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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잠실

송파(松坡)유래비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4.03.10|조회수243 목록 댓글 0

 

"...우리의 조상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강유역 지금의 롯데월드 중심지역에서
선사시대부터 송파진에서 270여호가 삶에 터전을 잡아 살았으며
삼남(충청 영남 호남) 지방과 서울(한양)을 이어주던 조선 후기의 송파나루터로 유명하다.
송파5일장은 전국에서 우마가 줄지어 모여들어 도성의 문물을 실어나르느라 분주하였고
한강에 황포돛배는 줄을 지어 오르내렸고 정월과 7월이면
보름달아래 송파장에서 백중놀이 가무를 즐기는 멋을 알았으며
송파산대놀이 무형문화재 제 49호로 지정받아 지금도 한국가면극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송파장에서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1925년 을축년 7월 대홍수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가락리 410번지 일대로

이주하여 면소재지로 크게 번창하였다. "

송파마을은 원래 광주군 동부면 선리(船里)에 있었다.
어느 때인가 홍수로 현재 암사동인 '바윗절벌'의 독포(禿浦),
 곧 미음(美陰) 혹은 하진참(下津站)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인조 25년(1647)과 조선말기 순조 23년(1823) 때 큰 홍수를 만나
다시 수재를 입자, 석촌호 남쪽인 삼전도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송파에는 군사상 요충지로서 한강변의 5진(五鎭)의 하나로
송파진이 있어서 삼전도별장 대신 송파별장을 두었다.
송파는 한강 남쪽의 나루터로서 유명하여 서울에서 판교,용인,충주로 가려면 살곶이다리를 건너
뚝섬나루, 자양동에서 잠실섬을 거쳐 송파진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룻배로 건넜다.
이곳이 나루터로 활용된 것은 세종 21년(1438)에 교통의 편의를 위해 신설되었다.

선리(船里)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 '가래여울"라고도 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울 강동구 강일동에 속한다.

1971년부터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옛 모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상수원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등으로 묶여 마을의 변화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주민 30여 가구 중에 4~5집은 매운탕 식당을 운영하고 나머지는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고 한다.

선리는 1925년 이전에는 아주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당정섬과 미사동 사람들이 둔지섬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배 ‘선(船)'자를 따서 선리(船里)라 하였다. 담양 전씨(潭陽田氏)의 집성촌이다.
둔지 둔지섬은 선사시대부터 주거지로서는 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섬이 퇴적토이기 때문에 토심이 깊고 부식토라 농사도 잘 되었다. 또 강이 있어 고기잡이 하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가 정박하기에 좋아서 광주관아로 운반되는 군량미 등을 이곳에 하역하여 다시 육로로 운반하였다. 이렇듯 포구역할을 하던 이곳에 자연히 장사꾼이 모이고 장이 서게 되 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모일 ‘둔(屯)'자를 써서 둔지라 하게 된 것이다. 1972년 홍수에 의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그외 미음나루는 강 건너편에 있어야 하는데 지도상에 잘못 기재 되어진 것 같다

가래여울 남쪽엔 '강매(江梅)'란 사람이 살았다는 강매터 마을과 한자로 '두정곡(斗井谷)'이라 했던 '말우물' 마을이 있다.
말우물은 구식 말(斗)의 모양과 같은 네모진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가래여울'은 원래 한강으로 흘러드는 두 여울이 갈라져 흐르는 곳이어서 그렇게 불러 왔다.
여기서의 '가래'를 '가래나무'로 보아 이 곳의 한자식 이름을 '추탄(楸灘)'이라 하였고, 이 곳의 마을 이름까지 그렇게 불렀다.

'가래여울' 마을은 줄여서 '가려울(가래울.갈여울)'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 역시 남평(南平) 문씨(文氏)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이 가래여울 마을에는 조선 인조 때 영의정 오윤겸(吳允謙;1559∼1636)이 살면서

이 곳의 땅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추탄(楸灘)'이라고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오윤겸은 당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선조조 별식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문학 이조좌랑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한 때 스승인 성혼(成渾)이 모함을 받아 사직하기도 했으며 정인홍(鄭仁弘) 등을 탄핵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9년에 첨지중추부사로 서 회답사가 되어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3백 20여명을 데리고 오는 활약을 보였다.
이때부터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었다고 한다.
그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탄핵받았고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인조반정후 서인이 분열될 때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괄의 난 때는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에는 왕세자와 함께 강화에 피난하였다.
돌아와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인재등용을 공정히 하는 명재상으로 이름이 났다.
그의 조카 오달제(吳達濟: 인조, 부교리), 손자 오도일(吳道一:숙종, 대제학, 병조판서),
현손 오명항(玄孫 吳命恒 : 영조, 우의정) 등도 우뚝한 인재들이다.
오달제는 유명한 '병자척화삼학사(丙子斥和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청군과의 화해를 끝까지 반대하다

청군에 끌려가 적장 용골대의 온갖 공갈 ·협박 ·설득에도 굴복하지 않고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오윤겸은 사림을 아끼고 보호함으로써 세간으로부터 어진 재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시문에 능했다. 그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楸灘文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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