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씨(安氏)의 신도비이다.
현충원 내 큰길에서 오른쪽 좁은 언덕길로 들어서면 나무와 잔디로 잘 조성된 창빈 안씨의 묘역이다.나무가 울창한 곳이다.
그 좁은 길 왼쪽에 창빈 안씨의 신도비가 있다.조선 제 19대 왕인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년이 지나도록 묘역에
비석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숙종 9년 이 비를 건립했다.
창빈 안씨 신도비는 일반 신도비와 달리 4면이 모두 같은 폭을 가져 입체적이다.비신 화강암 총길이 312cm, 폭 63.5cm이다.
비의 형색을 후궁의 묘에서 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이 신도비는 다른 비에서 흔히 쓰이는 거북 모양의
이수와 용모양의 옥개석 대신 웅장한 느낌의 이수와 간결한 연꽃 문양이 들어 있는 유난히 큰 옥개석을 얹고 있다.
비의 전액은 상단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창빈안씨신도비명'이라 되어있다.요덕대부 동평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항의
솜씨이다.비문은 숙종 때 예조판서와 한성판윤을 지낸 신정이 지었고 글씨는 한성판운을 여섯 번이나 지낸 지돈녕부사 이정영이
썼다.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놓는 것으로 죽은 이의 생애에 관한 일들을 새겨 놓은 비이다.
무덤의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도록 세운다.정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5대 문종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공신과 같이 특별한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비를 세우게 했는데 전해지는 것으로는 안산의 정난종신도비와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 등이 있다.
유명조선국 창빈안씨 신도비명 병서
숭정대부 행예조판서겸지경연사 홍문관제학 신 신정 봉교찬 보국숭록대부 행판돈녕부사 신 이정영 봉교서
가덕대부동평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 신 항 봉교전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일백 삼십 여년이 지나도록 묘도에 비석이 없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는 연대가 오래되다 보면 창빈의
훌룡한 덕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할까 깊이 염려하시어 신정에게 비명을 짓도록 하명하였다. 신은 글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글 솜씨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안씨는 계통이 안산에서 나왔다. 아버지의 휘는 탄대로서 중종조의
원종공신에 참여하여 적순부위가 되었고 뒤에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 황씨도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홍치 기미년 칠월 을유에 빈을 낳았다.
빈은 천품이 단의하고 거동은 여측에 맞았다. 정묘년에 뽑혀서 궁중으로 들어가니 이때 나이 겨우 구세였다.
정현대비가 특별히 돌보고 사랑하여 빈에게 서사를 가르쳤고, 무인년에는 중종의 후궁으로 삼았다. 경진년에는 상궁이 되고
기축년에는 숙원에 올랐다. 이때 곤위가 견관에서 일이 생겼는데, 빈이 잘 주선하여 허물이 없게 하니 궁중에서 모두들 칭찬하였다. 경자년에 숙용이 되었다. 갑진년에 중종이 서거하니 빈은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복을 마친 뒤 구례를 따라 인수궁으로
물러가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께서 특명으로 머물러 있게 하고는 온갖 은혜와 예우를 베풀었다. 기유년에 우연히 사가에
나갔다가 갑자기 서거하니 시월 갑인일로써 춘추가 오십 일세였다.
명종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려 보내는 등 특별히 상전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중관을 시켜 상사를 돌보게 하였고
삼궁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듬해 삼월 임신일에 양주의 군치 서쪽 장흥리에 예장하였다가 뒤에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과천의
동작리 곤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선조대왕이 즉위한 지 십 일년째 되는 정축년에 창빈으로 추봉하고 특명을 내려 대원군묘에
향사하도록 하니, 애영이 극진하다 하겠다.
창빈은 몸가짐이 엄숙하고도 조심스러웠으며 부덕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중종의 사랑을 받은 삼십 년 동안 시종 음전한 태도에
게으름이 없었고 궁중에서는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었다. 게다가 감식이 있어서 사람의 길흉과 일의 성패를 예언하면 모두 들어
맞았다. 자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의방을 따라서 곡진하게 타일렀다. 또 능히 생사의 이치를 알아서 평소 신에게 비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의금을 지어서 궤짝에 담고는 뚜껑에다 ‘염구’라고 써놓아 죽은 후의 장례에 대비하였으니 빈의 식견이 이와 같았다.
신은 역대로 비빈들이 영귀한 신분에 있을 때의 일을 살펴보니, 겸손하게 처신했을 때는 복을 받고 방자하고 교만하게 처신했을 때는 누구 하나 그 영광을 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빈은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가서 마침내 임금의 사랑을 받아 육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 성실하고 깊은 덕과 온화한 몸가짐은 이미 후궁 중에서 빛을 발했고, 또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받아 성손을 보았으니 우리 왕조의 영원한 왕업을 잇게 하였다. 이러한 성사를 이룬 것이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이로 보면 『주역』에 ‘시이고상’이라고 한 것이 거짓이 아니다.
