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군중을 보시고”(마태 9,36)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5,1 참조)
이들은 고통과 질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난 이들이며(4,24–25 참조)
시대와 사회의 상처가 만들어 낸 불의이고 불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9,36)
여기에 쓰인 그리스 말은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정도의 의미로
다른 이의 처지를 자기 안에 끌고 와 그 고통과 불행에 함께하는 깊은 자비를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자비는 대개 인간의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향합니다.
이는 곧 제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지 미리 밝힙니다.
교회의 첫 선포는 논리적 설명이나 사변적 논쟁이 아닌 구체적 치유와 돌봄이었습니다.
군중의 처지를 묘사할 때 ‘시달리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목자 없는 양”(민수 27,17; 참조: 에제 34장)의 심상과 연결되며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목자의 자리 곧 돌봄과 보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도와 율법 그에 따른 심판만 남아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구실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목자들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종말론적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가는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종말이 다가왔음을 보여 줍니다.
내 삶의 한 조각으로 이웃의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말이고 구원이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