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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신앙고백
(갈 2: 19-20)
신약 성경에는 많은 신앙의 고백들이 나옵니다.
마 16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49절에 보면 나다나엘의 고백이 나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도마의 고백이 나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첫 출발의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여기에만 머물러서 있으면 안 됩니다.
신앙고백은 그 사람의 신앙 척도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성숙한 신앙의 고백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 나도 바울처럼 이런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 바울의 신앙고백을 이제는 제가 해야 할 고백이요, 여러분이 해야 할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을 한지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
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만 하고 있다면 어찌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문법적으로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박혀왔고, 또한 지금도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 믿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던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신 안에 더 이상 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교부신학자 마카리우스를 찾아와,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그 교부신학자가,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굉장히 미운 사람이 있었지요? 그중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무덤에 가서 하루 종일 욕을 하고 돌아오시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무엇
인지 알려 드리리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던 사람의 무덤에 가서 하루 종일 욕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교부학자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평소에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면 그 무덤에서 하루 종일 사랑한다고 칭찬
하고 애정 어린 말을 하고 돌아오시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사람이 교부학자의 말대로 하고 돌아와
“미운 사람 죽은 무덤에 가서 욕하고 돌아 왔고, 사랑하는 사람 무덤에 가서 정말 사랑한다
고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돌아 왔으니,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교부학자는,
“미운 사람의 무덤에서 욕을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사랑
한다고 그렇게 좋은 말을 할 때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라고 대답을 하자,
교부학자는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심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높은 자리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심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낮은 자리에 겸손히 누워있습니다.
바울도 옛사람 때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적인 조건이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 이하에 보면 그의 세상적인 조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이 모든 육적인 조건을 십자가에 못 박
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조건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내 지식도 내 욕심도 내 아집도 내 교만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인간은 욕심덩어리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가져도 또 가져도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도무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나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교회도 불행합니다.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 합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지 않고는 살 수도 없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간 애굽의 왕궁에서 모든 학문을 다 배웠습니다.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 인격, 리더십 등 모든 것을 다 배웠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어서 자기 백성을 구한다는 것이 그만 살인죄를 짓고 맙니다.
그것 때문에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간 자기를 죽였습니다.
자기 지식을 죽였습니다. 자기 생각을 죽였습니다. 자기 경험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모두 다 죽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사용하십니다.
19절을 보면,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에 죽은 사람은 내 생각과 내 판단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것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 생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생각하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죽었습니다.
나의 지식도, 나의 경험도, 나의 세상의 자랑도, 나의 욕심도, 나의 교만도 죽었습니다.
옛 사람을,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얼마나 성숙한 고백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 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주님이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 안에는 주님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 대신에 주님이 산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 안에 주님이 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매 순간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한 순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없습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을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책상에 이런 글이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이 글을 보고 사모님이 너무 좋아 했습니다.
아 내 남편은 앉으나 서나 내 생각을 하는 구나! 행복해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노래가 있지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
르는 당신 모습 피할 수 없는 내 마음”
그러나 다음 주일 날 주보에 있는 설교 제목을 보고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설교 제목이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 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을 하는 것이 내 마음에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내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산다는 두 번째는 의미는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죽었기 때문에 주인이 바꾸어진 것입니다.
죄악 때문에 지옥에 갈 불쌍한 인생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내 안에 주님이 산다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살려면 우리의 인생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새 주인으로 임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다스리시고 주장하시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 고백이며 얼마나 성숙한 고백입니까?
나의 옛 자아를, 나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십니다.
나는 주님만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나는 주님이 원하신 대로 삽니다!
이 성숙한 고백이 이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니다.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바울은‘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갑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바울은 산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신 아들을 믿는 믿
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고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가서 얼마나 많은 수모와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손바닥으로 뺨을 때립니다.
군병들이 채찍으로 예수님을 무자비하게 내리칩니다.
예수님을 내리친 채찍은 그냥 채찍이 아닙니다. 채찍에 날카로운 뼛조각을 매단 채찍입니다.
그래서 채찍을 내리칠 때마다 뼈 조각이 살 속에 박힙니다.
그리고 채찍을 들어 올릴 때 살과 피가 허공을 뛰어 오릅니다.
예수님 살은 뼈가 보일 정도로 살점들이 패입니다.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됩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으로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십니다.
너무 힘들어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그렇게 해서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짊어지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고통은 바로 나를 사랑해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이었습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엄청난 수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있었기에 내가 구원받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랑하시어 그 엄청난 수난을 당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믿음 안에 살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믿었기에, 바울은 자신 때문에 엄청난 수난을 당하신 것을 믿었기에,
주님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로지 주님만 사모했습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 어떤 수난도 고난도 환난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의 인생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최후를 아시죠.
바울의 최후는 로마 외곽에 있는 지하 어두컴컴한 감옥에 있다가 최후를 맞습니다.
바울의 최후는 너무 쓸쓸했습니다.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늙어서 추위가 뼈 속까지 깊이 스며들어오는데 입을 옷 하나 변변한 게 없었습니다.
지금도 바울의 순교 현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낮은 원형기둥이 있는데 거기에 목을 집어넣고 칼에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생명을 기꺼이 바칩니다.
주님이 자신을 사랑해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귀한 생명을 바치셨을 알았기에 바울도 자기 목
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십니다.
이제는 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며 성숙한 신앙고백입니까?
우리가 이제 해야 할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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