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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잠실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 새로 쌓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3.10|조회수298 목록 댓글 0


한양으로의 천도와 임진왜란등의 전쟁을 통해 방어의 기능을 하는 성(城)의 필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에 청나라 침입을 대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에 이른다. 그 후 이괄의 난을 치루고 후금의 위협이 급박하여

인조2년 (1624)  수어사 이서(李曙)에게 명하여 수축케하였다.
벽암 각성대사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팔도 승군을 동원하여 축성공역에 임하였으며 2년만인 인조4년 (1626)에 준공되었다.
남한산성의 대부분의 건물은 이 시기에 완성 되었으며 지금 남아 있는 성곽의 모습도 인조때 쌓은 산성의 모습이다.
인조 14년(1636년) 청태종의 침공으로 인조대왕은 이곳으로 피신, 45일간 항전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더욱더 남한산성의

중요함을 깨달은 조정은 계속해서 산성을 고치거나 새로 쌓았다.
조선시대 남한산성 수축은 오랜 시간 동안 지루한 논쟁을 거쳐 이루어진다.
조선 초기부터 남한산성 축성문제가 거론되었다.광해군대에는 본격적인 축성논의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인조대에도 수차에 걸친 축성 시도가 있었으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도성방어대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었으나 후금과의 긴장관계 고조로 전쟁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남한산성 수축이 결정되었다. 이처럼 성을 새로 쌓거나 수축하는 일은 엄청난 국가적 역량을

소모하게 되는 거대한 토목공사였으므로 많은 논란 속에서 신중하게 추진되었다. 남한산성을 전면적으로 수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장성 성벽의 70% 정도가 이미 붕괴된 상태여서 그대로는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을 제외한 중심성을 원성(元城)이라고 한다.
원성의 범위는 대체로 신라의 주장성과 인조 대에 수축한 남한산성이 상호 겹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축조과정(築造過程)을 보면 남문과 북장대(北將臺)를 기준으로, 동남성(東南城)과 서북성(西北城)으로

구분하여, 동남성은 축성의 총책임자(總責任者)인 이서(李曙)의 휘하 장수인 이회가 맡았으며, 서북성은 도총섭(都摠攝) 벽암대사

(碧巖大師)의 책임 하에 승병(僧兵)들이 맡아서 쌓았다. 본성은 청량산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은 줄기의 여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나간 자연지형(自然地形)을 이용하여 주로 능선(稜線)을 따라가며 축조하였다. 해발 497m인 청량산의 외곽을

감싸 안으며 해발 484m 지점의 등고선을 따라가며 돌아나가다가 북쪽으로 거의 일직선상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가

해발 450m 지점에서 서문을 이룬다. 

이곳에서 다시 56m 정도 올라가 능선을 따라 돌아가며 24.6m 정도 돌출하여 각루의 형태를 이루고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북의 주능선(主稜線)에서 갈라지는 지점에 연주봉옹성(連珠峰甕城)이 축조되어 있다.

체성 벽에는 연주봉옹성으로 나가는 암문이 조성되어 있다.

북장대지(北將臺址)를 지나 경사가 완만한 사면을 따라 약간 만곡하는 해발 367m 지점에 북문이 있다.
북문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상사창동(上司倉洞)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은 수운(水運)을 통하여 운반해 온 세미(稅米)를

등짐으로 산성까지 나르던 주된 통로(通路)였다. 북문 동편은 동쪽으로 뻗어나가며 북문의 옹성과 같은 기능(機能)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문에서 지형에 따라 약간의 굴곡(屈曲)을 이룬다.

큰 고저차가 없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동서방향으로 800m 정도 연결된다.

제3암문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502m 지점에 동장대가 있다.

동장대는 능선 정상부의 평탄한 지세를 이용하여 남쪽에 2m 정도의 축대(築臺)를 쌓아 구축하였다.

현재는 누각(樓閣)의 흔적(痕迹)으로 보이는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원성은 동장대를 정점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 다시 남하(南下)하기 시작한다.

동장대에서 남쪽으로 약 238m 거리에 이르면 능선은 완경사 평탄면을 이룬다. 이곳에는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음직하다.

성벽에는 평탄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밖으로 배출시킬 수 있도록 수구(水口)를 설치하였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을 지난 성벽은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약간 만입(灣入)하며 경사면을 따라 내려와

능선의 말단부(末端部)에 이르면 능선을 따라 굴곡을 이루며 돌아가고, 장경사가 있는 곳을 향하여 크게 안쪽으로 굴곡이 진다.

장경사(長慶寺)가 있는 곳은 두 능선 사이에 구축된 곡저부로 계곡에서 흘러내린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를 배출시키기 위해

성벽에 비교적 큰 수구를 설치하였다. 내만한 성벽은 다시 남쪽 능선의 말단부를 따라 돌아간다.

이 지점에 제1암문이 조성되어 있고, 암문에 인접하여 두 개의 수구가 구축되어 있다.

국가 사적 57호인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1,700여개의 성 중에 제일 크다.

본성과 외성(봉암성-한봉성), 신남성을 중심으로 총연장 11.755㎞에 이르며 인조 2년(1624년)에 착공해

4년에 완공한 이후 전란을 겪으면서 약점을 보완, 기능 면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구조를 갖춘 성으로 평가된다.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국가적 대성은 흔치 않다는 것이다.
전보삼 신구대 교수는 "남한산성은 고대 성의 축성법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선 후기 숙종-영조조의 근대적 축성법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성곽의 백과사전"이라며 "화포의 발달에 따라 성을 쌓는 기술의 다양한 변천을 모두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성곽이 갖는 구조인

성문, 여장, 암문, 치, 포루, 돈대, 장대, 옹성 등 여러 가지 모양과 기능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도 남한산성의 특장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은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고급문화는 성에서 나온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이런 점을 도외시하고 남한산성을 '치욕의 역사 현장'으로만 각인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다.
전 교수는 "성곽에 대한 인식 부족과 남한산성에 대한 왜곡은 일제에서 비롯됐다"며 "식민지적 상처가 이제껏 치유되지 않은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라고 주장한다.
일제는 산성 안에 있던 광주군청을 지금의 경안으로 이전, 한때 1,000호나 되던 이곳을 70~80호의 벽지로 전락시켰다.

항일 의병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기 위한 계산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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