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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동재기나루가 별서촌(別墅村)동작마을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09.06|조회수347 댓글 0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銅雀津)'이다.

앞에는 동작강이 흐르고 있다. 이 일대  한강은 동작강(銅雀江) 동호(銅湖)라고 불렀다.

오른쪽 야트막한 산세가 좌청룡으로 힘차게 뻗어내리고 있다.왼쪽에는 울퉁불퉁 높은 봉우리가 우백호로 내닫으면서

가운데 분지 동작마을(銅雀忖)을 지켜주고 있다.그 마을 뒷편에는 서달산 동작봉이 주산으로 받쳐주고 있고 이어서

청계산과 관악산이 든든하게 수호하고 있다.

그 마을 앞에는 각종 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강 가운데는 여객을 실은 배가 강 건너 백사장으로 노를 저어 가고 있다.
강가 모래사장에는 시종을 거느린 양반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의 강(京江) 나루 가운데는 가장 분주하고 활기찬 동작나루로

그리고 있다.이 동작나루(銅雀津)는 줄여서 동진(銅津)이라고도 했다.

강북산남(江北山南)의 땅이 양지바른 명당(明堂)으로 꼽힌다.동작마을은 강남산북(江南山北)의 그늘진 땅 음지(陰地)다

주위의 이수천과 반포천이 각각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역수(逆水)로 작용해 그 음지 동작마을의 부족한 기(氣)를 보완한다. 

음(陰)의 속성을 지닌 땅 동작마을이다.두 내(川)의 비보(裨補) 기능 탓인지 내노라하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이 동작마을에 별서들을 다투어 지어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산 사람의 양택(陽宅)명당으로 관심을 끌었다.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한 가운데 둥근 분지에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유난히 기와집이 많다.

강변 풍광이 수려한 산자락 분지에 사대부가의 별서촌 ‘동작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세도가들이 다투어 지은 별장으로 보이는 큰 집들이 빼곡히 몰려있음을 겸재의 그림 동작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그 왼쪽이 반포(盤浦),곧 서릿개이다.오른쪽 언덕이 높아지는 곳이 있다.

명수대로 넘어가는 산마루 같다.과천으로 가는 산길 오른쪽 높은 산줄기가 보인다.그 중턱에 큰 건물이 서 있다.

바로 옆에 낙락장송이 솟아 있다.곧 동작중학교 뒷산 가막재(釜峴)으로 보인다.

그 낙락장송 옆의 큰 기와집이 보인다.인조반정의 공신 이귀(李貴 1557~1633)의 별서 창회정(蒼檜亭)이라고 한다.

이귀의 증손자 이세저(李世著)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귀가 동작의 강가에 정자를 세웠는데 노송나무 한 그루가 뜰 가운데 있었기에

그 정자의 이름을 창회정(蒼檜亭)이라 하였고 세한(歲寒)의 뜻을 부쳤다고 했다.

1711년 윤봉조(尹鳳朝)가 동작나루가 창회정(蒼檜亭)을 찾아 이렇게 노래한다.

"맑은 기운이 뱃전에 비를 보내는데 찬 기운이 나무 위 별빛을 엿 보네,안개가 떠나는 포구에 걷히고 나니,

노송나무가 유독 정자임을 드러내주네.(淸松㠶頭兩 塞窺樹頂星 烟光盡歸浦 檜色獨標亭)"

인조반정 이전에는 광해군의 측근에서 권세를 자랑하던 인물들이 동작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전한다.

광해군 시절 권신 박승종(朴承宗 1562~1633)이 동작촌에 들어가 별서 퇴우정(退憂亭)을 경영하였다.

박승종은 광해군 때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아들 박자흥(朴自興)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었다.

그 자신은 영의정에 올랐다.사돈인 이이첨 등이 경운궁에 난입하여 인목대비를 살해하려 할 때

죽음을 무릎쓰고 막았다.폐모론이 본격홛될 때 극력 반대하였다.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자책하여 죽음을 택하였다.

1616년 삼전도비문의 찬술자로 천거된 4명 가운데 한 명인 조희일(趙希逸)이 퇴우정 기문을 지어

이곳의 풍광(風光)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한강을 끼고 북쪽과 남쪽은 대개 경치가 빼어나다.그러나 강물은 남쪽과 북쪽을 공유하지만 산은 이와는 달라서

수도 한양을 끼고 가파르고 치솟고 범처럼 웅크리고 용처럼 서려 있으며 남쪽을 면하고 뒤쪽을 등지고 있다.

이 때문에 북쪽에 있는 빼어난 풍광은 볼 수가 없으니,남쪽에서 거처하여 산과 물의 빼어남을 겸한 것만 같지 못할 듯하다.

