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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주 도마 분처상

작성자紫霞洞人|작성시간17.05.07|조회수83 목록 댓글 1

 

유우식 한국암각서화연구소장
역사학회 회원


Ⅴ. ‘분처바위’의 사료적 가치

1. 고대기독교 신앙 성립배경의 입증자료이다.
1) 동방박사들의 별 관측도 및 경배행도 조각
① 동방에서의 별 관측그림 조각
‘처용바위’의 중간부분(‘분처상’의 목 상부)에 보이는 별 관측그림 조각과

아기 예수 전신상 조각이다.

‘분처상(分處像)’은 ‘분처(分處)’ 즉 사도 도마가 이 유적지역에 와서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로서 복음을 전한 사실을 묘사한 석상이다.

 

그러므로 별 관측그림은 동방박사들의 고국이 이 유적지인 동방국 서나벌(‘徐那伐’)이며,『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54년 “이월기유(二月己酉) 성패우하고(星于河鼓)”와 직결된다고 본다.

② ‘분처상’의 오른편 어깨(右肩) 상부의 경배행도 조각
이 조각은 동방박사들이 예수 탄생을 예시한 별을 관찰하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찾아가서 헤롯왕을 만난 후 베들레헴으로 갈 때에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을 보고 기뻐하는 그림으로 재해석한다.

2) 동방박사들의 경배도 조각
‘처용바위’ 동측부분 상부에 뚱뚱한 여인(‘마리아’로 해석)이 아기를 안고 있는 앞에서 남자로 보이는 사람들(3인으로 보임)이 몸을 구부려 예를 표하는

동작을 나타낸 조각이다. 이 조각은 필자의 장남(유형석:당시 총신대학 합격생이며, 현재 목사)이 1988년 탁본을 했으나 그 당시에는 내용을 파악치 못한 부분이다.

 

 

 


이 조각은『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54년조 및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기록과 연관된 조각으로 보며,

기독교 성립과정의 일부분과 초기 기독교가

동방국 서나벌 (낮뻘나라)의 주인공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민족이 “노객(奴客)”임을 밝혀주는 자료로 본다.

3) 예수 공생애이전의 서나벌(신라) 방문 추정자료


 동방박사들의 경배행로는 공생애 이전 예수의 답례행로가 된다.

그리하여 필자는 공생애 이전 예수의 서나벌 방문의 근거를

 

 『삼국사기』 설총전의 화왕계 첫 구절

 

“신문석화왕지시래야(臣聞昔花王之始來也)”를 들고자 하며,

 

‘분처바위’ 명문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는

 

예수의 부활승천 후의 사도 도마의 행적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야소(耶蘇)의 ‘耶’(耳)가 <이읍(耳邑) ; 귀퉁이 고을>의 뜻이며,

 

‘소(蘇)’가 <소생(蘇生) ; 죽었다가 깨어나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공생애이전에 신라를 방문한 시기는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8년(서기 11년)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기록 ‘유리왕(儒理王)’의『삼국유사』기록 ‘노례(弩禮)’,

 

‘유례(儒禮)’ 중

 

 ‘유례(儒禮)’를 <례유(禮儒)>로 도치하고, ‘儒’(유)를 ‘需人’(수인)으로 파자하면

 <禮需人>(예수인;<예수 사람>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즉 하나는 <공생애 이전 신라를 방문한 예수를 ‘예수(禮需)’(예수)로 표기한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 3대 유리왕<노례(弩禮), 유례(儒禮)>이 왕자 시부터

 <신라를 방문한 예수를 믿고 따랐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들은 신라 초기의 난해한 역사기록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며, 이는 유리왕이 재위 5년(A.D. 28) 兜率歌(도솔가) 즉 <백형현수찬가(白兄玄手讚歌)>를 제작하고, 9년(A.D. 32) 17관등을 마련함에

 유대나라의 역사적 사실 즉 ‘伊’(저 이 ; 尹人 <믿는 사람>의 뜻)를 공벌(攻伐)한 측 출신자를 1관등 ‘伊伐飡’(이벌찬 ; 伊罰干)에, ‘伊’를 咫尺(지척)에서 따른 측 출신자를 2관등 ‘伊飡’(이찬 ; ‘伊尺飡’)에 임명하는 원칙을 세웠다고 본다.



