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노들나루 동작진

동재기나루와 배다리 그리고 서래섬의 유채꽃밭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5.10|조회수242 목록 댓글 0


한강공원 반포안내센터 옆에 설치한 동재기나루터 표석이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銅)색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거기서 유래되어 붙어진 이름 동재기이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든가,
또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동작진은 문헌상과 천현 북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동작역이 있는 이수천 입구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 위쪽에는 모노리탄(毛 老里灘)이란 여울이 있었다.
 그 앞에는 기도(碁島)란 작은 섬이 있었다. 이 진은 인근 노량진 관할하에 있었다.
 호남·호서지방의 과객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나 사선 몇 척만이 운용되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변장이 파견되었다.
영조 22년(1746)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 받음으로써 나루터로써의 면모를 갖추었다.
<춘향전>에 이몽룡이 성춘향을 찾아가는 장면에 ‘역졸을 거느리고 가만히 숭례문을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을 지나고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 뛰어넘어 과천에 이르니…’라고 쓰여있어
동작나루가 과천가는 지름길임을 암시했다.
동작나루는 근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한강인도교의 건설로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동작대교가 건설 되어 옛 지명을 재현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꿩 한 마리였다 / 상감마마께오서 슬쩍 비아냥대었다 
정승의 위엄에다 / 5만 군사의 위엄에다 / 고작 한 마리 까투리라
이런 세월 있었다 있다 있으리라”
고은 시인이 23여년 만에 탈고한 시집 <만인보>의 마지막 시 ‘한강 배다리’의 일부다.
한국 문학사 최대의 연작시로 일컬어지는 <만인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여러 인간상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만인보는 제30권까지 약 3천800여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만인보의 대미를 장식한 시 ‘한강 배다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시에서의 상감마마는 바로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사냥을 위해 도성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고

짐승을 풀어놓을 만큼 광적으로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이 사냥하러 간 곳은 과천쪽 청계산이다. 이때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으로 거둥하였다.

동작나루를 건널 때 백성들의 배를 강제로 징발해서 배다리를 놓았다,

연산군은 통행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여 이곳에 부교를 가설하였다.

부교란 주교(舟橋) 즉 배다리를 말한다.

나룻배의 전복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수면에다 선박을 연이어 일렬로 연결시켜서

강 양쪽을 접속시키는 것이다.

한강 일대에서 800여 척의 선박을 징발하여 20여 일에 걸쳐 가설하였다.

연산군은 국왕의 능행을 이유로 비록
해빙되었다고 하여도 철거하지 못하게 하고 수시로 말을 타고 부교를 건너서 청계산에
이르러 수렵을 즐겼다고 한다. 더구나 연산군은 이후 한강진에서의 민간인의 왕래를
금하니 한때 하류쪽 노량진의 교통이 붐비기도 하였다.

그 후 배다리는 철거되고 다시금 나룻배가 운행되었다.

이곳에 배치된 진부(津夫)들에게는 소정의 위전(位田)이 지급되어 생계를 이루게 하였다.

진부들에게 급여된 위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정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강제로 점탈되어 진부들은 생계가 여의치 못하였고

또한 나룻배를 고칠 수 없게 되어, 나룻배의 수효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진부들도 도망가서 한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이 먼저 건너려고 다투다가 물에 빠지거나

나룻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거듭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폐단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위정자들은 진도의 관리에 유의하여 책임자를 징계하고

나룻배의 확보에 힘을 쓰면서 선창 수축에 노력하였다. 한강나루의 선창은 나루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부터
견고하게 이루어졌으나 중종 때 훼손된 이후 한동안 수리를 못하여 선릉으로 국왕이 행행하고자 하여도

삼전도로 돌아가는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중요한 나루의 역할을 담당한 한강나루에는

큰 배가 접안하는 양쪽에 배의 높이와 같게끔 석축으로서 선창을 쌓아서 인마(人馬)의 통행이 편하고 안전하게 하였다.

서래섬은 반포한강공원에 있는 섬이다.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올림픽대로 건설와 한강 종합개발을 하면서 조성한 인공 섬이다.
외형상 서래섬은 수양버들이 서 있고 거위와 붕어 잉어가 산다.


엣날 이 자리에는 반포섬이 있었다. 지금의 서래섬 자리에 있던 섬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 때의 조선 시대 지도 등에서는 기도(棋島/棊島/碁島/基島)라고 불렸다.

1960년대에는 이 자리에 모래언덕이 있었다고 한다.



봄철에는 유채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오는 5월 13일부터는 유채꽃이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이곳 유채꽃 단지에서 유채꽃 축제가 벌어진다.

1년 내내 각종 꽃과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사진 촬영은 물론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