‘하늘 아이들1’과‘몽실이와 하늘아이들’를 발표했다.“동요음반은 꿈의 시작이었다. 당시 노래를 잘하는 아이들보다 조금씩 음정이 틀리는 평범한 아이들을 모아 음반을 만들었다.”91년 3월 대학로 학전극장의 개관 공연을 연 그는 양희은의 동생 양희경의 독집에 이어 92년 9월엔 어린이 노래 이야기집‘이 땅에 사는 하늘 아이들-숨결刊’을 발간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94년엔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이연실이 동참한 타래모음 3집‘내 나라는 공사 중’을 발표했다. 자연을 파헤치는 공사가 전국 방방곳곳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현실을 비판한 앨범이었다. 수록 곡‘고운동 달빛’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지리산 양수댐 공사로 수몰을 앞둔 고운동의 소식을 접한 그는 지도를 보며 찾아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고운동 마을은 천국이었다. 이때의 느낌을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자 환경 문제화되자 진주 MBC는 타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을 했다. 또한 현대케이블TV는 전국을 돌며 노래작업을 벌어온 한돌을 95년 3월 1시간 다큐멘터리로 소개했다.

 

이후 활동이 뜸해져 갔다.“노래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에겐 약초처럼 캐는 것이 되었다. 헌데 오래 전부터 노래가 아퍼 온 것 같다. 내 게으름 때문에 노래캐기가 황폐화되고 메말라 갔다”1999년 동요‘나뭇잎 배’에 대한 느낌을 쓴 그의 글이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 국정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 해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23일간 700KM 도보여행에 나섰던 그는 12월에는 백두산을 찾았다.

 

이때 추락사고를 당했다.“벼랑 아래로 10m쯤 떨어져 살기위해 기어오르는데 노래가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노래케기에 게으름을 피운 나에게 경계심을 주고 떠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노래들은 노래도 아니란 생각에 작업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작년 3월 지리산 천황봉 등반때 하얗게 피어난 봄 눈을 보고 다시 희망을 얻었다.”8월 경 통일을 주제로 공연을 준비중인 그는 음악적 뿌리인 동요음반과 백두대간을 새롭게 풀어낸 새 노래‘한뫼줄기’등으로 신보제작을 염두에 두고있다. 또한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을 다녀온 경험을 노래이야기로 풀어 출간도 준비중이다. 10여년의 긴 동면에서 깨어나기 위해 한돌은 지금 조용하게 봄 기지개를 켜고 있다.

 

◇ 노래를 캐기 위해 산을 찾는 한돌 씨는 보통 산에 가면 서른 번에 한 번 정도 좋은 노래를 만들 기회가 온다고 말한다. 1997년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사진 | 이한구 기자

 

아리랑 캐러 다니는'심마니'한돌


월간 MOUNTAIN 2003.02 


돌은 요샛말로 소개하자면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다.
하지만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말에 대한 고집스런 사랑 때문이고 더 큰 이유는 자기 스스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삼을 캐기 위해 정갈한 마음으로 산을 오르는 심마니, 그 역시 산신령이 점지해 준 튼실한 노래를 캐기 위해 산으로 든다. 그의 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강원도 춘천시 봉의산 자락에서 자란 돌(50세). 그곳은 산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산이란 단어를 모를 때’부터 그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친구들에게 ‘놀러 가자’ 하고서 떠나보면 발길 닿는 곳이 항상 ‘산’이었다.

 

중학교 때 용돈 2천 원을 주고 산 기타를 손에 쥐고부터 ‘판사가 아니면 딴따라가 된다’던 점쟁이 말 그대로 그의 노래인생이 시작되었다. 8남매 가운데 다섯째인 그를 판사 아들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은 노래를 좇는 자식의 꿈과 부딪혀 애꿎은 기타를 세 대나 부수어 버렸다.

 

“그때 부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셨다면 그냥 제 풀에 지쳐 주저앉아버렸을지도 모르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본격적으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노래를 만들기 위해 산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산에 가면 작업이 잘 되었어요. 한참 뒤에야 그걸 깨달았어요. 그걸 알았을 땐 이미 산 아래에선 아무 것도 안 될 때였죠.”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흘렀네…’로 시작하는 노래 <터>를 만들 때도 답답하게 콱 막혀있던 노래의 실마리가 산에서 풀렸다.

