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에게 산장이란 어떤 곳일까

작성자이용대|작성시간17.01.27|조회수449 목록 댓글 1

92년 역사 간직한 한국 최고(最古)의 산장.

백운산장은 국내에서 최초로 생긴 한국산장 제1호이자, 강북구 우이동 산 1번지라는 행정주소를 가진 북한산 아래 첫 건물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누구나 북한산하면 백운산장을, 백운산장하면 북한산 과 인수봉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백운산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산장이자 북한산의 상징적인 건물로 92년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한국산장문화의 발상지로서 역사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또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아온 관리인 이영구씨는 인간문화재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인물이다. 1946년 그의 나이 14세에 부친 이남수의 뒤를 이어 이곳으로 들어온 그는 근대등산의 개화기를 빛낸 김정태. 변완철씨 등 많은 산악인들이 산장 옆 움막에서 잠을 자고 등반을 하러 갔다고 회상한다.

지금으로부터 92년 전에 한국 최초의 산장인 백운산장의 역사가 시작된다. 1924년 봄 이해문(李海文. . 이영구씨 조부)씨가 산장 뒤 백운암 움막에 둥지를 틀면서 부터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27년 백운대까지의 등산도로 개설을 목적으로 한일 재계인사 109명이 찬조금 750원을 모금하여 중국인 석공들이 3개월의 공사 끝에 계단과 쇠 난간을 설치했으며 경성일보에서 등산로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백운대 탐승 등산행사를 개최한다. 이후 접근성과 안전성이 높아지자 탐방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백운산장은 등산 인들의 쉼터로 그 필요성이 높아진다.

1942년엔 산악인들의 모금으로 식수확보를 위해 우물을 팠으며,1960년 서울산악회 변완철 안광옥씨의 주도로 산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당시 새 모습으로 준공된 백운산장은 사회적인 뉴스의 초점이 될 만치 장안의 중요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다. 목재를 운반하는 산악인들의 모습과 준공장면이 리버티 뉴스의 영상물로 보도되었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는 마침내 북한산에 등산객을 위한 산상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1992년 지붕이 전소되는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1998년 산악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자재를 나르면서 현재의 모습인 2층 구조의 통나무 건물로 거듭난다.

한국 알피니즘이 발아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산악활동의 근현대사를 보듬어 안고 있는 국내 최고(最古)의 이 산장은 한국등산운동 발전사를 지켜 본 건물로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힘으로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좌면우고하는 가운데 산지정리라는 미명 아래 수 많은 산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 전 소리 없이 사라진 설악산의 비선산장도 그런 예다. 비선대산장이 없어진 뒤에야 그곳이 1957년에 생겨나 60년이나 산악인과 탐방객들을 맞아온 설악산 첫 번째의 산장이란 걸 우리는 뒤늦게 알았다. 산장은 산중의 단순 휴식처가 아니다. 산장을 하나의 역사적인 가치로 남겨 놓는 것은 어떨까하는 것이 양식 있는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내게는 비선산장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 두 가지가 있다.

인수봉에서 첫 만남이 있은 후 몇 년에 걸쳐 친교를 맺고 있었던 일본 산학동지회(山學同志會)회원들과 1975년 겨울 토왕폭을 등반하려고 설악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가 하단 벽에 도착했을 때 토왕폭은 우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심한 낙수 때문에 등반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로 철수했다. 빙벽등반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다음날 토막골 형제폭을 등반하기로 하고 비선대로 철수했다.

그날 밤 우리들은 구비선대산장에 짐을 풀고 추위에 떨면서 아궁이에 땔감을 지폈다. 모두가 잠에 취한 한밤중에 나일론 섬유가 타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랫목에 잠자리를 마련했던 일본 산악인 오미야는 베리 하트!!(very hot)’라고 외치면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그의 우모 침낭은 온돌의 열기로 검게 녹아 있었고 엉덩이 부분에 가벼운 화상마저 입은 상태였다. 침낭에서 빠져나온 깃털과 매연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물을 퍼부어 방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한차례 소동을 벌였다. 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뇌리 속에 남아 있다. 지금은 빈터가 된 산장 주변에 이르면 온돌방의 열기로 증살(蒸殺)당 할 뻔했던 그날의 일을 떠 올리며 실소를 금치 못한다.

2008년 여름. 나는 암벽 반 등반교육을 위해 설악산 비선산장에 머물고 있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려 교육을 중단한 채 비선산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 사람 살려 주세 요!”라고 외치는 비명소리에 놀라 단숨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산장 문 앞에는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차림의 중학생 5명이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쓰러져있었다. 이들은 오색에서 대청봉과 마등령을 거쳐 비선대 까지 도상거리 약23Km14시간동안 비를 맞으며 강행군을 했다고 한다, 식량은 오색을 출발할 때 준비해온 김밥 한 덩어리가 전부였으며 방수. 방풍. 보온의류. 비상식 등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산 밑의 포근한 기온만 믿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행에 나섰다가 부지불식간에 저체온 증에 걸린 것이다. 이들을 산장 침상에 눕히고 뜨거운 차와 수프를 마시게 하고 마른 옷을 갈아 입혀 침낭 속에 눕힌 후 강사들이 응급조치를 하여 정상체온으로 회복시켜 구조한 기억이 아직도 오늘의 일처럼 생생하다.

