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동작나루 중간에서 바라다 본 국립서울현충원이다.
북한산 남산 공작봉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푸른 동맥을 잇는 공작봉(孔雀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추고 있는 천하의 명당(明堂)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양택의 명당지이었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동작릉이 들어서면서 음택의 명당으로 널리 알려졌고 1955년 국군묘지가 그 맥을 이었다.
‘동작릉’ 주산(主山)은 서달산이다. 서달산이 좌우로 두 팔을 벌려 현충원을 감싸면서 흑석동 쪽의 산이 좌청룡(左靑龍)이 되며,
사당동 쪽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서달산은 이곳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달산 능선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역을 살짝 비켜 내려오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봉우리 하나를 만든다. 장군봉이다. 현재 장군들의 묘(장군1묘역)가 조성된 장군봉은
풍수상 현무정이라 부른다. 주산의 강한 기운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가 다시 조금씩 흘려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장군봉에서 다시 중심 산줄기[來龍]가 내려와 창빈이 안장된 곳에서 멈춘다. 땅기운이 오롯이 뭉친 곳인데 이를 혈(穴)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곳의 전체적인 산세 흐름은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제1묘역) → 혈(창빈 안씨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로 이루어진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산세는 관악산(632m)에서 비롯되었다.
최고봉인 연주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이 남현동 고개를 지나 까치산공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사당아파트와 상도중학교, 상현중학교가 있는 능선을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의 주산인 동작봉(174.8m)으로 이어진다.
동작이란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고, 이 일대의 돌 색깔이 구리 빛을 띤 것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작봉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은 병풍을 치듯 묘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었다.
창빈안씨 묘의 주룡은 동작봉에서 우측 두 번째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봉우리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 묘가 있으며 이곳 주룡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주룡의 맥은 크게 과협 한 다음 장군제1묘역이 있는 봉우리를 세웠다. 귀인처럼 단정하게 생겼으며 현무봉이다.
이 중심 맥은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끝자락에 창빈안씨 묘가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내청룡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 묘가 있고,
우백호에는 김대중 대통령 묘가 있다. 김영삼 대통령 묘는 외청룡에 해당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동작릉이 정혈이고 나머지 묘의 능선들은 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공작봉은 서울 강남에서 드물게 푸르른 녹지를 가진 국립서울현충원을 감싸고 있는 봉우리다.
그 봉우리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 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늘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사방의 산은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지하에는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 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으로
공작장익형(孔雀張翼型)이면서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型)이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 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모양이며
한강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가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원래 주인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昌嬪安氏)다.
창빈 안씨는 연산군 5년(1499년)에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년) 궁녀로 뽑혔다.
스무 살 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덕흥군·정신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1549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왕후는 창빈과 자녀들을 가까이 챙겼다. 그 후광으로 명종이 죽고 자식이 없자 창빈의 손자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그가 선조다. 선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후궁의 손자로서 임금이 된 경우이다.
안씨가 창빈으로 추존(追尊)된 것도 선조가 임금이 되고 나서였다. 이후 조선의 왕족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었다.
본래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의 무덤이다. 후궁의 무덤은 그냥 묘라고 한다.
그런데 창빈안씨 묘는 동작릉이라고 높여 불렀다. 후궁의 무덤은 그냥 묘라고 한다. 그런데 창빈안씨 묘는 동작릉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 이유는 손자인 선조(1552∼1608)가 14대 왕에 오른 후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1874∼1926)까지 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아들 덕흥군(선조의 아버지)은 경기도 장흥에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1년 만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한다. 당시 이곳은 과천의 작은 마을이었다.
안장된 지 1년이면 육탈(肉脫)이 거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길지(吉地)를 찾아 과감하게 이장을 한 것이다.
창빈 무덤 이장 사유가 풍수라는 것은 신도비(神道碑)에 나타난다.
"양주 서쪽 장흥리에 예장하였으나 후에 택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 동작리 곤좌원(북동향)으로 이장하였다."
(禮葬于楊州治西長興里. 後以宅兆不利. 移葬于果川銅雀里坐坤之原).〉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선조가 태어났다. 그리고 1567년에 임금이 되었다. 길지를 찾아 이장한 지 20년이 채 안 되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할머니묘 명당발복 덕분에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조선의 호사가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로 인해 조선에 ‘풍수붐’이 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