 

1977년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숨이 찬 가운데 방명록에 ‘나는 기쁘다…’ 쓰는 순간 갑자기 머리 속으로 섬광처럼 노래가 달려든 것이다. ‘설악산을 휘휘 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하고 막혀 있던 구절이 술술 터져 나오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그 길로 산길을 뛰어내려오다 굴러 어깨를 다치기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잘나서 그런 노래를 만든 줄 알았어요.”

 

‘용서의 기쁨’을 배운 지리산

 

돌은 지리산에서만 세 번이나 저체온증으로 사경을 헤맨 경험이 있다. 그리고 지리산에만 가면 비를 만나는 악연이 있다. 그러나 그 악연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9년 여름날 피아골 산장에서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시고 출발했다가 산행도중 탈진해 사경을 헤맨 경험이 있다. 그때 만난 장대비가 그의 목숨을 살렸다.“그냥 쓰러진 채로 입을 벌려 쏟아지는 빗물을 그대로 받아 마셨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비가 그친 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눈부신 초록의 세상에 놀랐다. 그리고는 자기가 마신 빗물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산에 버릇없이 술 처먹고 올라와 죽을 뻔한 걸 살려준 것은 누군가 나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어요. 나는 이제껏 살면서 한번도 누구를 용서해 준 적이 없는데 하늘은 이렇게 한번에 나를 용서를 해주는구나….”

 

80년대 신형원이라는 가수를 통해 암울한 세상을 향해 토해낸 노래 ‘불씨’와 ‘유리벽’ 그리고 이후 ‘개똥벌레’가 어린아이들까지 즐겨 부르는 온 국민의 노래가 될 때까지도 그는 가족들에게 돌이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왔다.

 

‘개똥벌레’ 노래 때문에 가요대상 시상식장에서 엉겁결에 방송 출연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들통 나버린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들끼리 맺은 토종 중매로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시집왔던 그의 부인 역시 돌이 아닌 이흥건이라는 평범한 남자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노래 때문에 고집부리고, 사람들에게 너그럽지 못했던 일들, 자기자신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던 지난날… 죽음의 문턱에서 깨어나 비로소 사랑의 기쁨보다는 용서의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진한 눈물을 쏟아낸 것이다. 그렇게 만든 노래가 ‘용서의 기쁨(돌타래모음3집 / 나이세스)’이다.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가시밭길을 가는 사람아

내 어찌 그대의 추운 마음을 안아주지 못했는가
우 우 소낙비야 날 용서해다오 내 마음속에 먼지를 모두 씻어다오 비에 씻긴 저 산을 초록을 보라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가”

 

이 노래를 찬송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없다. 그렇지만 믿음은 있다. 굳이 그 신앙의 대상을 따지자면 산신령이다.

 

“그때부터는 어느 산에 가도 다 산에는 다 대장이 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제가 만드는 노래들은 모두 다 산신령이 준거예요. 이 놈이 좀 착해졌다 싶으면 그때 노래 하나씩 던져 주는 거지요.”

 

결국 ‘용서의 기쁨’이란 노래는 젊은 날 긴긴 방황과 오만에 대한 참회의 노래요, 산신에게 귀의하는 절절한 기도인 셈이다.

 

그때부터는 우연이 아니라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산에 들 수밖에 없었다. 산을 오른다 하지 않고 굳이 ‘산에 든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산 정상이나 다른 특정한 목적지를 정하고 산행을 계획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걷거나 며칠 또는 몇 달 동안 산에 머물러 지내는 생활이 등산보다는 ‘입산’의 의미와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번에 가서는 꼭 이런 노래 하나 만들어야지’ 하고 작정하지도 않는다. 그런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음을 비우고 산에 든다.

 

“보통 산에 가면 서른 번에 한 번 정도 겨우 기회가 오는 것 같아요. 심마니가 목욕재개하고 산에 오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아무리 산신령이 노래를 던져주어도 내가 알아듣지를 못하거든요.”

