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96번지.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으로 한강가 평지에 축조된 초기백제의 국도(國都) 왕성
하남위례성 북성(北城)이다.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으로 10대 문명도시이다.
성벽의 길이는 3.5킬로미터로 추정되고 넓이는 성벽 바깥쪽을 기준으로 할 때 22만 6천 평이다.
성벽을 뺄 때는 19만 평쯤 된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북벽 약 300m 동벽 1.500m 남벽 200m 가량 되며
여기에 유실되고 남은 서북벽 250m를 가산하면 2.250m 가량 된다. 성벽의 너비는 30~40m 정도이고
가장 넓은 곳은 70m에 이른다. 복원된 북벽의 높이는 11.1m, 미복원된 남쪽과 동쪽의 높이는
6.2m 내지 6.5m 정도라고 한다. 사다리꼴로 중심을 쌓고 판축을 한 거대한 토성이었다.
"풍납토성중 두 지역을 99년에 발굴 조사한 결과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토목 기술이 사용된 것을 발견했으며
현대의 댐 수준으로 견고하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희권연구원(국립문화재연구소)-
신희권연구원은 2001년 5월 대전 한밭대에서 열린 제1회 풍납토성 학술대회에서 '풍납토성 축조과정'에 대한 보고서에서
"이번 발굴에서 밝혀진 풍납토성의 건설 기술은 현대식으로 보면 내진 설계 철근 콘크리트 공법 방수 처리 등에
비교될 수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백제의 초기 왕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풍납토성이 현대의 댐과 견줄 만큼
견고한 첨단 토목기술로 축조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그의 발표내용을 간추린다.
발굴 결과 풍납토성의 흙벽중 가장 밑바닥에는 평균 50㎝ 두께의 뻘흙이 깔린 것으로 밝혀졌다.
뻘흙은 매우 끈적끈적하고 질겨 건물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기초 역할을 한다.
또 유동성이 있어 지진 등에도 쉽게 견딜 수 있다.
우리 연구팀은 주민들이 뻘흙을 한강이 범람할 때 얻었거나, 바다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
약간씩 흔들리는 건물이 지진이나 태풍에 더 잘 견디는 것처럼 풍납토성도 뻘흙을 이용해 지진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 같다.
철근 콘크리트 공법과 비슷한 '목재-뻘흙' 기술도 사용됐다. 풍납토성의 가장 안쪽 흙벽은 나무로 직사각형 모양의 틀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에 뻘흙을 넣어 강도를 높였다. 목재가 뻘흙의 보강재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뻘흙은 유기물이 썩지 않도록 보호하기 때문에 적어도 1,800년 전의 토성 속 목재가 지금도 썩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흙벽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과 나뭇잎층을 교대로 쌓는 기술도 사용됐다.
흙층과 나뭇잎층을 층층이 쌓으면 층 사이에 마찰력이 생겨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흙벽이 밀리는 현상을 방지한 것이다.
이번 발굴 결과 풍납토성의 흙벽에는 10여차례나 나뭇잎과 흙층을 교대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이 기술이 사용된 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에 지어진 김제의 벽골제로 풍납토성은 이를 1세기 이상 앞당긴 셈이다.
또 흙과 나뭇잎층을 교차로 쌓는 기술은 6~7세기에 지어진 일본 큐슈의 수성(水城)이나 오사카의 협산지(狹山池) 제방에도 사용돼
한국의 토목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로 제시됐다.
풍납토성을 축조하는데 들어간 흙의 총량은 가장 적게 잡아도 8t 트럭 20만대 가량 분량인 154만t이나 된다.
풍납토성 축조가 끝난 시점을 적어도 서기 3세기 즈음, 혹은 더 빠른 시점으로 잡고 있다.
백제는 한국고대사학계 통설보다는 훨씬 빠른 기원후 1∼2세기쯤에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국가에
접어들었음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적어도 수십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는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왕권과 이를 기반으로 한 고대국가 출현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발굴에서 확인된 넓이 40m, 높이 11m의 성벽을 편의상 이등변삼각형으로 잡아 원래 성벽 길이 3.5㎞를 곱해
전체 체적을 계산한 결과 77만㎥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보통 흙의 무게가 체적의 2배이다.
풍납토성 축조에 쓰인 흙은 총무게가 154만t으로 추산된다. 성벽을 계산하기 쉽게 이등변삼각형으로 잡았으나
실제 모양은 이것보다 체적이 더 큰 사다리꼴 모양이기 때문에 성벽을 완성하는데 들어간 흙의 양은 154만t보다
훨씬 많으면 많았지 적을 수는 없다고 전문가들은 본다.생각했던 것보다 성벽의 규모가 엄청난데 놀랐으며 더구나 흙이 흘러내리거나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점이 더욱 경탄스러웠다. 현대적인 장비가 없던 시절에 이렇게 거대한 토목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수만명의 인력이 동원돼도 수십년은 걸렸을 것이다.
이 토성은 국내 최대 규모로 아시아 최대의 판축토성이다.
백제는 건국 이후 멸망까지 678년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것이 서력 기원전 BC18년, 그 때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불타버린 서기 475년까지 백제 493년 역사가 바로 이 풍납토성에서 이뤄졌다.
문주왕 이후 성왕때까지 웅진, 즉 공주 백제(475∼538년)는 63년,
신라.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기까지 사비, 즉 부여 백제(538∼660년)는 122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무문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와 도기조각 등이 출토됐다.
한반도에서 기원 전후시기에 목조 기와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풍납토성이 백제 온조왕이 세운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1925년 한반도 중부를 강타한 ‘대홍수’로 인해 삼국시대 ‘백제의 고도 하남위례성’이 드러났다.
풍납토성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서 한 개의 항아리가 모양을 드러냈다. 그 속에는 주전자 비슷한 청동초두 2개가 들어 있었다.
주로 신성한 제사 때 쓰인 것으로 고대 귀족 계층에서 사용한 물건이다.
1964년 10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발굴단이 참여해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북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는 곳(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接大海)."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을 묘사해 놓고 있다.
삼국사기는 한성 백제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술한다.
"개로왕때 만년(왕 21년, 475)에 이르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烝土築城)
곧, 그 안에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榭)를 건축하였는데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큰 돌을 마을과 하천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묻고 강변을 따라 목책을
쌓는데 사성의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렇듯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어
국고가 마르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형세가 급박함을 누란(累卵)과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국왕은 죽고 왕자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한 고려 시대에도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위례성 후보지로 여러 곳이 거론되는 가운데풍납토성이 발견된 것이다.
지난 1999년 풍납토성 경당연립 발굴에서는 말뼈가 출토되었다.
한 구덩이에서 출토된 말뼈는 무려 아홉 개체. 이상한 점은 모든 말뼈가 다른 부위는 없고 모두 머리뼈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말머리뼈가 출토된 9호 구덩이 바로 옆, 한문의 여자형(呂)과 비슷한 건물지가 확인됐다. 그 주변은 숯으로 채워져 당시
이 건물지를 신성시하고 보호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경당터에서는 '대부(大夫)'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굴되였다.
같은 모양의 토기에 '정(井)'자가 새겨진 유물도 발견됐다. '
우물 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곳은 '대부'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곳과 같은 장소였다.
이런 유물은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기우제를 올렸던 백제의 제사터였음을 추론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