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72세였던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의
한 부분이다. 그는 1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해 74세의 나이로 경교장에서 흉탄에 맞아 서거할 때까지 평생을 민족의 독립에
바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며 애국지사이다.
백범 김구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 익원공파 21세손이다. 그는 빈농인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사이에서 태어나 힘든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구안동김씨는 고려 말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벌해 개국공신에 봉해진
김방경과 다섯 아들, 손자들이 모두 고려와 조선의 명신록(名臣錄)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친 명문가다.
김사형(익원공)은 조선 개국에 적극 가담해 개국 일등공신이 된 인물이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함께 고려말 충신이던 그의 형 김사렴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거부하고 도산(현 안동)에 은거했다. 벼슬을 거부한 김사렴의 후손들 중 일부는 훗날 황해도 해주로 이동, '해주김씨'로 분적했다. 조선 초 세력을 떨친 안동김씨
후손 중에 익원공파가 많다.
익원공 김사형의 증손 김질(金礩, 1422~1478)이다. 그가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장인 정창손은 이를
설득하였다.김질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줄로 알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수시로 상의하였다. 그해 6월 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일이 여의치 않자 불안감을 느꼈던 김질은 전향해 이 사실을 정창손에게 알렸다.
“지금 세자가 어가(御駕)를 수행하지 않고 특별히 별운검을 세우지 않았으니,
이는 천운입니다.먼저 거사를 고발하여 목숨을 건지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
김질은 장인 정창손에게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 복위 계획을 알리고, 정창손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단종의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 성승 등이 가담했음을
확인하였다. 정창손은 이를 바로 세조에게 알렸다.
그는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 뒤 1447년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친다.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거사를 세조에 알린 공로로 1456년(세조 2) 6월 25일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 1455년 9월 5일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1459년(세조 5) 8월 25일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68년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1468년 세조의 사망과 1469년 예종의 사망 당시에는 원상의 한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그 뒤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고, 성종 즉위 직후에는 왕족 귀성군을 숙청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잘 나가던 안동 김씨가 김자점(金自點 1588년 ~ 1651년 12월 17일) 때문에 순식간에 추락했다. 구 안동 김씨는 이 때 이후로 거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김자점은 우계 성혼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성삼문의 단종 복위 운동을 고변한 김질이 그의 5대 조다.
그는 음서로 벼슬길에 나가 광해군 때에는 병조 좌랑에 이르렀다. 보통 음서직은 지방 수령이나 돌다가 그만두는 게 대부분이다.
그가 요직에 해당하는 정5품 병조 좌랑에 오른다는 것은 왕의 총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해군 때는 동인의 분파인 북인의 시대로, 서인인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의 당여들은 요직에 앉기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광해군 때 비선실세였던 김상궁(김개시)에게 뇌물을 많이 먹인 탓으로 분석하는 의견도 있다.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면서
정국이 혼란해지자 서인 소속 당여들과 의기투합했다. 그길로 그는 벼슬을 때려치고 이귀,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한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고,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해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자,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옥에 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 인의 인사들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했고, 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패전에 대해 심한 공격을 하는 일반 사류들에
의해 계속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 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1644년에는 경쟁 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그 뒤 대부분의 공신 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 사류들은 인조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인조의
의구심을 받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듯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혼인시켜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무리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인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해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가 즉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김자점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瀗) 등도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경주 김씨(경순왕敬順王의 33대손)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조 역신(逆臣)인 김자점(金自點)의 후손으로서, 멸문의 화를 피해 해주(海州)에 숨어들어간 가문의 후손이었다.
김구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손'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어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손이 충렬공(忠烈公),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모두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金自點)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이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팔봉산 양가봉(八峰山 楊哥峰)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後浦)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 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일이었다. 텃골에 처음 와서는 조상님네는 농부의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軍役田)이라는 땅을 짓게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 때에는 나라에서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왔다. 우리 문중(門中)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 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石物)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대사(婚喪大事)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 종으로서 속량 받은 사람이라 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歷代)를 상고하여 보면 글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