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때에는 흥복사(興福寺)였다.
1464년(세조10) 5월 3일 세조는 효령대군을 원각사 창건의
조성도제조로 삼으시고, 사명(寺名)을 원각사(圓覺寺)라고 고쳤다.
그러나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원각사(圓覺寺)를
연산군이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었다가,
1897년(광무1) 영국인 고문 J.M.브라운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원각사10층석탑을 백탑(白塔)이라고 했다.국보 제2호다.
이 탑은 현재는 비들기와 먼지 비바람을 막기 위해 유리 보호각을 둘러쳤다.
조선시대엔 한양 도성 한복판에서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냈다.
18세기 무렵, 원각사지10층석탑을 배경으로 한양의 진보적인 북학파 지식인들이 이웃해 살며 이른바 ‘백탑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당대 신분과 나이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 변혁의 꿈을 키웠다.
탑골에 살던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과 남산 자락에
살며 이들과 교유한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가 핵심 인물로 불린다.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인 박지원과 홍대용은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 등과 함께 벗이자 때로는 스승으로 우정을
이어갔다.백탑파는 당시 지배이념으로 관념으로 흐르던 주자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세를 견지했다.
민생을 보듬는 이용후생의 학문을 여는데 앞장섰습니다. 또 조선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청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해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주력했다.백탑파는 1800년 비록 자신들을 중용한 정조가 죽으며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났다.그 사상이 후손과 제자에게 이어졌으며 19세기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다.
또한, 1919년 3ㆍ1운동의 발상지로 더욱 유서 깊은 탑골공원은 현재 시민의 휴식공간이다.
또한, 탑골공원은 한국 최초의 공원이며, 탑공원,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였으며
면적이 1만 2085 m2이다.
현재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제2호), 원각사비(보물제3호),
앙부일구(仰釜日晷:해시계)받침돌(臺石) 등의 문화재와, 1980년에 제작ㆍ건립한 3ㆍ1운동기념탑, 3ㆍ1운동벽화,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선생 동상, 한용운(韓龍 雲)기념비 등이 있다.
서울시에서는 1992년부터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고,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조선왕조는 숭유억불을 내세워 창업을 한다.태종 대에 마을마다 있던 사찰 대부분을 폐찰하고 300여개만 남긴다.
세종은 억불(抑佛) 정책을 더욱 강화한다.300여개 사찰을 30여개만 남기고 폐찰시킨다.세종은 자손들이 잇단 화를 당한다.
궁궐내에 내불당(內佛堂)을 부활하고 억불정책을 완화한다.세조 대에는 불교를 부흥하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여기에 효령대군 이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도성안에 원각사를 중창한다. 그 실록에서 그 친불정책을 살핀다.
세조 10년 9월과 10월 효령대군 이보와 원각사 관련 기사를 옮겨본다.
"명하여 짝을 지어 쏘게 하니, 세자(世子)가 두 번 쏘아 두 번 맞히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신숙주로 하여금 잔(盞)을 받들게 하고 구치관(具致寬)으로 하여금 병(甁)을 잡게 하였다. 한참 있다가
원각사 조성소 제조(圓覺寺造成所提調)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 李補) 등이 절에서 새로 만든 불상(佛像)의
분신 사리(分身舍利)를 바쳤다."
"무지개 같았으나 희미(希微)하더니 잠깐 사이에 사라졌으며, 또 강녕전(康寧殿) 양쪽 모서리에도 서기(瑞氣)가 나왔다.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등이 원각사(圓覺寺)로부터 또 사리(舍利)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5색의 서기(瑞氣)가 있습니다."
하니, 백관(百官)들이 진하( 陳賀)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강도(强盜)·절도(竊盜) 이외의 죄인(罪人)을 용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