 

기다리다보면 너무 늦어버리는 아쉬움

 

이렇듯 목적의식적으로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노래는 오랜 기다림 끝에야 만날 수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삶의 궤적을 따라 인생의 성적표를 기다리듯 노래를 기다리는 사람. 그래서 ‘내 나라는 공사중’이란 부제가 붙은 <돌타래모음3집> 음반 이후 벌써 8년의 세월이 흘렀다. 특히 이 음반에 담긴 ‘고운동 달빛’이란 노래는 이런 기다림의 방식에 대해 그 스스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고운동 달빛’은 지리산 양수발전소 건설로 수몰되는 고운동 계곡을 사랑하는 사람의 흐느낌이다. 고운동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에 있는 계곡으로 낙남정맥이 지리산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지리산을 떠돌다가 이곳에 머문 고운(孤雲) 최치운의 호를 따서 이름 부쳐진 이 아름다운 계곡이 댐 건설로 파헤쳐진 것이다.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사람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아프게 사라지지만 산은 울지 않는다. 외로운 구름아 어디로 떠나려는가, 꽃과 새들의 눈물 속에 산도 지쳐 돌아눕는구나. 지리산 지리산아 사랑하는 지리산…”

 

“제 노래가 나왔을 땐 이미 고운동은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어요. 이 노래를 2년만 빨리 발표해서 사람들한테 널리 알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어요.”

 

그는 언젠가 고운동에서 살았던 사람을 만난 일이 있어 ‘고운동 계곡이 참 좋지요?’ 하고 물었더니, ‘고운동에 개고기 안 파는데…’ 하는 어이없는 대답을 들었을 정도로 이제는 그 계곡을 기억조차 못하더라고 안타까워했다.

 

고운동 계곡을 집어삼킨 산청양수발전소는 지난 2002년 7월 11일 이미 가동을 시작했다.

 

이날 준공식장에서는 지리산생명연대 등의 환경단체들이 침묵시위가 있었고, 이들은 댐 건설 자체를 막아내지 못한 현실을 통탄하며 지속적인 생태계 영향평가를 통해 지리산 생태계에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킨다면 양수댐 철거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결의하기도 했다. 고운동은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또 다른 이름의 고운동 계곡들을 위해 계속 노래할 것이다.

 

◇ 산 따라 흘러가는 돌의 노래찾기는 자연스럽게 그 발길이 강으로 가닿는다. 1998년 섬진강변에서. 사진 | 이한구 기자


이제는 통일의 아리랑 캔다

 

그는 1994년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의 물길을 따라 노래를 캐러 다녔다. 그 사이 중국 쪽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다섯 번이나 드나들었다. 이제 지난 8년 동안 캔 심마니의 새 노래를 비단 보자기에 담기 위해 흙을 털고 뿌리를 손질하며 정성껏 매무새를 단장하고 있다. 새로 준비하는 앨범은 잃어버린 우리의 옛 정서를 찾는 작업이라고 한다. 바로 아리랑이다.

 

“타임머신이 별 게 아니에요. 그곳에 가면 내 오랜 과거가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거기서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어서도 남과 북이 모두 거리낌없이 부를 수 있는 노래, 새로운 아리랑을 캐고 싶었어요.”

 

그가 말하는 아리랑이란 ‘어린 시절 산에서 놀다 해가 저물어 길을 잃었을 때, 멀리 마을에서 밥 때를 알리는 연기가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라 길 안내를 하는 것, 어머니가 풍기는 밥 냄새의 정겨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또 갓난아기가 세상을 향해 ‘앙앙’거리며 터뜨린 울음소리처럼 반갑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리랑의 실체에 다가가는 동안에도 세상은 한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변해갔다. 그가 아리랑을 캐러 압록강변을 드나드는 사이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간 곳처럼 고요하기만 하던 그곳도 변해버린 것이다. ‘머리 깎는 곳’ ‘이빨 빼는 곳’이란 정겨운 이름의 간판들이 어느새 ○○미장원, ○○치과 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키워낸 산자락들 역시 머지않아 또 다른 ‘고운동’이 되지 않을까 가슴 졸이고 있다. 부디 그의 새 노래가 더 늦기 전에 사람들 속 깊숙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더라도 결코 급행열차를 탈 사람이 아니다. 더디 가더라도 덜컹거리는 완행열차 차창에 기대 세상 구석구석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볼 것이고 한번 간 길이라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가고 또 갈 것이다. 그는 이런 자기 인생의 화두를 ‘느림과 되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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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영숙 | 작성시간 09.02.05 유리벽, 개똥벌레, 터, 조율... 좋은 곡이 많지요. 좋은 노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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