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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동재기나루 동작진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4.02.17|조회수452 목록 댓글 0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쪽 끝 현재 동작대교가 놓여있는 부근에 동작진(銅雀津)이 있었다.
동재기나루라고도 불렀다. 이 동재기나루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 천ㆍ수원ㆍ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거나 서울 로 들어오던 사람 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수천(梨水川) 입구에 해 당하는 동작진이다.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위에 모노 리탄(毛老里 灘)과 기도(碁島)가 있었다.
이곳은 인근 노량진에서 관할하였다.호남ㆍ호서 지방의 과객(科客)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사선(私船) 몇 척만이 운용되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한강의 각 나루도 규모와 위치에 따라 구분되었다.

 

한강진ㆍ노량진ㆍ양화진은 가장 중요한 나루로서 관에서 관리하는 관진(官津)었다고 한다.
뚝섬이나 광나루ㆍ동작진 등은 민간에서 나룻배를 운영하는 사진(私津)이었다.
이들 나루 중 가장 험한 곳은 동작진이었다.
<조선 왕 조실록> 에는 동작진에서 나루를 건너다가 배가 침몰하여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많다.
영조 4년(1728년) 소현세자의 적파 손(嫡波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며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이 파견되었다.
영조 22년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배급받게 됨으로써 나루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를 만들어 인릉을 찾기도 하였다.

동작진의 배다리는 왕실에서 과천 청계산(오늘날 서울대공원자리)으로 사냥하러 갈 때

놓았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연산군 시절에 많이 이용한 배다리로 유명하다.
도성에서 과천에 이르는 길목으로서의 동작진은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춘향을 찾아 갈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역졸을 거느리고 가만히 숭례문을 내달아 칠 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을 지나고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 뛰어 넘어 과천에 이르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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