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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조선 8대 문장가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2.17|조회수1,140 목록 댓글 0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조선시대에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학문을 떨쳤던 성리학의 대가이다.
그는 16세기 조선시대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파주를 중심으로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구봉 송익필은 1534년 여산 송씨, 송사련의 셋째 아들로 태여난다. 7세 때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山家茅屋月參差)라는 싯구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20대에 이미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는 서로의 학문적 경지를 흠모해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었다.

젊은 시절 송익필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친할머니가 서녀(첩이 낳은 딸)라서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결국 27세 무렵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경기 파주의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전념했다.

이 즈음 김장생을 첫 제자로 맞았고, 30대에는 이이, 성혼과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다.
송익필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기가 발현된 것(理氣之發)’이며 인심도심(人心道心)도 모두 ‘일심이 발현된 것(一心之發)’이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이 상대적이기보다 서로 연관된 관계라고 보았다. 또 주자가례의 원칙에 충실한 예학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성리학 이론과 예학은 김장생과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
송익필은 50대에 노비가 되어 도망자로 숨어사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잘못이 발단이었다.

판관 송사련은 1521년 모반 사건을 조작해 중종에게 고발했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이 “간신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모의를 했다는 것. 이 밀고로 안당과 안처겸 안처근 형제는 처형되고 안당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밀고의 대가로 송사련은 당상관으로 초고속 승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생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켰다.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불린 이 사건은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송씨 일가의 이러한 약점은 자식인 송구봉의 대에 이르러, 동인들에 의해 불거지게 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사노(私奴:남자 종) 송익필을 체포하라!’는 요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일찍이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자로 나선 것도 이러한 출신상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충청도 당진에서 은거하며 묵묵히 학문을 이어갔다.
송사련이 안당 집안 노비의 후손이기에 노비가 주인집을 배신한 것과도 같았다.

안씨 집안 사람들은 60여 년 전에 일어난 이 밀고가 잘못됐음을 밝히고 송익필 가족이 안씨네 노비였음을 입증하는 소장을 냈다. 

송사련과 송익필 2대에 걸쳐 양인 호적을 인정받았음에도 송익필과 그의 형제, 자손들은 노비로 환천(還賤)되었다.

안씨네 노비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송익필 가족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이후 동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송익필은 구속과 석방, 귀양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다.

일찍이 교육자의 길에 들어, 후일 예학의 대가로 크게 이름을 떨치는 사계 김장생, 수몽정엽, 기옹 정홍명 같은 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구봉 송익필은 신분차별이 엄격하였던 조선중엽에 태어나 종의 자손이라는 신분상의 문제와 동인들의 방해로 끝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의 외증조모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구봉 송익필은 학문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다.

번개가 치는듯한 안광과 당당한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기백으로 인해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 판서의 직위에 있던 홍가신은 송구봉을 흠모하여 자주 서신을 보내 학문과

업무에 관한 대소사에 많은 자문을 구했다. 이런 홍가신에게 경신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 경신은 판서의 직위에까지

오른 형이 한낱 종의 자손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겨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두고만 보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편지 하나를 건넸다.
 "너, 이걸 가지고 구봉 선생께 전하거라."
평소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동생 경신은 길길이 뛰며 화를 내었다.
 "종놈의 새끼한테 제가 왜 갑니까?"
그러나 형은 이런 동생을 잘 달래 기어이 보냈다.
 "가서 서신만 전하거라."
형의 명을 끝내 어길 수는 없어 동생은 단단히 벼르며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해 사람을 부르니, 마침 밖에 아무도 없었는지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홍경신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의 새끼가 이럴 수 있다니, 게 익필이 있느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송구봉은 낯선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마루로 나와 손님을 맞았다.
"그 뉘시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송구봉을 욕보이겠다고 기세 등등하던 홍경신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며 예절을 차리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아닙니다. 그냥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온 동생에게 홍가신이 물었다.
"편지는 전했느냐?" "아뇨, 못 전했어요. 정신이 까막까막해서 놓고만 왔습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까막까막한 것만 아니라, 너 오줌쌌지? 구봉 선생과 마주 앉아 쳐다보는 건 율곡 하나고,
성우계는 나하고 곁에 앉아 얘기하는데 구봉 선생과 마주 앉으면 벼락치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앉지는 못하느니라."
훗날 홍경신은 자초지종을 묻는 세인들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져 넘어진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구봉 송익필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지기였던 율곡은 다가오는 국가의 환란을 짐작하고 선조에게 구봉을 끊임없이 천거했다고 한다.
당시 율곡 이이는 우계 성혼과  함께 구봉이 병조판서라도 하면 왜놈은 공격할 마음조차 못 먹는다며 여러모로 선조를 설득하였다.
율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선조는 마침내 그를 만나보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송구봉과 대면하게 된 선조는 그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 송구봉은 눈을 감고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 어명이오."
 이에 할 수 없이 눈을 뜨니, 선조는 그만 그의 눈빛에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신하를 조정에 둘 수가 없다 하여 이 일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송구봉에 관하여 전해지는 정사나 야사에는 꼭 율곡 이이가 함께 등장한다.
송구봉을 알 만한 이는 율곡 정도였고,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신분인 송구봉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했다.
그가 나중에 동인의 미움을 받아 노비가 된 것도, 율곡과의 친교로 서인의 정책 자문 역할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당시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임진왜란이 닥치기 전에 죽고 만다. 하지만 율곡은 쉽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율곡은 앞으로 일어날 전란을 예상하고 임금이 피난 가는 길목에 화석정을 세워 갈 길을 밝혀, 죽어서도 군주를 구한다.
 이러했던 율곡이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이에 율곡이 송구봉을 찾아가 앞날을 준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마고우이던 구봉 송익필은 애도의 시를 지어서,
"그대와 나는 합해서 하나인데, 반쪽만 남은 나는 사람 구실 못하겠네" 라는 애절한 슬픔을 토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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