한강의 물은 동에서 남으로 꺽여서 구불구불 흐르다가 서쪽으로 달려가는데,물살이 느려지는 곳을 만나 걸음을 멈추는 곳이

동작나루이다.강 남안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여 언덕이 되고 깍아지른 듯 서서 암벽이 되어 천 길 우뚝하게 강바닥에 꽃혀 있으니

강물에 부딪혀도 떠다니는 않는 것이 바위의 힘이다.바위 조금 서쪽에 산기슭을 베고 있는 언덕 하나가 나오는데 골짜기가

호젓하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다.으슥한 쪽은 울타리를 치기에 적합하고 훤한 쪽은 비워 두기에 적합하다.

두루 바라보면 이러하다.훤한 모래와 비단 같은 바위가 그림처럼 찬란한 곳은 모래톱이 겹겹으로 돌아드는 것이요,

푸른빛과 흰빛을 얽어 놓아 수놓은 비단을 쌓아놓은 듯한 곳은 비뚤한 구릉지역이다.옆으로 보면 안개 낀 숲과 어부들의마을이

보일 듯 말 듯 아스라한 것은 저자도요,울타리가 이어지고 바람 받은 배가 왕래하는 곳은 용산과 노량이다.

맑은 물결 아득하여 끝없이 바라다 보이는데 노을 속의 오리가 가득한 허공에 잠겼다 떳다하는 것은 양화나루와 파릉(巴陵)이다.

곧바로 바라보면 한양의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고 무성하게 성곽을 에워싸고 있다.감싸 안고 있는 봉우리가 엄숙하게 창과 칼이

높다랗게 솟아 허공을 찌르는 것이 삼각산이요,도봉산이다.목멱산은 빙글 돌아 날아 오를 듯하고 인왕산,모악산이 첩첩이 다가선다.

많기도 하여라.한강의 동쪽과 서쪽과 남쪽에 아름다운 땅이 많음이,맑으면서도 빼어나고 기이하면서도 묘한 것을 한 눈에 다

거두어들여 볼 수 있다."-서울역사박물관의 <경강의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에서-

이항복의 증손 이세필도 동작나루 동쪽에 별서를 지었고 윤후 남용익 박필주 유길준 등도 동작나루 근처에 별서를 경영했다.

특히 이광익(李光瀷)이라는 인물이 동작나루 근처에 쌍청정(雙淸亭)을 짓고 살았다.이안눌 윤후 홍주원 이하진 등이 쌍청정에

관련된 시를 지은 것으로 전한다. 당대 유명한 문신들이 이광익과의 친분이 쌓아온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19세기 대표적인 문장가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동작나루에서 유명한 시를 남긴다.

홍길주는 당대 최고 명문가 출신이다. 19세기 대표적 가문 중 하나인 풍산 홍씨 집안으로 그의 형 홍석주(洪奭周)는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동생 홍현주(洪顯周)는 국왕 정조의 둘째 딸 숙선옹주와 혼인했다. 그 역시도 16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생원ㆍ진사에 동시 합격하는 등 천재성을 보이며 출세길이 보장되었지만 그는 벼슬에 급급한 사람들을 '도적'에,

벼슬길을  '비단에 덮인 함정'에 비유하며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평생을 독서와 글쓰기에만 매달린 기인이었다.
홍길주는 순조 30년 1830년 8월 어느날 충청도 보은 군수로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타고 동작나루를 건너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아파한 시 한편을 남긴다.


동작나루 배안에서(銅雀舟中)


하! 너희 민인의 아픔이여

嗟爾下民困
생각하면 마음 속 술 취한듯

 念之中心醉 
노 저어 맑은 강 거슬러 올라가는데

搖櫓泝澄流 
배는 어찌 그리 빠른지

舟行何太駛
근심이야 날로 아득한데

 憂端日浩渺
가을 물과 함께 닿는구나

正與秋水至

-표롱을첨(縹礱乙㡨) 중에서-

겸재의 그림 <동작진>에는 보이지 않는다.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동작릉이다.

창빈 안씨(昌嬪 安氏, 1499년~1549년)는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다.
창빈의 신도비에는 ‘천품이 단정하고 훌륭하셨다(天資端懿)’고 새겨 있으니 후세에 나라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이들에게

자리 내주심에 서운함이 없을 것이다.이 땅은 한남정맥의 한 줄기가 관악산, 삼성산을 거쳐 이곳에 와서 혈을 맺은 곳이라서

공작포란형(공작이 알을 품는 모양)의 명당이라고 풍수사들은 말한다.
창빈안씨는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궁궐을 떠나 중이 되려고 하였다.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중에 머물다가 명종 4년(1549) 세상을

 떠났다. 처음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 장사 지냈다. 그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듬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바로 동작릉이다.

