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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6.25 한국전 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사람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11.02|조회수808 목록 댓글 0


1951년 9월 17일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은 남부군 5백명과 지방 빨치산 등을 합쳐 총 8백명을 이끌고 거창 지서를 습격한 후
가야산 능선을 타고 해인사 백련암을 점령하였다. 당시 해인사의 효당 주지스님은 미군과 정부군이 남부군과 빨치산 토벌을

위한 명분으로 해인사를 폭격할 것을 우려하여 이현상과 독대하여 해인사를 곧장 떠날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결과 남부군이

퇴각하여 해인사를 폭격에서 지켜냈다고 한다.마침 해인사 약수암에는 북경대학 영문과를 나온 운용이라는 행자가 입산해 있었다.
주지스님이 그를 불러 해인사 구광루 지붕을 덮도록 큰 광목천에 영어로 'HAEIN TEMPLE' 글씨를 크게 써 지붕을 덮도록 했다.

이현상의 남부군과 빨치산들이 해인사를 침범했다는 정보를 접한 미군은 사천에 있는 공군 제10 전투비행단에 해인사 폭격을

지시했다고 한다. 임무를 하달받은 해인사 폭격 비행단장은 김영한 공군대령이었다.김영한대령은 해인사 상공에서 영문글씨를

확인하고 두차례 선회한 후 인근 고운동계곡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어 그곳을 불바다를 만들고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김대령은 명령 불복종으로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효당 주지스님과 용운행자,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 그리고 김영한 공군대령 4명이 각각 다른 위치에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것이다. 해인사 일주문 앞에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서 있다.
비문은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로 시작한다.

비문은 첫 줄부터 장엄하다. 김영환(金英煥, 1921~1954) 장군이 어떻게 '팔만대장경'을 '수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불멸의 위업'을 이룩했는지 저절로 궁금해진다.
비문의 마지막에 새겨져 있는 시를, 원문의 표기와 띄어쓰기 그대로 읽어본다.
호국하온 민족혼인 고려팔만 대장경판국
난중에 호국하고 재난에도 호민했네
6.25의 위기 맞아 김장군이 지켰으니
호국장군 아깝게도 서른세살 젊은나이
순국으로 산화하니 짧은시간 굵게살다
가야산이 변함없듯 동해바다 고갈되고백
두산이 마멸되나 위대하신 그이름은
이나라와 함께하여 영원토록 빛나리라


1951년, 지리산 지역에서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주축이된 7천여명의 무장공비들 (일명 남부군)이 활개를 치면서

전선에서 떨어진 후방지역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를 중심으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공비토벌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일선부대와 달리 무장이 빈약했던 경찰부대는 무장공비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토벌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1951년 여름이 지나면서 지리산일대의 공비를 하루빨리 토벌해 전선 후방을 안정시켜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자
이 작전을 공중지원하기 위해서 한국공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한국공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획득하자마자

사천비행장을 근거지로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1951년 8월 19일부터 한달여의 기간동안

항공지원을 실시했다. 이 지원작전은 비록 전선에서 떨어진 후방지역의 게릴라들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야할 한국공군 조종사들에게는 공지합동작전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중에서도 거의 3년내내 무장공비들과 경찰병력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초토화된 대표적인 격전지인 지리산일대의 지역에서 가야산 해인사에 봉인되어 있던

민족의 소중한 유산 팔만대장경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팔만대장경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공군 지휘관의 명석한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지리산 일대의 항공지원작전에는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공군 유일의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가

맡도록 되어 있었으며 미공군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정찰기와 연락장교를 파견해서 한국공군기들이

작전지역 상공에 진입하기전에 미리 지상의 동향을 살피고 진입하면 공격목표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작전권을 획득하기는 했으나 사천기지에서 강릉기지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아직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바우트원 대대 소속의 미공 군사고문단의 도움과 지시를 많이 받고 있었다.)
온국토가 초토화되었던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나무로 만든 팔만대장경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일화에 대해서는
1979년 12월에 발간된 공군 퇴역 장교들의 소식지인 '보라매 얼'이라는 책에 수록된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기사는 전쟁 당시 김영환 대령 휘하에서 작전을 했던 편대원 서상순 중위 (당시계급)의

'가야산 해인사 중심의 공비토벌기'라는 수기로서 해인사를 둘러싼 일화가 잘 나타나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이후 1989년 월간항공 12월호에 게재되어 민간에도 알려진적이 있으며

이후에도 불교기관지등에도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적이 있으나
이렇게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으로 판단되어 '보라매 얼'에 실렸던 서상순중위의 수기내용을

 간추려 불타는 하늘에 올려보고자 한다.

- 가야산 해인사 중심의 공비 토벌기 (서상순 중위) -
그해 12월 18일 있었던 일이다. 며칠 계속되어 내린 진눈깨비로 공기가 습하고 지리산 높은 골짜기마다 안개구름이깔렸으나
동쪽 아롱산 능선 사이로 눈부신 아침 해가 밝아와 그동안 피로를 푼 전투조종사들은 마음대로 푸른 하늘을 날며
종횡무진 곤두박질치며 마음껏 때려부수고싶은 감정에 설레었다. 6시 30분 아침식사가 끝났을 때
벌써 작전참모 장지량 중령이 직접 적정을 공중정찰하고 돌아와 '찌르릉' 하고 긴급출동을 알리는 비상벨이 울렸다.
아직까지 전례로 보아 우기에는 아군이 불리하고 맑은 날에는 승전하였으며,
또 야간에는 적이 활기를 띠고 주간에는 아군이 전승하였으니까 말이다.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나에게도 출격명령이 내렸다. 얼마 뒤 우리 편대기들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다가 비행지휘관 김영환 대령이