빈은 2남 1녀를 낳았다. 큰 아들은 영양군 거이고, 둘째는 덕흥대원군 초이며, 딸은 정신옹주이다. 영양군은 찬성에 증직된 안세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흥녕군 수전을 후사로 삼았다. 대원군은 영의정 에 증직된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길렀다. 아들 중 선조대왕은 셋째이고, 큰 아들은 하원군 정이며, 둘째는 하릉군 인이다.
딸은 안황에게 출가하였다. 정신옹주는 청천위 한경우에게 하가하여 일남 삼녀를 두었다. 아들은 진이고, 딸들은 남궁 식 ·
원 호준 · 이 인호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의 자손이 계속 번창하여 지금은 거의 천여 명에 이르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복록의 융성함은 옛 사람과 더불어 견줄 이가 드무니, 아! 훌륭하도다. 신은 삼가 서의 뒤를 이어 명을 올린다.
맑은 정기 모아서 훌륭한 이 내시니,
고운 덕 닦고 닦아 사덕을 갖추었네.
임금 모시어 사랑 받았고,
음전한 몸가짐으로 상서를 열어줬네.
현사가 성인 낳아 보답 받으니,
혁혁하게 중흥하여 삼령에 제사하네.
어진 임금 이어 나와 복을 내리니,
적선의 끝 경사라는 그 이치 분명하구나.
울창한 저 높은 뫼에 비석 세우고,
이 내용 명에 새겨 후세에 알리노라.
숭정 기원 후 56년 계해 12월 일에 세움.
昌嬪安氏神道碑
昌嬪安氏神道碑銘(篆題)
有明朝鮮國昌嬪安氏神道碑銘 幷序
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 臣申 晸 奉敎撰
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 臣李正英 奉敎書
嘉德大夫東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臣杭 奉敎篆
昌嬪安氏之卒 距今百有三十餘禩 而冡隧闕牲石 我殿下 深懼年代寢遠 而德美靡彰 迺命臣晸銘之 臣職忝詞掖 不敢以不文辭 謹稽 安氏系出安山 考諱坦大 叅中廟從勳 階迪順副尉 贈議政府右議政 妣黃氏 贈貞敬夫人 以弘治己未七月乙酉生嬪 天資端懿 動合女則 丁卯 選入宮 年甫九歲也 貞顯大妃 特加眷愛 俾授書史 戊寅 命備中廟後宮 庚辰 拜尙宮 己丑 陞淑媛 時 坤闈有事繭舘 嬪陪衛周旋 率禮無愆 宮中翕然稱美 庚子 進淑容 甲辰 中廟上賓 嬪哀毀踰制 服旣闋 循舊例 請退處仁壽宮 文定王后 特令留侍 恩禮備至 己酉 偶就私第 忽無疾而終 寔冬十月甲寅也 春秋五十有一 明廟震悼輟朝 贈賵周恤 特優常典 命中官庀其喪 三宮亦如之 翌年三月壬申 禮葬于楊州治西長興里 後以宅兆不利 移窆于果川銅雀里坐坤之原 宣祖大王 踐阼之十一年丁丑 追封昌嬪 特命享祀于大院君廟 哀榮極矣 嬪莊敬飭躬 婦德純備 承中廟恩遇 幾三十年 持以巽嘿 終始靡懈 宮闈之間 俱得歡心 且有識鑑 或逆言人之休咎事之成敗 擧皆懸合 敎子女 必循義方 諄諄戒飭 能知死生之理 平生不事祈禱 甞預製衣衾 置一笥 識其外 曰歛具 以備送終 其達識如此 臣竊觀歷代妃嬪之處榮貴者 莫不以謙恭挹遜 獲其祐 放肆驕溢 敗其度 即其理然也 嬪以幼齔被選 卒承光寵 備位六宮 其塞淵之德 翼翼之操 固已輝暎於彤管矣 克迓天休 篤生聖孫 光啓我本朝於千萬年之業 跡其所以臻斯盛者 抑豈無所自而然哉 易曰 視履考祥 儘不誣矣 嬪擧二男一女 長永陽君岠 次德興大院君諱岹 女靜愼翁主 永陽娶贈賛成安世亨女 無子 以興寧君秀荃爲後 大院君娶贈領議政判中樞府事鄭世虎女育三男一女 男宣祖大王 序㞐第三 長河原君鋥 次河陵君鏻 女適安滉 靜愼下嫁淸川尉韓景祐 生一男三女 男璡 女南宮湜ㆍ元虎俊ㆍ李仁好 內外子孫 綿綿昌茂 到今幾至千餘 不能殫記 福履之盛 在古罕媲 猗歟休哉 臣謹繼之以銘曰
天鍾淑靈挺異質 夙邁芳徽備四德 入御靑規承寵光 含章履貞啓厥祥 賢嗣誕聖應橫庚 赫赫中興奠三靈 重熙累洽流景福 善慶之徵斯理晣 鬱彼崇岡竪貞珉 鑱茲銘詩詔後人
崇禎紀元後五十六年 癸亥 十二月 日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