곡장(曲牆)이 둘러처진 창빈 안씨의 무덤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창빈안씨 묘의 주룡은 동작봉에서 우측 두 번째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봉우리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 묘가 있다.이곳 주룡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주룡의 맥은 크게

과협 한 다음 장군제1묘역이 있는 봉우리를 세웠다. 귀인처럼 단정하게 생겼으며 현무봉이다. 이 중심 맥은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끝자락에 창빈안씨 묘가 있다.

동작릉으로 옮긴 뒤 중종의 후궁 중 하나였던 창빈은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왕위로 오른다. 그가 선조다.

창빈 안씨는 죽은 뒤에 왕의 할머니가 됐다. 이 후 조선의 모든 왕은 창빈 안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창빈 안씨의 DNA는 선조 이후 13명이 조선 왕통에 면면히 이어갔다.

제14대 선조에서 제27대 순종까지 14명의 왕이 동작릉 혈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길지에서 수십명의 왕이 나올 것이다''

그 풍수사의 말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였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어느날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이초 집에 한 지관이  찾았다.
-어떤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숙용 안씨의 묘를 이장하셔야 합니다."
덕흥군은 예삿 일이 아니였다. 깜짝 놀라 그 지관에게 호통을 쳤다.
-방자하다. 감히 왕실의 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방금 조선 최고의 명당 길지를 보고 왔기에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길지 운운하며 명당을 이야기하는 건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아니냐?
그 명당이란 곳이 금계포란형을 하고 있다는 게냐?
"금계포란이요? 그건 기껏해야 닭이 아닙니까?"
-그럼 봉황을 보았다는 거냐?
"봉황은 보지 못했으나 공작을 보았습니다."
-공작을 보았다고?
"네, 공작포란의 명당길지를 보았습니다."
이 풍수사가 말하는 공작포란형은 최고의 길지이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그 명당을 덕흥군 이초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명당이면 자네의 조상을 모시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 주겠다는 게냐?
"그런 명당에는 아무나 함부로 쓰면 오히려 화를 당합니다. 임자는 따로 있지요."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
"노들나루 위에 동작나루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왜 그 자리를 동작나루라고 했겠습니까?"
-그 천하의 명당 길지를 어찌 너만 알고 있는 게냐?
"길지는 쉽사리 아무에게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숙용마마의 묘를 이장하는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말하세요.
양주의 묘에 물이 차서 흉한 꿈을 자주 꾼다고 하세요. 그 자리는 수십명의 군왕이 나올 길지입니다."
풍수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떠났다. 덕흥군 이초는 멍할 따름이었다.
덕흥군 이초는 그 길지를 직접 확인키로 했다. 그 풍수사를 부르지 않았다.
이튿날 종자만 데리고 갔다. 강 건너 동작나루로 갔다. 그 명당을 둘러보고는 탄성을 낸다.
"아,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그 풍수사의 말대로 기가 막힌 길지였다. 이곳의 산세는 관악산(632m)에서 비롯되었다.
최고봉인 연주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이 남현동 고개를 지나 까치산공원으로 넘어간다.
사당아파트와 상도중학교, 상현중학교가 있는 능선을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의 주산인 동작봉(174.8m)으로 이어진다.
동작이란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고, 이 일대의 돌 색깔이 구리 빛을 띤 것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작봉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은 병풍을 치듯 묘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었다.
덕흥군 이초는 공작포란형을 하고 있는 곳곳을 찾았다. 어머니 숙용 안씨를 모실 묘자리를 살폈다.
어머니를 모실 길지는 찾았다. 문정왕후가 허락하지 않고는 어머니를 그 곳에 모실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창백한 얼굴로 문정왕후를 찾았다.
-왜 그렇게 얼굴이 창백하냐? 무슨 일이 있는 게냐?
"특별한 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흉몽을 자주 꾸고 있습니다."
-무슨 흉몽을 그렇게 심하게 꾼다는 게냐?
"꿈에 생모가 자주 보입니다."
-숙용 안씨가 꿈에 보이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을 며칠째 계속 꾸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은 묘에 물이 차는 것이다. 당장 이장을 하도록 하라.

이렇게 동작나루가 사대부의 별장 저택이 몰려 있는 동작마을에 창빈 안씨의 동작릉이 들어선 것이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별저 전장을 지어 경영하던 양택명당 '동작마을'이

돌아가신 조상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천하의 음택(陰宅)명당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조선 후기 당대 최고의 세도가들이 몰려들어 별서와 전장 정자 등을 지어 경영하던 양택명당 동작마을 중심지이다.

그 동작마을 핵심지역에 국립서울현충원이 들어서 대한민국과 우리 한민족을 지켜내는 음택명당으로

탈바꿈하고 있다.1895년 을미의병에서 항일독립지사, 1950년 한국전의 영웅들 월남전 참전용사 민주대한민국 건설에

앞장 섰던 민주투사 문화계 인사 등 17만 7천여 호국영령들이 영면하고 있는  민족의 성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옛 동작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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