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극복하는 신앙
(창세기 3:10~13)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동안에 우리 일상생활의 패턴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뉴 노멀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가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지금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청년의 때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고 사업에 대한 압박감이 있습니다. 또한 노년에 이르러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마다 각기 두려움의 대상이 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머리를 한 번 부딪치면 머리에 뿔이 나고 두 번 부딪히면 괜찮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뿔이 날까봐 두려워서 한 번 부딪히고 나면 반드시 한 번 더 세게 부딪혔던 것을 기억합니다. 한 번은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비둘기 공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둘기만 보면 도망갔습니다. 성숙한 어른이 비둘기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지난 번 TV를 보니까 남 앞에서 말을 못하는 사람들 훈련시키는 학원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서울에만 그런 학원이 20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남 앞에 서면 식은땀을 흘리고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직업 중 대다수는 남 앞에 서서 말해야 할 직업입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을 때에 지하철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말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말을 못하고 기어코 포기합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라고 소리치는데 그 비장한 모습이 참 안 돼 보였습니다. 남 앞에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종류는 다르지만 여러 가지 형태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은 이와 같은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한 번도 떠나 본 일이 없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사실 두려움은 여러분과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문제이기도 했고 모세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나 엘리야도 두려움에 떨었고 능력있는 선지자들도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제자들도 역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다루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두려움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것을 일시적인 방법을 의존해 두려움을 이겨보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과 마약으로 어떤 사람은 일에 파묻혀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도박에 묻혀 살기도 합니다.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이러한 시도들을 우리는 심리적 게임이라 합니다. 한 마디로 심리적 게임은 자기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심리적 게임은 가벼운 게임도 있고 무거운 게임도 있습니다. 최초로 게임을 했던 사람은 아담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께 안 보이려고 나무 뒤에 나뭇잎 사이로 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아담은 대답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는 왜 숨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어서 이런 방어벽에 의존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했습니다. 일본이 여기서 지므로 패전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드웨이 해전 이전에 일본과 미국의 항공모함 해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을 본 일이 있습니다. 미국은 자유시간도 많고 얼마나 자유롭게 훈련시키는지 매우 여유로와 보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살벌합니다. 머리를 삭박하고 잠도 안 재우고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외치며 24시간 대기 상태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살벌하게 훈련을 시킬까요? 그들은 벌써 이 전쟁에 지고 있구나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세게 훈련시키지 않으면 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갈수록 더 세게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사가 두려운 사람은 적도 없는데 혼자서 칼을 가지고 허공을 공격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마음이 두려우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생 두려움을 갖고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통해 혹은 너의 힘으로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내가 너의 두려움을 해결해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담력을 기르는 일도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두려움의 모든 해결책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마음의 평강입니다. 마음의 평강이란 마음의 편안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두려움도 평강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두렵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두려워하게 되고 마음의 평강을 가지려고 아무리 애써도 마음의 평강이 오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라는 노래도 있듯이 내 마음도 내 뜻대로 안 됩니다. 마음의 평강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빼앗을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평강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강을 주십니다. 그 마음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나쁜 생각에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어느 집사님이 불운한 일이 일어나면 귀신이 한다고 생각해 마음이 불안하다고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저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였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귀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후 제 안에 있었던 두려움과 공포는 다 사라지고 평안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고대 교부 성 어거스틴은 그의 책 고백록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강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 전에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주차장 앞의 차 도로에 들풀이 피었습니다. 어떻게든 안 죽이려고 차를 조심해서 운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 42장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게서 우리를 온전히 완전히 사랑하십니다.
사랑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의심이 많은 분들은 두려움이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평강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범브란트 목사님이 쓴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얼마나 두려웠던지 성경의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만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6번이나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무릎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하루도 우리가 두려움에 빠져서는 안 되는 까닭에 366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일 년은 365일인데 왜 366번인가? 하나님은 윤년까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입니까?
어떤 두려움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우리의 할 일이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게임을 하거나 피하는 일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마음에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시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적절한 처방책을 함께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시 수치를 드러내고 그들은 같은 수고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21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가죽 옷을 해 입히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전술했듯이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 한 마리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모든 수치로부터 떠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방법 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숨어 있는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순간 더 이상 숨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방어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두려움을 내어 놓는 방법만이 최선입니다.
우리는 걱정과 근심을 마치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께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십니다. 기도란 이렇게 하나님께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자기 감정을 하나님께 솔직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솔직히 두렵고 외롭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두려움과 외로움을 없애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장래에 대해 고민할 때 하나님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라 나는 너의 방패요”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행해서도 주님은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떨 때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온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 앞에 두려움이 장애가 될 것을 내다보신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 약속을 붙잡고 싶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아니라 참 자유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기에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합시다. 거기에 참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