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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잠실

수어장대 큰 바위 장군바위의 사연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3.21|조회수263 목록 댓글 0


수어장대 담장 동남쪽에 있는 큰 바위이다. 매바위 응암 또는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그 바위에는 守禦西臺라고 새겨져 있다. 이 매바위에는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다.
남한산성 축성의 총책임을 맡은 수어사 이서(李曙)는 이회(李晦)와 벽암대사에게
각각 동남성과 서북성을 쌓도록 구역과 기한을 정해 주었다.
이회는 그 날부터 낮과 밤, 일심으로 오로지 축성에만 노력한다.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고 성 쌓은 일에 몰두하였다. 축성 자금이 부족하였다.
자기의 사재까지 털어 공사에 전부 던졌다. 자금은 부족해서 공사는 하루 이틀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벽암스님의 공사는 착착 진행이 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다.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은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회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된다.
 "이회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
이회를 모함하는 소리가  관가에 알려진다.
관가에서는 그를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에 처한다.
 “내가 죽는 순간에 매가 날아 올 것이니, 만약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나의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요, 매가 날아온다면 내가 죄 없음을 알라”
형을 집행하기 전에 이회는 당당히 말한다.
윗자리에 앉은 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뻔적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회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 때 피가 흐르는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서 이회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이상하여 그 매가 앉아 있던 바위로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 후에 사람들은 그 바위를 '매바위' '응암' '장군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 잠실 새내 내력비와 함께 잠실부군당 유래비가 근린공원 안에 설치되었다.

이회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인 유씨 또한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던 길에

막상 한강을 거슬러 삼전도에 이르렀을 때, 천만 뜻밖에도 남편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기가 막힌 송씨 부인은 상심해 통곡하다가 끝내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집어던지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때 송씨 부인이 자살하면서 한강에 쌀을 버린 곳이라 해 그곳을 ‘쌀섬여울’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씨가 죽은 뒤로 안개가 자욱한 날이나, 해가 질 무렵 날이 어둑어둑할 때 쌀섬여울을 지나는 뱃사공들은 여인의 곡소리가

들리거나, 머리를 푼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공들은 이 환영(幻影)에 이끌려 배를 몰다 한강변에 어린애 같이 생긴

무동도(舞童島) 바위섬에 배가 부딪혀 파선되곤 하므로,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 쌀섬여울(일명 米石灘) 가까운

강변에(잠실동 313-1번지) 부군당(府君堂)을 세우고 송씨 부인의 제사를 지냈다.
이 부군당은 1971년까지도 있었는데 한강 개발사업으로 인해 한강의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쌀섬여울에 전해오는 슬픈 이야기는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전설’ 못지않은 슬픈 감회를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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