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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노들나루 노량진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4.02.16|조회수521 목록 댓글 0

 

그 옛날 노들나루의 빛바랜 사진이다.

노량진이란 이름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이다.
노도진, 노량진도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다.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예로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고도 불리웠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 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특히 상류의 한강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나루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유진하는 진을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나룻배가 10척이 있어서 도선료를 받고 행인을 건네주었다.
태종 4년(1414)에 광진과 더불어 이곳에 관리자로서 별감을 파견하고 관에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관선 15척을 배치하여 진에 소속된 진부들로 하여금 도선료를 받지 않고 건네주게 하였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 있었으며, 세금을 거추는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 사촌리, 곽계, 형제정계, 마포강이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이란 여관이 있어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하였다.
나루 북쪽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었다.이름하여 새남터라 하였다.일찍부터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나루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처형과정을 보임으로써 경계심을 갖도록 한 조치였다.
일찌기 세조 즉위에 반대한 사육신이 여기에서 처형되었고 근세에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철교가 선설되기 이전에는 이 지역에 설치된 노량진역이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철교가 세워진 뒤에는 경부선 및 전철 제1호선 등이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에 속하였다.
1895년에는 인천부 과천군에, 1914년에는 시흥군에 속하게 되었다.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에 속하였으며, 영등포구역소를 거쳐 1946년 영등포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73년 관악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동작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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