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1919) 겨울 옥고를 치르고 난 나는(심훈)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을 하고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탈주하였다.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두류하며 연골에 견디기 어려운 풍상을 겪다가 수삼차 단재(신채호)를 만나
그의 우거에서 며칠 저녁 발치 잠을 자면서 가까이 그의 모습을 접하였다.
감명 깊은 그의 말씀도 여기서는 약 할 수밖에 없다.
…북경서 지내던 때의 추억을 더듬자니 나의 한평생 잊히지 못할 또 한 분의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그는 수년 전 대련서 칠십 노구로 쇠창살에 갇히어
이미 고인이 된 우당(이회영) 선생이다.
나는 맨 처음 그 어른에게로 소개를 받아서 북경으로 갔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 보지 못하던 19세의 소년은 우당장과 그 어른의 영식인
규룡 씨의 친절한 접대를 받으며 월여를 묵었다.
조석으로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북만에서 고생하시던 이야기며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는데,
선생은 나를 막내아들만치나 귀여워해 주셨다.”
-<심훈전집>에서
심훈은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3.1독립혁명에 가담하여 3월 5일 체포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같은 11월 6일 집행유예로 출옥된다.출옥 후 1920년에 심훈은 문학수업에
전념하면서 한글학자 이희승에게 한글을 배운다.
심훈은 한때 일본 유학을 고민하다 결국 중국 망명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하고 만주 봉천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한 것이다.
중국으로 망명해 애국지사 이회영 이시영 엄일파 염은동 정진국 등
여러 애국지사들과 수 개월간 교우하며 1921년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등을 거쳐 항저우(항주) 치장(之江)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나는 맨 처음 그 어른에게로 소개를 받아서 북경으로 갔었다."
맨처음 인용한 글의 일부다,
여기서 그 어른은 우당 이회영을 가리킨다.
심훈은 중국행에는 우당 이회영의 영향이 컸다고 밝히고 있다.
우당 이회영 집에서 2개월 여를 지낸다.
우당 이회영은 1930년대 초반까지 국내와 만주.중국본토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하며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한 애국지사다.
민족주의와 학구열이 왕성한 19세 심훈과 인격과 학식을 갖추고
민족독립운동을 위한 다양한 대안을 갖고 실행하고 있는 53세의 완숙한 경지에
달한 우당 이회영과의 만남은 훗날 심훈이 민족적 애국주의 시와 농민소설을
집필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토양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심훈은 중국에서 우당 이회영과 단재 신채호와을 만난 것이다.
이 시기 단재와 우당은 일제와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는 절대독립론,
독립운동 방략으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나와 북경에서 '천고(天鼓)'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임정의 외교 독립운동노선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 분들과의 만남은 심훈에게 절대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시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청년 심훈이 일제와의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민족독립을 부르짖는
주옥과 같은 항일 문학작품을 남겼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심훈이 북경에서 상해로 이동하는 과정이 그의 경성고보 동창인 박헌영의 동선과 겹친다.
그리고 상해 시절 그가 여운형과 밀접한 교류를 나눈다.
여기서 심훈의 중국행이 단순한 유학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심훈은 상해, 남경 등을 거쳐 절강성 항저우(杭州)의 치장(芝江)대학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학하였다.
지강대학 유학 중, 특이한 점은 연극에 관심이 컸다는 것이다. 이는 1923년 중국에서 귀국한 선생이
최승일, 나경손, 김영팔, 임남산 등과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아마도 연극이 갖는 역동적인 대중 호소력에 끌렸던 것 같다.
1927년 그는 직접 각색, 감독하여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만들고, 또 자신의 대표작인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한 일도 같은 이유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심훈이 프랑스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중국 항주에 있는 지장대학에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는 엄항섭 등과 함께 공부하게 된 것도 두 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암(醒菴)의 소개로 수삼차 단재를 만나 뵈었는데 신교(新橋) 무슨 호동(胡同)엔가에 있는
그의 우거(寓居)에서 며칠 저녁 발칫잠을 자면서 가까이 그의 성해(聲咳)를 접하였다."
-심훈전집에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의 책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성암은 이광(李光)으로
이회영과 아주 가까운 혁명동지라고 소개한다. 이광은 일본 와세다대학과 중국 남경의
민국대학을 졸업하고 신민회 회원이었다고 한다.그
는 이회영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한 가까운 동지였다.
이광은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북경 주재 외무위원을 겸임하며
한중 두 나라의 외교적 사항을 처리할 만큼 중국통이었다.
심훈은 신채호가 일제경찰에 잡혀 여순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 생각>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고, 단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6년 전 만났던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단재와 우당>이라는 수필을 남기기도 한다.
심훈은 단재의 순국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에게 위로와 당부의 말을 전한다.
“수범아, 나는 오늘 신문을 보고서야 네 이름을 알았다.
네 나이 어느덧 열여섯이니 지각이 날 때가 되었구나.
수범아 너무 서러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뼈와 핏속에
너의 어르신네의 재(才)와 절(節)이 섞였을 것을 믿는다!”
1923년 귀국할 때까지 심훈은 3년여 정도 중국 등지에 머문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뿐만 아니라,
여운형, 박헌영 등과도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여운형과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심훈은 중국에서 이들과 교류하면서 혁명의 꿈을 키웠던 식민지 청년이었다.
그에게 이 시기는 서구적 근대와 제국주의적 근대의 모순 속에서 올바른 사상과
독립의 방향을 찾아가는 의미있는 성찰의 기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그의 시 <상해의 밤>은 당시 심훈의 복잡한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시 상해로 이주한 식민지 청년과 지식인들의 비판적 현실인식과 내적 고통을
잘 그려내고 있는 <상해의 밤>이다. 여기서 이 시를 음미하려고 한다.
상해의 밤
-심 훈-
우중충한 <농당弄堂> 속으로
<훈둔> 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승그린 연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판 두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한 듯 상해의 밤은 깊어 가네.
발 벗은 소녀,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푼 호궁胡弓에 맞춰 부르는 맹강녀 노래
애처롭구나 객창에 그 소리 창자를 끊네.
사마로 오마로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人肉의 저자
침의浸衣 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야아지>의 콧장든이엔
매독이 우글우글 악취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잔을 기울여
걷잡을 길 없는 향수에 한숨이 길고
취하고 취하여 뼛속까지 취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인 듯 휘두르다가
채관 <소파>에 쓰러지며 통곡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한 혁명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 망명객의 심사를 뉘라서 알고
영희원影戱院의 <산데리아>만 눈물을 짓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