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운동 송강 정철의 집터 청운초등학교 울타리에는 사미인곡 등 그의 각종 시비로 꾸민 아담한 도로공원이 있다.
가사문학 대가로 알려진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93)은 율곡 이이와는 동갑내로 절친한 친구이다.
율곡 이이가 퇴계 이황이 체계화시킨 성리학을 조선성리학으로 새롭게 업그레이드 시켰다면
그의 친구 송강 정철은 가사문학을 통해 율곡 이이의 조선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송강 정철은 어느날 율곡 이이에게 '이산(以山)'이라는 시 한수를 보낸다. '산과 같다'는 뜻이다.
그대 뜻이 산 같아 굳게 움직이지 않고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 물 같아 가서 돌아오기 어려워 (我心如水去難回)
물 같고 산 같음이 모두 이 운명이려니 (如水以山俱是命)
서쪽 바람에 머리 돌려 홀로 서성일 뿐 (西風回首獨徘徊)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선조수정실록>에서-
한 번은 율곡이 성혼과 함께 정철 집안 잔치에 갔을 때 집에 들어서려는데, 기생들이 있었다.
고지식한 우계 성혼은 정철에게 “저 기생들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율곡은 “물들어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리”라고 했다. 기생들이 있다 해도 추잡해지지 않으면
선비의 본분을 지키는 것에 누가 되지는 않으니 함께 잔치를 축하해 주자는 뜻이다.
송강은 술에 취하면 옆 사람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등 실수가 많았다. 이럴 때마다 율곡은 항상 송강을 변명하여
위기를 모면하여 주고 정철에게는 친구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송강 정철은 율곡과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다. 율곡과 동갑인 그는 이이와는 절친한 벗이었다.
율곡이 평생을 각 당파의 화해를 위해 진력을 다한 반면 그는 철저하게 서인의 맹렬한 선봉장 이었다.
그 당쟁의 충돌이 대폭발을 일으킨 첫번 째 사건이 기축옥사라 불리우는 정여립 역모사건이었다.
정여립은 한때 서인이었고 율곡과 우계의 문하에 드나들며 '주자가 완전히 익은 감이라면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다' 라며
서인의 실질적 당수 율곡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율곡 사후 동인으로 돌아서서 경연에서 율곡을 헐뜯어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벼슬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이후에 정여립은 진안으로 내려가 대동계를 조직해서 군사훈련을 시켰고
평소에도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라는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다녔기 때문에
역모를 고변하는 황해감사 한준겸의 비밀장계는 곧바로 확증이 되었고 곧 체포령이 떨어졌다.
관군에 쫓기다 자결로 생을 마감한 정여립의 행동은 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대대적인 옥사는 불가피했다.
처음에는 동인인 정언신이 위관(수사책임자)으로 임명되었다.
미지근한 추국에 선조는 정언신을 파직하고 서인 강경파인 정철을 불러들여 위관으로 임명한다.
정여립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추국장으로 끌려오고 대부분은 그와 가까이 지냈던 동인이었다.
이발, 백유양, 최영경, 정개청 등이 이 혼란의 와중에 죽어나갔고 천여명의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강상죄를 엄벌하는 조선에서 역(逆)이라는 글자만 들어가도 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율곡의 사후 구심점을 잃은 서인에 비하여
신진 사림인 동인의 세가 날로 확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선조 개인의 동인 견제 심리가 옥사의 확대를 가져왔다.
고집불통에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이 강하고 타협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정철은 선조에게 최적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정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조의 입김으로 추국은 무자비하였고 선조는 계속해서 정철에게 역모의 내막을 철저하게 밝히라고
종용하였다.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율곡은 송강보다 10년을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송강은 율곡을 잃은 슬픔 앞에서 거의 절망하다 싶이 했다. 송강의 슬픔은 친구 율곡의 충고를 실천하지는 못한 것이
더욱 가슴 아파 했다. 같은 서인이면서도 대사헌 정철은 율곡 이이와 동서 의견 충돌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것은 온유한 율곡에게 송강의 충동적인 사고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강은 율곡과의 의견차이의 안타까움을
위의 시 이산(以山)으로 표현했다고 한다.이렇게 율곡은 송강을 늘 껴안았다.