2. 기독교의 전래 입증자료들
1) ‘분처상’은 예수 수난사의 증명자료이다.
‘분처바위’ 명문에서

명문 ‘刀馬’(도마) 또는 ‘刀明’(도명;필자는 ‘도메’로 읽음)가 판독되어

요한복음 20장 25절 기록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

 

도마의 말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은 예수의 수난 즉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

2) 사도 도마의 신라에의 복음전파 입증자료이다.
이 유적지는 소백산맥의 이남지역에 해당되며,

사도 도마가 ‘서나벌’(신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지역에 해당된다고 본다.

그 증거를 이 유적의 인접지역인

 청송 주왕산 국립공원 ‘기암(旗岩)’의 동방박사 경배도를

졸저『삼국시대의 기독교역사 1』에 수록하였다.

3) 고구려 호태왕의 노객(奴客) 보호작전의 증거자료이다.
‘분처상’의 한자 명문 “명전행(名全行)”의 ‘名’자 둘째 획의 첫머리부분에 획이 생략된 이유는 고구려 호태왕을 상징하는 봉황의 부리가 조각되었기 때문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이 봉황새의 목 부분에는 입을 벌리고 전진하는 남자의 얼굴상을 호태왕의 얼굴로 보며, 또 봉황새의 목 뒤에는 큰 장닭 한마리가 작은 닭 여러 마리와 함께 부리를 벌리고 돌진하는 조각이 보인다.

 

이 그림조각은 『일본서기』웅략 8년(서기 464) 2월조의 신라인들이 고구려 군사를 웅계(雄鷄 ; 장닭)로 표현한 내용과 일치하므로 이 조각을 고구려 호태왕이 이 지역을 “다물(多勿)”하는 장면의 묘사 및 이 지역에 침입한

 가야군과 왜구를 격퇴하여 노객(奴客)<천노신객(天奴信客)의 약어>을 보호하는

작전의 묘사로 본다.

또 명문 “명전행(名全行)”의 ‘명전(名全)’의 우(남)측 암벽에 위에서 아래로 향해 내려오는 큰 미꾸리(태자 거련 상징)가

아래에서 위로 향해 사납게 덤비는 표범(가야군 상징)과 대치하고 있는 조각을 고구려 호태왕의 태자 거련이 부왕의 노객 보호작전을 조력하는 장면의 묘사로 본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를 태자 거련의 연추작전(連鰍作戰)이라 하였다.


Ⅵ. ‘분처바위’ 작성시기 및 작성자와 작성목적

1. ‘분처바위’ 작성 시기 및 작성자
‘분처바위’의 작성 시기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재위 18년(영락 19년, 서기 409년, 기유)으로 밝힌다.

 왜냐하면 ‘분처상’ 명문의 탁본물 “명전행(名全行)” 하부에서

 명문흔적 “기유작성(己酉作成)”을 판독했으며,

기유(己酉)가 광개토왕 재위 18년(영락 19년, 서기 409년, 기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유적의 작성자 ‘명전행(名全行)’은 이름(‘名’)이 ‘전행(全行)’이란 뜻이며, 당대의 지식인이며, 뛰어난 기능인이다.


필자가 발견한 ‘명전행(名全行)’이 작성한 유적은 지안 광개토대왕릉비 <제4면 여각(餘刻)의 해석;“사화각인(書畵刻人) 명전행(名全行)”>, 안동 학가산 호태왕 대승첩대 안내비석 (“명전행(名全行) 작성(作成)”), 순흥읍내리벽화고분 묵서명문(墨書銘文) (“명전행(名全行) 서화(書畵)”), 북한 송죽리 고분벽화 <“명전행(名全行) 심화(心畵)”>가 있다.

2. 작성목적
고구려 호태왕이 자신의 신앙대상자인 야소화왕(耶蘇花王)을 인도한 사도 도마상 즉 ‘분처상(分處像)’을 작성함으로써 1세기 사도 도마의 동방국 방문 전도 및 5세기 초 고구려군이 정미작전에 대승첩을 거둔 신라지역의 노객 보호작전의 성공을 기념하고, 아울러 광개토왕의 남순(南巡)을 기념하며, 왕자 거련의 입태자(立太子) 및 왕손 공의 첫돌을 기념키 위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구려 호태왕의 신앙의 대상이 야소화왕이며, 기유년(서기 409년) 전전해인 정미작전(서기 407년) 시에 대승첩을 거두었기 때문이며, 기유년이 왕자 거련의 입태자연(立太子年)이자 왕손 공의 첫돌이 되기 때문이며,『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광개토왕의 남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Ⅶ. 맺음말

