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의 3대 친일파 : 2. 국사학계의 거두로 변신한 신석호 2) 식민사관의
주역
≪ 역사왜곡의 3대 친일파 ≫
글쓴이:sister 날짜:2001/10/16 14:00
2. 신석호(申奭鎬 1904∼1981) : 친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2) 식민사관의 주역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인 견지에서 정당화하려 했으니, 이러한 필요에서
나온 관점이 식민사관이다.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타율성론과, 왕조의 교체 등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정체성론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제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조선사편수회이며, 그 대표적 성과물이 《조선사》라는 저서이다.
신석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서 《조선사》 간행에 적극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사(총35권, 1938년 완성)》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사》 편찬의 실무책임자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 신문에서 "한국은 동양 화란(禍亂)의 원천이 되어 있던 고로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병합된 것이니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라고 편찬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목적에 맞춰 나온 편찬 요강 중 하나가 편년체(編年體)이다. 일본은 《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 체제가 바로 편년체였던 것이다.
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적인 목적은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 데 있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조선이 동북아시의 패권을 잡았던 삼국 시대 이전 시기를 왜소,
왜곡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다. 실제로 《조선사》에는 이러한 목적이 관철되었다.
신석호, 이병도 등 당시 친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사편수회는 사서 편찬을 이유로 자료를 독점하여, 군국 일본의 의도대로
취사선택해 《조선사》를 간행했으니 식민사관의 온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 설치 초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소재 대학 출신들이 직원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경성제대가 설치된 이후로는 이 대학 사학과 졸업생들이 주로 충당되었다.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신석호는 1929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조선사편수회 촉탁(囑託)으로
기용되었고 1930년에는 수사관보, 1937년에는 수사관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시기의 사회 여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중반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편찬을 기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서는 이 사건을 최후의 정신적 파탄으로
간주하고 공정한 사서의 편찬을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인에 의한 역사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민족주의 사가들의 저술을 연재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최남선이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하자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가 울분을 참지 못했다는 일화는 이미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929년 신석호의 조선사편수회 가입은 그의 역사 의식 결여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신석호는 친일학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경성제대와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이 중심이 된
친일학회 청구학회(靑丘學會)가 1930년에 조직되는데, 신석호는 여기서 위원직에 있으면서 실무를 담당했고, 학술지 {청구학총}에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연구보국에 힘쓰면서 식민사관의 창출에 직접
관여하여 우리 민족의 소멸에 일조했던 것이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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