풍수에서는 여인이 이 터로 장가 시집을 와서 살면 과부가 된다는 전설이 있는 인사동 '과부골'이다.
율곡 이이 가족이 과부 골에 육중한 남근을 상징하는 느티나무를 심어 음기(陰氣)를 다스리고 살았다.
그 느티나무로 부족한 기(氣)를 보완한 비보(裨補) 때문인지 조선 최고의 학자 율곡 이이를 배출한 명당으로 변한다.
그 과부골 동남쪽에는 '이율곡 선생이 살던 집터'임을 밝히는 표석이 있다.
율곡은 송강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사랑하는 친구였다.
율곡과 송강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서 그 대목을 살핀다.
율곡은 검은 빛을 띤 짙은 남색의 모시 청포를 입고 검은 띠에 유건(儒巾)을 쓴 전형적인 유생의 차림새로
시험장인 성균관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한떼의 유생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균관으로 들어서는 율곡을 막어섰다.
"네 이놈,네 감히 어딜 함부로 들어가려 하느냐?"
덩치 큰 유생 하나가 율곡의 앞을 가로막으며 호통을 쳤다.
"네놈은 일찍이 사도에 빠져 석씨를 숭상하던 잡놈이 아니더냐.
그러한 네가 어찌하여 성인들의 신위가 모셔진 문묘에 함부로 드나들 수 있단 말이냐."
율곡을 막아선 유생이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였다.
"네놈이 정히 성균관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 가랑이 사이를 개처럼 기어가거라.
그러하지 못하면 감히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 할 것이다."
일측즉발이었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과유(科儒) 하나가 이를 보고 소리쳐 말하였다.
" 이 무슨 일인가."
지나가던 유생은 포위된 율곡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인가?"
뛰어든 유생은 율곡과 세도가의 아들도 잘 알고 있던 송강 정철이었다.
정철은 율곡과 동갑내기로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율곡이 몰락한 양반의 가문으로 시골 출신의 서생인데 반해 정철은 집안도 좋은 편으로
그의 큰 누이가 인종의 숙의(淑儀)여서 어릴 때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여 당시 대군으로 있던
명종과도 같이 놀며 친숙하게 지냈던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철이 훗날 장원급제하자 명종은 크게 기뻐하며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려 줄 만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던 신분이었다.
"어시 오시게나, 송강."
율곡에게 가랑이 사이로 자나가라고 억지를 부렸던 유생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저자가 한때 머리를 깍고 석씨의 문중에 들어가 사도에 뻐졌었는데, 어느 안전이아라고 성인들의 신위가
모셔진 문묘에 함부로 드나들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출입을 막고 있었네."
"여보시게나."
정철이 만류하여 말하였다.
"율곡이 한떼 불문에 귀의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옛길로 돌아왔으니 그것이 무슨 허물이 될 수 있는가."
정철은 율곡과는 달리 호방함이 있었다. 정철은 율곡을 처다보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한번 유건을 벗어보시게나. 자네가 여전히 삭발하였다면 아직 사도에 있는 것이고 유발하여 상투가 있다면
이 궁향을 벗어난 것이니, 자유롭게 문묘를 출입하여도 무방할 것이 아닌가."
자존심이 강한 율곡이 그렇다고 제손으로 유건을 벗을 수 없는 노릇. 더구나 검은 유건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 중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칼을 가리는 유일한 보호막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정철은 율곡에게 다가가 손을 올려 율곡의 유건을 슬며시 벗기려 했다.
율곡이 물러서며 반발하자 정철은 빙그레 웃으며 눈을 끔쩍끔쩍 하였다.
정철의 눈짓은 자존심이 상해도 잠깐만 그래도 있어 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보시게나."
율곡의 유건을 벗기자 큰 상투가 그대로 드러났다.
"율곡이 한때 머리를 깍고 석씨의 문중에 빠져 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보시다시피 유발하고 어른 주먹만한 상투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성인들의 신위가 모셔진 문묘에 드나든다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정철은 호방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율곡을 향해 눈을 끔쩍끔쩍 하였다.
눈을 끔쩍끔쩍하면서 율곡의 유건을 벗기는 뛰어난 임기응변을 통해 율곡은 사면초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인 천도책(天道策)을 시지(試紙)를 통해 과거 시험지의 답안을 써 올림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철은 율곡의 평생 은인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