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는 신이 조제한 상약[上藥]들이 있는데, 황토도 그중 하나다. 황토 한 줌에는 수천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아 있고, 이들은 그들만의 특이한 효소를 만든다. 뿐만 아니라 미세한 공간이 스펀지처럼 복층을 이루고 있는 황토의 표면은 세포의 생리작용을 돕는 원적외선을 듬뿍 흡수, 저장하고 있다. 그래서 황토는 단순한 흙이 아니고 약성을 가진 생명체다.
대전에는 산줄기의 모습이 닭발을 닮아 닭다리산 또는 닭발산이라고 불렀던 계족산이 있다. 이 산자락에 자리한 장동 자연 휴양림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10km가 넘는 긴 황톳길이 있다. 산림욕장 입구에서 시작해서 산등성이를 돌아 다시 출발점까지 이어지는 산길이다. 이 길은 사람들이 황토의 약성을 체험하는 길이다.
무간다 우리도 오늘 계족산 장동 휴양림에 왔다. 아침, 저녁 소슬한 바람이 여름에 지친 우리를 먼 길로 불러냈다. 숲에 들어서니, 길 한쪽으로 뻗은 붉은 황톳길에 산객들이 신발을 들고 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기를 머금은 주황색 황토는 체로 거른 듯 고와 보인다. 매끄럽고 쫀득쫀득한 황톳길로 친구들도 신발을 벗고 들어선다. 흙 위에 찍힌 발가락 자국이 선명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왜, 비용을 들여 이 길을 만들었을까. 조금 올라가니, 나무판에 그 내력이 적혀있다. 이 길은 어느 기업가의 우연한 체험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그는 지인들과 함께 이 산에 왔는데, 한 여성이 하이힐을 신고 왔다. 그는 자신의 신발을 그녀에게 벗어주고 맨발로 산길을 걸었다. 그날밤, 그는 오랜만에 꿀잠을 잤고, 이튿날 한결 가뿐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황토의 약발과 맨발 등산의 효과를 실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휴양림 임도 한쪽에 황토를 깔기 시작했다. 황토 수만 톤을 쏟아부어 맨발로 걷는 산책길을 만들고 함께 걷기를 실천했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계족산 맨발축제'라는 문화 예술의 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간다 친구들도 황톳길 끝에서 발을 씻으며 특이한 경험에 흡족한 표정이다. 내일은 보다 산뜻한 아침을 맞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황톳길을 벗어나 산으로 올랐다. 가을이 여름의 잔영을 서서히 걷어내고 있다. 숲이 스스로 제 몸을 말리는 시간이다. 초록의 끄트머리들이 꺼뭇꺼뭇 변하고, 풀숲이 제법 헐렁해졌다. 이파리는 이미 풀기가 빠지고, 넝마가 되기 시작했다. 이 모두가 여름의 질서 있는 후퇴고, 나무들이 한 해의 수고를 정리하며, 마무리 손질을 하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도 산새소리 요란하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리는 주춤했다. 힘들더라도 계족산 정상을 두르고 있는 산성까지 오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산허리 둘레길만 돌다 갈 것인가, 결정을 해야만 했다. 옆에 있던 산객이 우리의 결정을 거들었다. 올라가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적극 권했다. 우리의 분분한 의견은 일단락 되었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이 까마득히 이어지는 산길로 들어섰다.
대전은 삼국시대 백제를 방어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넓은 분지를 품은 계족산은, 중부지방과 영남 지방의 길목을 지키던 산이다. 그래서 계족산(鷄足山)과 그 옆으로 뻗은 식장산에는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산성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산성이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이었다. 계족 산성은 계족산의 정상에 띠를 두르 듯 축조되어 있다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고 다시 호젓한 산모롱이를 돌아, 마침내 계족 산성 밑에 왔다. 산성은 네모반듯한 작은 돌들을 차곡차곡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코발트빛 하늘을 인 높고 견고한 성벽이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듯 완강하게 비티고 섰다. 울울창창 숲에 싸인 이 성은 높이가 10m 나 되는 긴 성이다. 장엄한 인간 공력의 진수다.
우리는 다시 헉헉대며 돌계단을 올랐다. 드디어 계족산의 정상이자 산성 안에 들어섰다. 순간, 바람을 타고 튀어 오르듯 기분 통쾌하다. 산의 정수리, 가파른 성곽 안에 이런 평지가 있다니, 성곽 안은 넓은 초원이다. 역사가 고인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인간의 해코지를 피해, 신이 고이 간수한 난공불락의 낙토[樂土]가 아닌가. 산정에 서린 서기[瑞氣]가 온몸에 전해 온다.
성 안은 세상과 뚝 떨어진 별유천지다. 하늘은 깨질 듯 팽팽한 쪽빛이다. 저 멀리 고만고만한 봉우리의 윤곽이 하늘길을 따라 아득하게 이어진다. 그 아래 두터운 성벽이 한길처럼 펼쳐져 있다. 군데군데 아름다운 수형을 이룬 오래된 나무들이 빈 고성[古城]을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세웠다는 봉수대도 역사의 자취를 품어 안았다.
성 위에 올라섰다. 아파트가 빼곡하게 채워진 대전 시내와 대전역 부근이 한눈에 들어온다. 복닥거리는 도시의 뒤태가 헤픈 인간의 욕망처럼 어지럽다. 그 사이로 갑천 물길이 뱀처럼 휘어져 흐르고, 청원, 신탄진, 공주까지 가물가물 보인다. 돌아서 반대편으로 가니, 울울창창 산줄기를 비집고, 청록색 대청호수가 물길을 만들었다. 수림 사이로 흐르는 군청색 물빛이 신비롭다.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해본다. 알싸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민다.
자연은 곳곳마다 어찌 이렇게 다른 낙원들을 숨겨 놓았는지. 수수만년 붙박혀 이 땅을 지켜왔을 키 큰 소나무가 솔향을 풀어낸다. 긴 세월 비바람도 그의 소명을 꺾지 못한 게 아닐까. 갈참나무는 벌써 이파리를 날리며 몸을 줄이고 있다. 핏빛 담쟁이는 온몸을 비틀고 휘며 돌벽에 야무지게 붙어 있다. 인간의 손을 타지 않아 저렇게 맑고 또렷한 목숨들일까.
숲 구석구석 야생화들이 요정처럼 얼굴을 드러냈다. 산국은 누구 보라고 저렇게 요염을 떨까. 목 꺾인 여름 들풀 사이에서 꿈꾸듯 아름답다. 우윳빛 고들빼기 꽃은 또 어찌 저리 해맑은지. 한 줄의 구김살도 없이 청초해 보인다. 꽃향유, 구절초, 쑥부쟁이, 색색의 가을 이야기들이 곱고 정겹다. 이들은 산속 이슬 한 방울에 뿌리를 내린 꽃들이 아닌가.
계족 산은 도시와, 물길로 둘러싸여 있다. 계족산성은 도시와 물길을 벗어나 저 홀로 고요를 지켰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은 각기 다른 셈법으로 소유를 다투던 반목의 땅이 아닌가. 산성은 극렬한 저항의 흔적이다. 숨길 수 없는 역사의 반점이다. 그러나 과거가 처절해서 지금은 '한국 관광 100선' 중 하나가 되었고, 대전 8경에도 포함된 절경이 되었다.
우리는 높은 산성 안에 들어가, 한나절 아래 세상을 잊었다. 마음껏 자유로웠다. 닳고 무뎌진 오감은 고감도로 작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