1. 맺음말
첫째, ‘처용바위’의 형태는 정견 시에 <송아지형>, <호랑이형>, <베틀형>이 보이며, 좌상견 시에 <처용(處容)의 얼굴상>이 보이며, 이 때에 대문자 ‘처(處)’자, ‘용(容)’자가 복합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분처(分處)바위’는 ‘처용(處容)바위’와 이 바위를 배경으로 마애된 ‘분처상(分處像)’의 합칭임을 밝혔다. 그리고 ‘화왕바위’는 화왕을 상징하는 모란화봉형(牡丹花峰形)임을 밝혔다.

둘째, ‘분처바위’의 명문은 ‘처용바위’에 히브리어문자 명문 “타-우 멤- 요-드 아인”(<도마 손 눈>의 뜻)자와 “알- ”(<수치 1>의 뜻)자가 병각되었으며, ‘분처상’에 한자 명문 “야소화왕인도자상(耶蘇花王引導者像) 도마(刀馬)/명(明) 수목(手目)”, “분처상(分處像)”, “명전행(名全行) 기유작성(己酉作成)”과 “다물(多勿)”자가 복합각자 되었다.(*‘화왕바위’ 사진에 “야소화왕두석상(耶蘇花王頭石像)”으로 여겨지는 명문흔적을 주목한다.) 셋째, ‘분처바위’의 조각은 ‘처용바위’조각과 ‘분처상’조각으로 나누어 파악했다. ‘분처상’은 마애무두인물전신상에 성의(도포)를 입은 모양인데 이는 사도 도마상임이 한자 명문 및 히브리어자 명문을 통하여 파악했다. 그리고 ‘분처상’의 머리는 원래 만들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넷째, ‘분처바위’의 사료적 가치를 고대기독교 전래의 입증자료 및 기독교 신앙 성립의 입증자료임을 밝혔다. 사도 도마와 막달라 마리아의 동방지역에의 복음전파 사실을 증명하고, 또 고구려 호태왕의 전도운동 내지 신자 즉 노객 보호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다섯째, ‘분처바위’의 작성 시기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영락 19년(서기 409년, 기유)이다.

여섯째, ‘분처바위’의 작성목적은 사도 도마의 전도기념과 고구려 호태왕의 남순 및 호태왕의 노객 보호작전을 기념하고, 왕자 거련의 입태자 및 왕손 공의 첫돌을 기념키 위해 명전행(名全行)의 작성임을 밝혔다.

그리하여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종합한다. ‘분처바위’는 예수의 제자상의 뜻인 ‘분처상’이 ‘처용바위’에 마애되었는데 ‘처용바위’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시한 내용으로 보는『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54년 조와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사실이 기록된 마태복음 2장 기록과 연관된 내용을 파악함으로써 마태복음 2장 1절의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라고 기록된 동방박사들이 서나벌의 첨성의식종사관임을 입증하였다.

또 ‘분처상’의 구조와 조각에서 ‘분처(分處)’가 <처용(處容)의 분신(分身)> 즉 사도 도마를 뜻하는 말임을 밝혔으며, ‘화왕바위’는 둥근 형태 및 모란목엽조각을 통하여 야소화왕(耶蘇花王)을 상징하는 모란화봉형(牡丹花峰形)임을 밝혔다.(*이 바위사진에 보이는 명문흔적 “야소화왕두석상(耶蘇花王頭石像)”을 주목한다.)
그러므로 ‘분처바위’는 삼국시대 초기의 한국고대사회에 전래, 전파된 기독교 신앙의 뿌리와 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전파한 사도 도마의 행적을 기념하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순 및 왕자 거련의 입태자 및 왕손 공의 첫돌을 기념키 위해서 고구려 광개토왕 18년(영락 19년, 서기 409년, 기유)에 “명전행(名全行)”이 작성한 유적임을 밝혔다.

2. 제언
‘분처(分處)바위’ 유적은 한국사상(韓國思想)의 원류(源流)를 이룬 고대기독교 유적이며, 고구려 호태왕 영락 19년(서기 409년, 기유)에 명전행(名全行)이 작성한 사도 도마 전도기념유적 및 고구려 유적이므로 국보로 지정하여 보다 철저히 관리되도록 관계기관(문화재청 및 영주시청)에 제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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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紫霞洞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5.08 유유식 씨의 책 두 권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집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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