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에 있는 소서노 대형석상
"소서노는 조선사상 유일한 여제왕(女帝王)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단재 신채호는 그의 책 <조선상고사>에서 유례없이 나라를 두 세개나 세운 세계적으로 위대한 여제왕(女帝王) 소서노라고
말하고 있다.소서노는 아무도 간 적이 없는 길을 개척하고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세상을 연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서노가 아버지 연타발의 그늘에서 벗어나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5가지 지혜로움을 찾는다.
첫째 소서노도 아버지 연타발의 그늘 아래 일개 ‘공주’로서의 평탄한 삶만을 원하지 않고 스스로 민족통일과 건국이라는
도전적 과제를 자신의 삶으로 선택했다. 둘째, 주변의 그럴싸한 권력자들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보다 8살이나
아래인 데다 여러 가지가 부족한 주몽을 동반자로 선택하여 민족정신을 잇게 했다. 셋째, 소서노와 만나기 전 주몽이 어릴 적
결혼한 부인과 그로부터 생긴 아들의 출현에서 발생한 분열과 위기를 더 큰 땅, 더 큰 나라의 건국으로써 극복하고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이어지게 했다. 넷째, 대륙을 거쳐 금수강산을 택해 백제가 있게 하고 이로써 일본의 왕가가 있게 했다.
그리고 다섯째, 자신의 죽음을 국가의 위기와 분열의 조짐을 막기 위한 죽음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에서 또다른 의미를 찾는다. 소서노의 ‘소’(召)자는 ‘칼을 입에 문다’, 아니면 ‘말이 칼같이 영험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칼을 입에 문 여성, 말이 칼같이 영험한 지혜로운 여성이 고대 부족국가에서 맡은 역할은 ‘여사제’로 본다.
역사학자들도 여사제의 존재에 대해 삼국시대 이전은 물론이고, 유화부인의 지모신적 요소, 박혁거세의 딸 아로 공주가 국무였고,
화랑의 우두머리 원화들이, 또 가야의 김수로왕과 허황옥 여왕 사이의 공주 비미호(희미꼬)가 무녀, 신녀였듯이 소서노 역시
여사제였음을 추정한다. 조상 대대로 자신들의 정든 땅과 재산을 주몽과 유리의 고구려에 물려주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또 다른 뜻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는 소서노(召西努)가 여대왕으로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옮기려고 한다.
백제본기는 고구려본기보다도 더 심하게 문란하였다. 백 몇십년의 삭감은 물론이요,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리었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이니 하북(河北) 위례성(지금의 漢陽--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 온조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또 한 사람은 하남(河南) 위례홀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篇)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하남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위례홀에서 하남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 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于台)이므로, 비류, 온조의 성(姓)도 부여요,
근개루왕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 온조를 추모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설(說)하노라.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서 비류, 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함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추모왕이 그때문에 소서노를 정궁(正宮)으로 대접하며, 비류, 온조 두 아들을
친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유류(儒留)가 그 어머니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돌아오매, 예씨가 원후(元后--왕후)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으며, 주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아들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디에 서랴. 차라리 대왕이 살아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하고는,
이 뜻을 소서노에게 알리고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은주보(金銀珠寶)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마려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비류, 온조 일행이 마한에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왕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100리의 땅 미추홀(지금의 인천)과 하북위례홀(지금 서울) 등을 얻어 소서노가
왕호를 칭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에 낙랑국 최씨가 바야흐로 압록강의 예족과 손잡고 핍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에는 낙랑국과는 친하고 예족만 구축(驅逐--내쫓음)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낙랑국과 절교하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하였다.
백제본기에 <낙랑왕> 혹은 <낙랑태수>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년의 연대를 삭감한 뒤에 그 삭감한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한나라 군)이라 하여 <낙랑태수>라 쓴 것이며, <예>라 쓰지 않고 <말갈>이라
썼으니, 이는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 한, 당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를
모두< 말갈>이라고 고친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의 책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하는 '소서노가 죽은 뒤 두 아들의 분국(分國)과 그 흥망'을 다시 살핀다.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사상 유일한 여제왕(女帝王)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온조 두 사람이 상의하여 말하되,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핍(侵逼--침략하여 핍박함)하여,
우리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터를 보아 천도함이 옳겠다."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지금 서울 북악)에 올라가 서울 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1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 마려 등이 다 비류에게 간하여 말하되, "하남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옥택(沃澤--기름진 평야)을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를 둘러 천연의 지리(地利)가 이만한 곳이 없거늘, 어찌 이곳을 버리고 다른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고 했으나, 비류가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서 두 백제가 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소서노를 백제의 초대왕으로 추정했다.
소서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하남에 나라를 만들고 여왕으로 백제를 다스렸다는 주장이다.
고구려 졸본을 떠날 때 수많은 백성이 따른 것은 어린 비류나 온조를 따라 나선 것이 아니었다.
왕비이며 계류의 수장이었던 소서노를 따른 것이다.
소서노 일행이 하남에 정착해 나라의 기틀을 만든 후 아들 비류와 온조에게 각각 관할을 맡겨
다스리다가 나라 세운지 13년 되는 해에 소서노가 61세로 죽는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소서노가 죽고 정변이 있었다.강력한 통치자가 사라지자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세력이 커진 온조가 비류를 흡수했던 것이다.그리고 온조는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위례성에 궁궐을
지어 왕의 위엄을 보인다.소서노 사후 4년에 소서노 사당을 세우고 국조(國祖)에게 드리는 제사가 바쳐지면서
국조 제사는 백제의 주요한 국가 제사가 된다.온조는 백성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국조 소서노를 신격화하고
사당을 만들었다.
논리적인 역사 흐름으로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한 시조왕이기도 하고 그 이름도 그가 왕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소서노는 한자로 召西弩라 쓰고 있다.소서노(召西弩)의 소(召)가 신녀(神女)를 뜻하고노(弩)는 '쇠뇌'이니 장군의
의미를 뜻한다. 소서노는 한 무리를 이끄는 통치자 신녀라는 뜻이다.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스릴 때 소서노는 고구려의 왕비이면서 또한 신녀로서 고구려 백성의 정신을
다스린 것이다.고대 사회는 제정일치 시대였다.나라의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었다.제사가 백성을 다스리는데 주요한
도구였다.
백제에서도 소서노는 백성을 정신적으로 이끄는 신녀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제정일치를 이루고
백제를 경영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