인솔하는대로 함안 상공에서 기수를 산악지대로 돌려 얼마 안가 협천 상공 8백feet에서 '모스키토' (미 5공군 정찰기명)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았었다. 우리 4기 편대는 김대령의 1번기, 2번기가 강호륜, 3번기가 박희동, 4번기가 필자 등 강팀이었다.
정찰기의 훈령은 가야산 동남으로 산줄기와 산줄기, 계곡과 계곡 사이로 조그마한 냇물이흐르는데 그 중 한 능선이 흐르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울창한 산림을 이루어 삼태기 모양의 형국 안에 온화하게 보이는 분지에 소복히 내려다 보이는 사찰과

인근의 소굴을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이다.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38호기가 정세를 일독하고자 '모스키토'의 뒤를 따라 계곡으로 급강하하였다.
그러자 사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황히 숲속으로 도피하는 모습, 잘 위장된 참호며 능선을 따라 곳곳에 구축된 진지 등
 공비들의 불야성이라 할 수 있었다. 계곡 동쪽 신작로를 따라 긴 언덕 위에 아군임을 알리는 주홍색 T자형 대공포판이 깔렸는데
그 곳에 진을 친 지상군이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우리들은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 50 기관총 1,800발씩 장비하였고

기장만은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바로 해인사 큰절 마당에 떨어져 백색 연막이 선명하게 목표를 가리켰다.
네이팜탄 한발이면 온 사찰을 잿더미로 바꾸고 각기의 무장으로 공비의 소굴을 뿌리뽑을 수 있어

우리들의 마음은 전의에 부풀었다.
이윽고 편대장기가 급상승 선회하며 요기에 명령했다.
"각 기는 편대장의 뒤를 따르되 편대장의 지시없이 폭탄과 로케트탄을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소사공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명령대로 교묘히 위장된 적의 아지트를 찾아 소사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산정에서 계곡으로 마침내 궁지에 몰린 적이 우왕좌왕하고 사찰 주변으로 몰리며
숲 사이에서 최후 발악인 양 우리들에게 지상 포화를 퍼붓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 또 다시 정찰기에서 독촉훈령이 라디오를 통해 내렸다.
"해인사를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잠시후 사찰이 불바다가 될 것을 생각하자 통쾌감마저 앞섰다.
"편대장님, 많은 적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공격하자고 재촉보고를 하였다.
"각 기는 공격을 하지 말라."
대장님의 날카로운 명령이 다시 라디오를 통해 들렸다.
"라져, 라져.(알았습니다)"
하고 또 명령에 따르자 일렬종대로 해인사를 향해 동에서 서로 법당 용마루를 지나면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의 간판도

똑똑히 보였다. 숲 속에 많은 적이 모여 앉은 것을 보고 얄미워 로케트탄의 세례를 퍼붓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급상승 선회하다가 그뒤 해인사 뒷산 몇 개의 능선을 넘어 폭탄과 로케트탄으로 적을 공격했다.
그날 저녁 일이다. 미 공군 고문단의 한 장교가 공지합동작전본부 소속의 장교를 대동하고 왔는데 편대 전원이 전대장실에 모였다.
냉랭한 분위기속에서 공지합동작전에서 왔다는 소령이 자신이 오늘 가야산 목표를 유도한 정찰장교였다고 소개하므로
나는 오늘의 명령불응을 직감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저에게 불찰이 있었습니까?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김영환 장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니요,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고 묵직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네.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왜 제가 공격을 중지하고 귀대하라고 훈령하였는지 아십니까?"
"……"
김대령님의 온화한 눈초리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령께서는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시하였겠지만 그것은 사찰이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찰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김대령님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지요.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할 것이야 없지요.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공비란 어디까지나 유동물(流動物)입니다. 그들은 일정한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있으며,
일단 그 지역에서 몰아내도 다시 침입해오는 것이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지리산 지구가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요, 낮에는 대한민국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김대령님은 공비들을 언제까지나 방치해 두자는 것이 아닙니까?"
"천만에… 해인사 일대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그들은 현 정황으로 장기간 유지해 나갈 수 없는 독안에 든 쥐입니다.
해인사는 단지 놈들이 지리산 근거지로 통하는 통로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국보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인 문화재입니다.
가야산에 출몰하는 공비 몇 백명을 살상하였다 해서 전쟁을 판가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절은 1300년의 역사가 있고 고려 고종 24년에서 38년, 15년에 걸쳐 8만여면에 달하는 대장경을

판각해 (750년전) 봉인한 것으로 우리나라 국보사찰입니다.
소령께서도 가장 가까운 예로 2차 대전때 유럽의 파리와 일본의 경도를 폭격하지 않은 실정을 아실 것입니다.
그 처참한 대전에서도 이 도시들은 총탄 한발 맞지 않고 오늘도 그대로 인류의 귀중한 문화재로 남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공중 공격을 받고 사찰로 모여든 사람들은 반드시 무장공비만이 아니라 납치되었던 양민들이
공습을 틈타 적에게서 벗어나 대피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지상군의 보고도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나는 과연 편대장님의 판단이 정확한데 또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미군 소령은 얼굴에 누그러진 미안한 빛을 띠우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동자세를 취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하며 이해와 존경을 표시했다.
"김영환 대령님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신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김영환 대령님과 같은 상관을 모시고 활약한 결과로 오늘날 고려 팔만대장경을 살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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