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둔 시대에,
레오 롱가지네라는 아탈리아인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1905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이 남자를 저널리스트라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에는 저항감이 느껴진다.풍자작가이자 만화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 표지를 그려 10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또 스물두 살에 창간한
((이탈리아인))을 비롯해 세 주간지의 편집장을 지냈고, 주간지라는 형식을
이탈리아에 정착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자신의 성을 딴 출판사도 창설했다
그는 파시즘이 천하를 구가하던 시대에는 반파시스트로 적시되었고
전쟁이 끝나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보수반동으로 비난받았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롱가지네가 남긴 일기 가운데 몇 가지를 발췌한 것이다
파시즘 시대에는 급진적이란 말을 듣고,
민주주의 시대에는 파시스트로 취급당한 글이 주는
즐거움을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으면 해서 옮겨본다
1938년12월15일
팡파르. 깃발의 물결.
끝없는 행진. 한 사람의 바보는 한 바보
두 사람의 바보는 두 바보. 만 사람의 바보는 역사적인 힘이다
1940년5월20일
연합군은 브루셀 서쪽으로 퇴각했다.
가멜랑 장군은 프랑스군에게 이런 훈시를 늘어 놓았다
(우리 모두의 희망은 이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여러분은
우리 민족정신의 근본인 군의 투혼으로 가득찬 젊은 가슴으로 우리 국가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
어느 이탈리아 장군의 훈시를 듣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는 클레망소와 함께 죽었다.
숨겨본들 헛일이 아닌가.
1940년5월27일
모든 혁명은 거리에서 시작하여 식탁에서 끝난다
1941년1월10일
영국인은 이 전쟁에서 이기리라.
그들은 전쟁 이외에는 무엇이든 해내기 때문이다.
독인인은 이 전쟁에서 지리라.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전쟁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1년2월1일
A를 신뢰하지 말게.
첩자라고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네 하고 모라비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10년 이상이나 매일 얼굴을 맞대온 사이 아닌가)
그까짓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우리를 밀고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그는 그때까지 헛되이 보낸 날들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들 걸세
1941년8월1일
집으로 돌아왔다.자정이었다.
라디오를 켜자 모스크바 방송이 들려왔다.
러시아인도 거짓말을 잘한다.
전황 방송은 언제나 이렇게 끝났다.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
더구나 무조건 단결하라니 어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 한마디가 얼마나 잘된 슬로건인지는 충분히 인정하겠다
1941년8월 29일
A가 들려준 에피소드다.
얼마 전 학기말 시험 기간 중에 문교부에서 파안차 마을로 교육관이
시찰을 나왔다. 교육관은 마침 A의 여동생이 담임을 맡고 있는 학급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한 학생을 지명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을 감아보아라)
한참 있다가 또 물었다
(무었이 보이나)
그 학생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짜증이 난 교육관은 여교사를 보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니. 무솔리니 총통님이 보여야 할 것 아니오!)
1941년10월1일
밀라노 바르지니 댁을 방문.
부인이 말했다
전 C만을 믿어요.
정말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죠
나이가 좀 많지 않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부인은 우아한 사교성을 보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분은 대단한 분이예요.
여든인데도 매일 아침 승마를 하신답니다.
1941년11월6일
무솔리니의 리토리아 방문
기사를 싣는 데 대해 각 신문사로 정부 시달이 왔다
모든 관련기사에 반드시 다음 한 구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총통 각하께서는 현관 계단을 젊음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활기차게 오르셨다)
1942년7월12일
독일 친구가 말해준 것이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히틀러가 롬멜 장군을 불러 동맹군인 이탈리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군인 한 사람 한 사람 대해서라면 사자입니다
장교는 어떤가 하면 소시지 정도 될까요.
참모본부는 퇴비더미랍니다
1942년9월13일
극장에 가다.
데 필리포 형제의 연기를 보다.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배우들이다.
그들은 진실을 너무나도 잘 연기해서
우리가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할 정도다.
연합군 상륙. 이탈리아 북상 중, 이탈리아, 연합군과 단독 강화.
나폴리까지는 해방. 그 밖에는 전부 독일 점령 아래.
롱가네지는 파시스트에 쫓겨 나폴리로 몸을 숨겼다
1944년1월8일
모든 신문 지상에 다음 기사가 실렸다
아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3세,
스탈린 원수에게 훈장을 보내다.
이것으로 임금과 코뮤니스트가 사촌간이 되었다.
1944년1월14일
미제 통조림 고기는 기쁘게 먹겠다.
그러나 거기에 따라온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접시에 남기기로 했다.
1944년2월8일
우리 국내 망명자들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 급사에게
50쯤 되는 한 미국인 소령이 여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건은 젊은 여자가 아니라 서른살 정도가 좋겠고 조용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결혼 경험이 있을 것, 더욱이 미망인이라면 그 보다 나을 게 없겠다고 했다.
이 미국인 소령에 의하면 이런 조건을 달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50대의 이 미국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가정의 평화,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빈센초라는 급사는 물론 이런 고객의 희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며칠 후 적당한 여자를 찾아냈다.세련되고 홀쭉한 미인으로 성실하고
품위있고,더구나 미망인이었다.그 소령은 이 미망인 의 집에 거의 매일처럼
갖은 선물을 들고 방문했다.그러나 미망인은 1주일에 한 번은 소령과 함께
남편 묘소를 찾는 것을 잊지 않았다.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싼 젊은 미망인은
죽은 남푠 묘소 앞에 꿇어앉아 꽃을 바치며 조용하게 훌쩍이는 것이었다
미국인 소령은 그 옆에서 겸허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같이 기도했다
빈센초는 우리에게만 살짝 말해주었다
사실 저 여자는 미망인이 아니랍니다.
그 무덤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지요
그렇지만 누가 뭐라겠소.
아무튼 우선 살고 봐야죠.
1944년 로마도 해방되었다
1944년8월7일
천하고 부정직한 파스스트 당 수뇌들은
파시즘 붕괴를 기다리며 청춘을 소비했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이란 복수심에 불타는 노교수의 모럴리즘이다.
그런데 파시즘이 붕괴한 지금,그들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것도 함께 붕괴되었다
파시스트 당이 이들 지친 반파시스트들이 행해온 무해한 반파시즘 운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당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1944년8월11일
신생 이탈리아 문인들은 일제히 좌파를 선언했다.
마치 우파보다 훨씬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라는 듯이
1944년8월13일
생선 요리를 나이프를 써서 먹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스스로를
좌파라고 여기고 있다(생선 요리의 식사에는 나이프를 쓰지 않음)
1944년8월9일
당신은 민주주의자입니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장래에는 그렇게 될 것 같습니까? (가능하면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왜요? (파시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재정권 아래라야 겨우 민주주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1944년10월9일
무슨 사상이나 주의주장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다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이들 사상이나 주의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ㅡ 시오노 나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