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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사육신 묘에 모신 사칠신(死七臣)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12.23|조회수875 목록 댓글 0


사육신 묘에는 일곱 분을 모셨다. 매월당 김시습이 성승,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는 찾을 수 없었다. 네 분의 묘만 남았는데도 사육신묘라고 불리다가 사육신공원 성역화사업이 시작되면서 나머지 세 분인 하위지의 묘는 선산(善山)에서 이장하였다. 류성원의 묘도 새로 꾸몄고, 김문기의 가묘(假墓)도 함께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년 기록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박팽년을 비롯한 성승·등의 이름이 보인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김문기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렸다.

사육신의 가족들은 남자는 모두 죽였고 여자는 노비(奴婢)로 끌려갔다.
동쪽으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 이개·유성원·성삼문·하위지 등 일곱 분의 묘를 차례로 모셨다.

1977년 가묘로 모신 김문기(金文起)의 묘다. 묘비는 金氏之墓 이렇게 적고있다.

그는 단종복위운동에서 병력동원의 책임을 맡았던 것이라고 국사편찬위원회는 밝혔다.

朴氏之墓, 박팽년(朴彭年)의 묘비이다. 당시 형조참판이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뛰어 들어 자살하려고 했다.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하여 단념하고 이때부터 단종복위운동을

계획 실천한다. 세조는 배신자 김질(金瓆)을 감옥으로 보내 자신에게 귀순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자 시 한 수를 남기고

이를 거절한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兪氏之墓, 유응부(兪應孚)의 묘비이다. 그는 단종복위운동에 행동대장이었다.

명나라 사신 환송연에서 유응부는 별운검(別雲劍)을 서면서 세조를 살해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명희의 재치로 별운검은 제폐(除廢)되었고 세자도 질명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응부는 계속 거사를 밀고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성삼문 박팽년은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뒷날을 기자리자고 하였다. 세조가 직접 그를 국문하면서 벌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세조: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느냐?

응부: 명의 사신을 초청하는 연회에서 내가 한자루 칼로써 족하(足下)시켜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의 배신)에게 고발당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여주오.

세조: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으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 아닌가?

유응부는 세조를 족하(足下)라고 불러 화를 북돋군다. 족하(足下)는 동년배나 대등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다.

세조는 화가 치솟아 달군 쇠로 유응부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유응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땅에 집어 던지며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라고 호통을 쳤다. 유응부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는다.

李氏之墓, 이개(李塏)의 묘비이다. 고려 후기 대학자 이색의 증손자이다. 그는 단종복위운동을 가장 먼저 주장하였다.

세조는 이개의 숙부인 이계전(李季甸)과 친분이 두터워 이개의 목숨만을 살리려고 하였다. 그를 통해 회유하였으나 이개는

이를 거절하고 의연히 처벌을 원하였다.

柳氏之墓, 유성원(柳誠源)의 묘비이다. 수양대군은 황보인 김종서를 살해하고 정권을 찬탈한다.

유성원은 이때 세조의 협박에 의해 정난(靖亂)의 공신들을 녹훈(祿勳)하는 교서(敎書)를 쓰게 된다.

유성원은 이를 내내 부끄러워하다 사육신의 모의에 가담한다. 그는 사육신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집으로 간다. 부인과 마주 앉아 술을 나눈 후 사랑채로 가서 조상께 절하고 스스로 칼로 찔러 자결했다.

成氏之墓, 성삼문(成三問)의 묘비이다.

"태어났느냐?"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름을 삼문(三門)이라고 했다. 성삼문이 37살 때 죽으면서

아버지 세 동생 네 아들이 모두 죽는다.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긴다.

형장의 북소리는 죄인의 생명을 재촉하고
(擊鼓催人命)
머리들어 석양을 보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回首日欲斜)
황천 가는 길에 주막조차 없다는데
(黃天無客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今夜宿誰家)

그는 새남터에서 끔찍하게도 거열형(車裂刑)으로 죽는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팔다리를 각각 묶어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거열형이다.

河氏之墓, 하위지(河緯地)의 묘비이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한다.

세조의 녹(祿)를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그 해부터의 녹(祿)은 취하지 않고 별실에 모아두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그가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대궐 앞을 지날 때에는 항상 말에서 내렸으며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을 가지 않았다."-남효온의 <추강집>에서

남쪽 관악산에서 치고 달려오는 용맥이다. 길을 내고 집을 짓느라 용맥은 잘린다.

안산을 찾으려 두리번 거렸으나 아파트와 대형건물 등이 앞을 가려 안산을 찾기란 참 어려웠다.

“대역죄로 처형당한 분들이어서 아무렇게나 용사되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괜찮은 자립니다.
전체 형국으론 묘 뒤의 만두가 잘 형성됐고 국립묘지 쪽에서 뻗은 내룡맥이 제대로 응결되었어요.
그러나 명당이면 뭘 합니까. 묘역을 돌볼 혈손이 끊어졌는데…. 풍수로 전국을 다니다 가도 이런 자리에 서면
가슴이 미어지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지요.” -풍수학자 윤갑원 교수-


한남정맥의 산줄기가 관악산에서 한 줄기는 동쪽으로 우면산과 매봉을 지나 봉은사를 품은 수도산(修道山)에서 봉긋 솟았다가

한강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다른 한줄기는 북쪽으로 뻗어 남현동과 봉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까치고개를 지나 숭실대학교에서

총신대학으로 넘어가는 사당이 고개를 거쳐 서달산에서 힘껏 솟구치고 있다.

그 여맥(餘脈)은 동쪽으로는 반포천(盤浦川) 끝자락에 닿아 있는 갯말산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북쪽으로는 비개고개를

지나 십용사기념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서쪽으로는 달마사(達磨寺)와 중앙대학교를 품고 상도터널 위를

 지나 본동사무소 뒷산인 안산에서 도로를 건너 사육신공원이 자리한 봉우리에서 한강으로 숨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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