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입구 원호(元豪 1533 ~ 1592)장군 임진전(壬辰戰) 전승비
원호는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중영,본관은 원주이다.
송수의 아들로 김덕수의 문인이기도한데 1567년 무과에 급제하면서무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호는 경원부사 시절 여진족 니탕개의 침입을 격퇴 하였고 1587년에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못해 유배돼기도 하였다, 그후 유배에서풀려난 원호는 고향에 은거하다가1592년 임진년 조,일 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 조방장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여주의 신륵사에서 왜군을 대파 했다.
이어 패퇴하는 왜군을 추격 구미포에서 섬멸하여 이 공으로 원호는 여주 목사겸 경기,강원 방어사가 되었다.
이후 김화에서 왜군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조정은 원호에게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추증 하였으며 김화의 충장사,충렬사에 제향 되고 "충장" 이라는 시호를받았다.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기꺼이 진충보국하는 원호 장군의 자세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좋은 귀감이다.
윗글은 원호장군 전승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1990년 5월 원호장군추모사업회에서 예술원장 박종화(朴鍾和)에게 비문을 받고 14대손 원종극(元鍾極)이 써서 건립하였다.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영(仲英), 시호는 충장(忠壯).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생원 순(珣)의 딸이다.
김덕수(金德秀)에게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촉망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의 증조부 김이진(金頤眞)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택해서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에 이어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경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재직중 전라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인책,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풀려나와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고향에 은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의 신륵사에서
적병을 크게 무찔렀으며, 패주하는 적병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다.
그 공으로 경기⋅강원방어사 겸 여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의 격문을 보고,
병을 이끌고 가다가 김화에 이르러 적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좌의정에 추증되었고, 김화의 충장사(忠壯祠)⋅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업적>
1592년(선조 25) 4월 14일 20만 왜군의 선봉으로 소서행장이 이끄는 18,700명의 병력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申砬)의 군대를 격파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오다가
여주의 남한강 신륵사에서 제동이 걸리는데 이는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원부사로 있을 때 북쪽의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침입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적병을 모두 격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재직 중 전라좌도에 왜구가 침입하였는데 이 사실을 통고받지 못해 정상을 모르고
있다가 인책되어 고향 여주에 머물렀다.
향병(鄕兵)을 이끌며 한때나마 왜군의 한양 진격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던 원호는 당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일단이
구미포(龜尾浦)에 들어가 약탈을 일삼자 새벽에 적의 감시병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앞세워 적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는 왜란초기 한강에서 거둔 조선군 최초의 승리였다. 구미포에서 적을 섬멸한 원호는 마탄(馬灘)으로 가서 이천부사 변응성(邊應星)과 협공하여 왜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의주로 몽진(蒙塵)길에 올라있던 선조는 이 승전보를 듣고 기뻐하며 원호에게 경기·강원 방어사겸 여주목사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원호는 북쪽에 있는 왜군 토벌의 임무를 맡고 금화(金化)로 진군하던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자 깊은 산의 낭떠러지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금화 고을 사람들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고향인 경기도 여주까지 운구하여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에 안장하였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