 

이탈리아 동북부 돌로미테 산군은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암벽등반의 발상지다. 이곳의 셀라고개(Passo di Sella.2244m)는 셀라그룹의 석회암 침봉들과 녹색 숲이 펼쳐지는 웅대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구실을 하는 곳이다.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면 셀라타워(Sella Tower)를 배경으로 한 100년이 넘는 낡은 목조건물 한 채가 잘 보존되어있다. 셀라타워는 젊은 날의 메스너가 그의 동생 균터와 함께 초등한 인기 있는 암봉 이다. 이들은 백년이 넘는 목조산장도 허물지 않고 역사적인 유물로 잘 보존하고 있다. 이 산장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충격은 곧 부러움이었다. 오래고 낡은 산장을 지켜내어 산악역사의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는 그들의 문화적인 안목이 부러웠다.

 

한 세기에 이르는 동안 숫한 희비의 역사가 이곳 백운산장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북한산에서 조난당한 100여명의 목숨을 구조한 곳도 백운산장 이다. 조난사고가 일어났을 때마다 이곳은 단순 숙박시설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때로는 조난자 수습의 구호소나 지휘본부가 되기도 했다.

1939년 인수봉에서 발생한 일본인 징천의 첫 추락 사고를 시작으로, 1942년엔 김판산의 추락사고가 발생한다. 그 후 1944년 인수봉에서 신원미상의 세 사람 시신이 발견되자 2대 관리인 이남수(2대 관리인)씨와 변완철씨가 시신을 수습한 이래 수많은 죽음이 이 산장을 거쳐 나갔다.

19711128 한습풍 환경에 노출된 7명이 목숨을 잃은 인수봉 대참사 때와 198443 기상급변에 노출된 젊은이들 7명이 사망했을 때도 이곳은 구조본부가 되었으며, 1974년에는 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회가 조난구조대본부로 쓰면서 수많은 조난자를 구조하기도 했다.

 

백운대와 인수봉을 울타리삼고 전면의 만경대와 마주하면서 남향으로 위치한 산장 출입문 위에는 白雲山莊이라고 쓰인 한문현판 친숙한 이름이 적혀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남긴 글씨다. 손기정은 베르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영웅이지만 한국학생산악운동의 선봉인 양정중학교 산악부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산장은 각급 등산학교 교육생들의 강의실 역할도 해왔다. 그동안 이 산장을 교육장소로 활용한 학교는 코오롱 등산학교. 경기도등산학교. 서울등산학교 등 이며 여러 산악단체들이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 이용해왔다.

강북 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이 백운산장이다. 강북구 우이동 산 1번지 가 이곳의 행정주소다.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씨는 이 산장에서 조부 이해문. 부친 이남수의 뒤를 이어 누대에 걸쳐 살아 왔다. 그의 조부 이 해문 씨는 1924년에 정착한 이후 한국 알피니즘의 근대사를 지켜보았으며, 손자 이영구씨는 부친의 뒤를 이어 광복 다음해부터 지금까지 70여년을 이곳을 지켜오며 산악인들의 뒷바라지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그는 산악인 뒷바라지로 어느 때는 일용하는 식량마저 바닥이나 곤란을 겪은 적도 여러 차례나 있었다. 그의 부친은 6.25전쟁 중에 후퇴하는 국군장병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전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앉자 패전의 자책감을 안고 산장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끓고 자결 한 순국의 현장을 수습하기도 한다. 산장 앞에 서있는 추모비 백운의 혼이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비다.

그러나 국립공원은 92년 동안 대이어 산악인의 뒷바라지를 해온 그에게 아무런 연고권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백운산장이 분명 그의 것은 아니지만 거리의 구두닦이나 노점상도 연고권을 인정해주는 것이 현실인데 누가 누구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산 꾼들에게 백운산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일까. 그곳은 산악인들의 출발기점이자 회귀점이며 고향 같은 곳이다. 산악인들에겐 인수봉은 백운산장이며, 백운산장은 곧 인수봉이라는 말도 나온다. 인수봉에서 암벽등반을 끝내고 하산하는 바위꾼들에게 고향 같은 포근함을 안겨주는 곳이 백운산장이다. 산악인들에게 이 산장은 젊은 날의 싱싱한 추억이 깃든 고향 같은 곳이다. 어느 수필가는 고향은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까지 우리의 젊은 날을 속 깊이 보호해주는 존재며 고향의 얼굴은 옛 모양 그대로 청청(靑靑)해야 한다. 라고 했다. 일본의 유명 등산가 오오시마 료오끼치는 등산가는 누구나 산속에 자기의 하이마트(고향)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산속의 고향이란 의미는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그게 산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산악인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된 추억의 진원지가 산장이기 때문이다.

산악인들에게 산장이란 어떤 곳일까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고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찾아가는 단순 대피소나 쉼터인가. 아니면 노산악인들의 노스탤지어가 긷든 그런 공간인가. 산장이라는 건축물의 의미를 단순히 실용성에서 찾는다면 그건 산장이라 할 수 없다. 산장은 언제나 쉽게 철거하고 신축할 수 있는 산속에 지어진 그런 모양새의 건물이 아니다. 산장은 많은 사람들의 공유물이며 그 공유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역사적 가치에 그 의미가 부여되어야한다. 지금 한국최고의 역사를 지닌 북한산 백운산장의 존폐여부와 기부체납의 문제가 산악계의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산지정화라는 미명 아래 오랜 역사를 보듬어 안고 있는 산장을 하루아침에 헐어버리거나 신개축을 한다는 것은 우리산악 문화의 유산을 없애버리는 몰상식한 처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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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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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채민석(클리프스) | 작성시간 17.01.28 선생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백은산장은 꼭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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