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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덕흥대원군 이초(李岹)의 저택 도정궁(都正宮)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10.19|조회수643 목록 댓글 0


 서울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262번지 일대 사직단(社稷壇)의 남쪽 바로 옆에 있던 도정궁(都正宮)터다.

조선 왕 선조의 아버지이자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 이초(李岹)가 살던 집 도정궁의 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이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성군이 태여나 자란 곳으로 14대 선조의 잠저다.흥선대원군의 사당을 모셨던 집이기도 하다.

도정궁의 정확한 규모와 위치, 경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관련 자료가 전혀 없다.

전반적인 규모는 일제가 도정궁터를 200여 필지로 분할했다는 걸로 보면 현재 사직터널과 사직공원 사이 전체에 해당된다.

이는 어림잡아 창경궁 규모에 버금 간다. 조선 왕조실록에는 순조가 덕흥대원군의 사손인 진안군 이언식에게 도정궁의 고적을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이언식은 "내정의 돌기둥은 곧 선조가 독서하던 서재이고, 앞기둥 뒤의 계단에 있는 회양목은 대원군께서, 총죽은 선조께서

직접 심으신 것"이라고 답한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잠저의 본채는 현재의 운경기념관 자리며 바로 그 아래 선조의 서재인 독서당인

'궁구당'이 위치해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운경기념관 아래 돌계단 등이 있는 현대그룹가의 한옥에서 도정궁의 옛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정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도정궁의 일부 건물인 도정궁 경원당이 현재 임당빌딩 앞 도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경원당은 지난 1979년 건국대 교정으로 이전된 것으로 유일하게 명확한 위치가 확인된다. 이를 근거로 전반적인 윤곽이

그려볼 수는 있다.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옮겨놓은 도정궁 경원당(慶原堂)이다.

여러 문헌에는 도정궁에 여러 잠저와는 달리 재실과 가묘, 사당이 있었으며 주거로는 본채와 선조의 독서당인 '긍구당'을 비롯해

담연정이라는 연못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로부터 조선 후기 역대 왕들은 도정궁에 많은 정성과 관심을 쏟았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심지어는 흥선대원군은 물론 고종, 순종도 도정궁을 복원하느라 막대한 기금을 희사해 개축토록 한 일도 있다.

왕실이 대대로 관리한 잠저는 도정궁이 유일하다.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의 사손들이 대대로 종 3품인 '도정' 벼슬을 받아 세습, 관리했다. 도정궁이 조선 왕실의 본가였던 만큼 정치적 풍파도 컸다. 선조의 아들 인성군이 일부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다가 죽임을

당했는가 하면 덕흥대원군의 사손인 이하전은 왕위 서열 1순위였음에도 외척들에 밀려 강화도령인 '철종'에 왕위를 빼앗기고

역도로 몰려 젊은 나이에 참수됐다. 

어느날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이초 집에 한 지관이  찾았다.

-어떤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숙용 안씨의 묘를 이장하셔야 합니다."

덕흥군은 예삿 일이 아니였다. 깜짝 놀라 그 지관에게 호통을 쳤다.

-방자하다. 감히 왕실의 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방금 조선 최고의 명당 길지를 보고 왔기에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길지 운운하며 명당을 이야기하는 건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아니냐?

  그 명당이란 곳이 금계포란형을 하고 있다는 게냐?

"금계포란이요? 그건 기껏해야 닭이 아닙니까?"

-그럼 봉황을 보았다는 거냐?

"봉황은 보지 못했으나 공작을 보았습니다."

-공작을 보았다고?

"네, 공작포란의 명당길지를 보았습니다."

이 풍수사가 말하는 공작포란형은 최고의 길지이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그 명당을 덕흥군 이초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명당이면 자네의 조상을 모시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 주겠다는 게냐?

"그런 명당에는 아무나 함부로 쓰면 오히려 화를 당합니다. 임자는 따로 있지요."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

"노들나루 위에 동작나루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왜 그 자리를 동작나루라고 했겠습니까?"

-그 천하의 명당 길지를 어찌 너만 알고 있는 게냐?

"길지는 쉽사리 아무에게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숙용마마의 묘를 이장하는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말하세요.

양주의 묘에 물이 차서 흉한 꿈을 자주 꾼다고 하세요. 그 자리는 수십명의 군왕이 나올 길지입니다."

풍수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떠났다. 덕흥군 이초는 멍할 따름이었다.

경원당은 사랑채 건물이다.그 기능과 합리를 고려하여 안채, 사랑채 구실을 연결시키고 있으며 공간을 적절히 나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모든 방의 앞 툇마루를 통하게 하여 합리적인 구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호 장식들은 다소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조선 후기 한옥 발전의 바람직한 측면이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건축물이다.

슬하에 자손이 없었던 명종은 대를 이을 후사를 못정하고 병석에 눕게 되었다.

명종에게 일곱형제가 있었다. 그 형제소생으로  13명의 조카가 있었다.

그중 다섯째동생의 아들인 풍산군) 과 막내동생인 덕흥군의 아들들인 하원군(河原君) 하능군(河陵君) 하성궁(河城君)을

궁중에 불러다 가르쳤다. 임금을 그중에서 고를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루는 이 조카들을 불러놓고 너희들 머리가 크고작은것을

알아보려고 한다 하고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차례로 써보라고 시켰다. 써볼 차례가 된 하성군은 이를 공손히 받들어 제자리에

갖다놓으면서 이것이 어찌 보통사람이 쓰는것이오리까 했던것이다.

명종은 이런일 저런일로 하성군을 점찍어두었던 것이다. 명종에게 하나있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열세살에 죽었을 때

하성군을 보고,탄식하기를 참임금될 사람이 났으니 내자식은 의당 죽음직하다고 말했다 한다. 벙석에 누운 명종은 한 봉함을

중전을 통하여 대신들에게 전했는데 뜯어보니 하성군이라 적혀 있었던 것이다.
정승 이준경이 새임금을 맞아들일 차비를 갖추고 덕흥군 집에 화려한 행차를 하여 하성군을 모시고 선조로 즉위케 한것이다.
선조가 태어난 이집은 그후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내렸는데 헌종 말년에 이 도정궁에 다시 왕의 서기(瑞氣)가 돌았다.
그터에서 두번째 임금이 태어날 뻔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위독해지자, 후사결정귄자인 순원왕후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종손이요, 도정궁에 살고있는 이하전을 마음에두고 인손(仁孫)이라는 아명을 지어주는등 애지중지하였으나, 왕후가 이하전에 뜻이 있다는것을 알리자 안동김씨는 발칵 뒤집혔다. 이하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벽파(僻派)로 자기들 반대파였기로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인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는 모의하여 장헌세자의 증손자뻘인 이원범에게 대통을 물리도록 하고 이하전은 역모를 기도했다고

모략, 죽음에 이르게 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가 끝나자 억울하게 죽은 이하전의 아들  이해창(李海昌)을 풍산군

(豊山君)으로봉하고 종친부(宗親府)의 도정(都正) 벼슬을 주어  그집에 살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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