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담장을 친 가족묘역에서 가장 윗쪽에 있는 율곡 이이 내외의 묘이다.
율곡의 묘는 부인 노씨(盧氏)와는 쌍분도 합장도 아닌 상하이연봉(上下二連峰)형태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남편의 묘를 부인보다는 윗쪽에 모신다. 부인 노씨의 묘가 남편 율곡 이이의 묘 윗쪽에 있다.
후손이 선조보다 벼슬이 높으면 윗쪽에 묘를 쓰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율곡 이이 부부의 묘는 합장도 쌍분도 아닌 희귀한 형태에 부인이 윗자리에 있는게 범상치 않다.
율곡 이이 내외의 묘가 상하이연봉의 형태로, 부인이 윗자리에 있는 것과 관련한 사연이 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은 방방곡곡 각 지역을 휩쓸며 양민학살과 부녀자 겁탈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율곡 이이는 돌아가실 때 가족에게 "머지않아 큰 화가 닥칠 것이니 그러면 권율장군을 찾아가 의탁하라" 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한다.7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인은 권율장군을 찾아가 사연을 말했으나, 전란 중에 식솔들의 생사조차 모르던 장군은 부인을 도와줄 수 없었다고 한다. 왜군들에게 쫒기며 겨우겨우 선생의 묘에 이른 부인은 변을 당할까 두려워 물을 떠오라며 하녀를 내려 보낸 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통곡을 하였다. 이때 마침 왜군이 몰아닥치자 부인은 왜군을 향해 크게 꾸짖고 선생묘소 뒤에서 비수를 꺼내 자결하였다.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다 나무숲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본 하녀는 왜군이 흩어지자 발을 동동 구르고 애통해 하며 아랫마을에 가서 참상을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동리문하생들이 시신이 있는 곳에 임시로 흙만 덮어 건평을 하였다.
나중에 의주에서 환궁한 후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조임금은 율곡 이이의 부인이 죽은 바로 그 자리에 봉분을 하라 하명하여 문하생들이 몰려와 치장하였다 한다.
「경기읍지」 중 파주군 조의 열녀편(烈女編)에 자세히 실려있다.
"임진왜란 때 부인 노씨는 남편인 율곡의 묘를 껴안고 있다가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정려문을 세운다' 라고 쓰여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선생이 49세로 돌아가시자 이 곳에 묘를 정하였는데, 그 후 난이 일어나자
부인은 이 곳에서 한 여종과 함께 묘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에 놈들이 겁탈하려 하자 이에 두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훗날 난리가 끝나고 후손들이 곳을 둘러 보니 율곡의 묘 옆에 두 여자의 유골이 흩어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부인과
여종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한다. 이에 두 유골을 모아 합장도 쌍분도 아닌 형태로 연이어서 묘를 썼다 한다.
기구한 사연이 아닐 수 없다. 묘 앞에는 문관석(文官石)이 양쪽에 시립해 있고, 석마(石馬)가 쓸쓸히 서 있다. 율곡에게 세인(世人)이 구도 장원(九度壯元)을 할 만큼 벼슬에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묻자, "궁핍한 살림이라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치 못할 것이두렵고, 또한 어버이의 간곡한 응과(應科)의 바램을 저버릴 수 없었다."
봉분 맨 앞 좌우 서있는 돌기둥이 망주석이다.
팔각형의 둥그스름한 생김새도 남근을 닮은 기자석이고 3분의 1 지점에 작은 동물 형상이 디자인되어 있다.
동물문양은 망주석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모습이며 없는 것도 있다. 지형, 풍수 등에 따라 다르다.
망주석에는 보통 맨 위에 연꽃 문양을 새겨 놓고 아래는 소반을 새긴다. 망주석은 망두석으로도 불리는데 영혼이 나와 쉬는 곳이다.
또는 밖에 나갔던 영혼이 망주석을 보고 찾아오는 표식이라고도 한다. 오래된 망주석에는 도롱뇽이 디자인되어 있다.
도롱뇽은 양서류로 물과 육지에서 활동이 가능하다.
민간에서 영혼은 육지보다는 물을 좋아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영혼이 무덤을 빠져나와 속세를 구경할 때 수륙을 넘나드는 도롱뇽을 타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반들은 용도 용나름이지 도롱뇽을 타고 다닌다는 것이 어색했는지 세호(細虎 : 작은 호랑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변화를 겪는다. 도롱뇽이나 세호까지는 귀족들의 문화였다면 세호가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슬그머니 다람쥐가 된 것이다.
서민들은 다람쥐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다람쥐는 가을이 되면 열심히 도토리와 먹잇감을 주워 땅에 묻어 숨겨둔다.
하지만 다람쥐는 자기가 숨겨둔 도토리의 10%도 못 찾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90%는 발화하여 도토리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육지에 남아 있는 도토리는 모두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썩어 버린다. 하지만 다람쥐가 모은 도토리는 90%가 나무가 된다. 망주석의 다람쥐가 오르는 것은 쉬러가고 내려가는 것은 일하러 가는 것이다. 결국 다산과 만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심어놓은 것이다.
묘역 윗자리에서 내려다 본 율곡 이이 가족묘 지형과 기세(氣勢)가 돋보였다.
좌청룡과 우백호가 단단하게 감싸고 있고 안산(案山) 역시 든든하게 받처주고 있다.
맥세를 타고 내려온 생기(生氣)를 갈무리하는 잉(孕)이 불쑥 솟아 오른 게 참으로 실하다.
1584년 정월(선조17), 율곡 이이가 49세 되는 해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붕의 기와장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마침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 있던 율곡 이이는 "어찌 이다지도 바람이 맹렬한고"하였다.
옆에 있던 제자 이유경이 "우연일 뿐이니 물으실 만한 게 못 됩니다"고 답하였다.
이에 율곡 이이는 "나는 죽고 사는 것에 동요되는 사람이 아니니, 역시 그저 우연히 물었을 뿐이다" 하였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는 북쪽 변방을 순무(巡撫, 백성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로함)하기 위해 떠나는
서익(徐益)을 불러 <6조 방략(六條方略)>을 지어주였다.
그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물리치면서, "내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라며 일어나 앉아서 받아쓰도록 말했다.
16일 새벽 서울에서 생을 마쳤다. 율곡 이이가 돌아가시니 선조 임금은 크게 통곡하시고, 삼일동안 조회를 철폐하면서
장례를 후히 치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