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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동재기나루 동작진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4.08|조회수845 목록 댓글 0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근처 한강 남안에 있었던 나루터 동재기나루이다.

일명 ‘동작진(銅雀津)’  ‘동작도(銅雀渡)’라고 하였다. 이 동재기 나루터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천·수원·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거나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 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수천 입구에 해당하는 동작진은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위에 모노리탄(毛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있었다.

이곳은 인근 노량진 관할하에 있었는데, 호남·호서 지방의 과객(科客)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나

사선(私船) 몇 척만이 운용되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한강의 각 나루도 규모와 위치에 따라 구분되었다.

한강진·노량진·양화진은 가장 중요한 나루로서 관에서 관리하는 관진(官津)이었다.

뚝섬이나 광나루· 동작진 등은 민간에서 나룻배를 운영하는 사진(私津)이었다.
이들 나루 중 가장 험한 곳은 동작진이었다고 한다.

<조선 왕 조실록>에는 동작진에서 나루를 건너다가 배가 침몰하여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에 속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인천부(仁川府) 과천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과천군이 시흥군에 합쳐지게 됨에 따라 시흥군의 관할이 되었다.

1936년경성부(京城府)로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에 속하게 되었고, 1946년에 영등포구에, 1973년에 관악구에,

1980년에는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강에 여러 다리들이 설치된 뒤 나루의 구실은 없어졌고,

특히 이 부근에 동작대교가 설치되어 한강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과천으로 통하는 교통로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국립묘지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춘향전>에 이도령이 춘향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부모 앞에 하직하고 전라도로 향할 때 남대문 밖 나서서 서리 중방 역졸 등을 거느리고 청파역에 말 잡아타고

칠패와 팔패며 배다리를 얼른 넘어 밥전거리를 지나 동작을 얼른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에서 점심 먹고...."

영조 4년(1728년) 소현세자의 적파 손(嫡波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며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이 파견되었으며, 영조 22년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배급받게 됨으로써

나루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를 만들어 인릉을 찾기도 하였으며,

금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강가의 옛모습은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있는 그대로' 사실감있게 전한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은 겸재 정선의 그림 <동작진>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지금 동작대교가 놓여 있는 동작나루 일대를 서울 쪽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관악산 우면산이 먼 산으로 처리되고, 현재 국립현충원이 들어서 있는 동작마을 일대가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삼도(下三道·서울 아래쪽의 충청 전라 경상 3도)로 내려가는 가장 큰 나루답게 마을 아래 강가에는 근 20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다.
그 중 한 척이 나귀와 사람을 싣고 힘차게 삿대질하며 서울 쪽으로 건너오고 있는데 서울 쪽 백사장에는 구종(驅從·말 모는 종)을

거느린 선비 일행이 기다린다. 그 사이 강 건너에서는 과천 쪽에서 올라온 선비 일행이 나룻배를 부른 듯 사공이 긴 삿대로

배를 물가에 대려 하는데 나귀 탄 선비는 깎아지른 동작산 높은 봉우리에 압도당한 듯 이를 올려다보기에 여념이 없다.
이 동작산 제일봉 밑으로는 지하철 4호선 굴길이 뚫려 있고 배가 떠있는 지점으로는 동작대교가 가로지른다.
선비가 지나왔을 길은 지금 과천으로 넘어가는 동작대로가 돼 있고, 길가 강변에 운치 있게 솟은 낮은 산봉우리는 흔적 없이

사라진 채 동작대교를 출입하는 고가차도가 놓여 끊임없는 차량행렬이 토해내는 소음과 매연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승방천(僧房川)이라 부르던 반포천(盤浦川)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이수교(梨水橋) 일대와 반대편 흑석동 쪽 강변마을은

버드나무 숲이 가득 우거져 있다.
이때 동작마을은 서울 세가(世家·대 물려 특권을 누리며 사는 집안)들의 별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듯 번듯한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겸재의 제자였던 근재 박윤원(近齋 朴胤源·1734∼1799)은 ‘동작나루를 지나며(過銅津)’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성곽 나서자 티끌 같은 세상일 없고, 강물빛 비 맞아 다시 새롭다.

배에 앉으니 산은 저절로 오가고, 물가에 나앉자 백로와 서로 친하다.
물위에 정자 많으나, 누각엔 주인이 적다. 누가 능히 내게 빌려줘 살게 하려나, 꽃과 대나무에 경륜(經綸)을 붙여보겠네.’
이 동작마을 서쪽 뒷산 중턱에는 선조대왕의 조모인 창빈(昌嬪) 안(安)씨의 묘소가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서 양주 장흥(長興)에 있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태어난 손자가 선조(宣祖)가 됐고,

선조의 자손들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왕위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광복 후 이 일대를 국립묘지로 선정한 것도 이런 명당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

동작진일대는 명당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다투어 찾아 시문을 즐기던 곳이다.

거기에는 이들 풍류객들이 마련한 별장이 빼곡히 들어서 양택의 명당임을 말해준다.

선조 할머니 창빈안씨의 동작들이 들어섰다. 그 창빈안씨로부터 13명의 왕이 배출된다.

1955년 6.25한국전 때 희생된 국군을 위한 국군묘지가 동작릉을 중심으로 조성돼 음택으로도 명당임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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