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청은 가난한 백성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던
기관이었습니다.그리고 이런 먹을 것 제공에 그치지
않고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이라든가 수공업까지
가르쳐 줌으로써 백성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한 기관이었습니다."-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토정 이지함이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설립한
빈민구호시설 ‘걸인청(乞人廳)’은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사회복지관 ‘토인비홀
(Toynbee Hall)’보다 300년을 앞선 것이다.
토정 이지함이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
(莅抱川時上疏)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國富論)’이라
할 만하다. 이는 세계 최초의 근대 경제학 저술로
일컫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
즉 ‘국부론(國富論)’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탁견이다.
그는 경세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자였고, 사회복지의 선구자였다.
토정 이지함은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백성들의 삶과 함께 했다.
육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가보려도 하지 않았던 저 머나먼 유배의 땅 제주도를 왕래하기도 했다.
양반과 선비라는 허장성세로 뒤덮인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업인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고, 섬에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사꾼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닦아 언젠가 다가올 경륜을 펼 시간을 준비했다.
토정 이지함은 탁상공론에 가까운 선비의 삶, 머리로만 지혜를 추구하는 선비의 삶 대신에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한 불쌍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헌신한 실용주의자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경세사상은 포천 상소문에 가장 잘 드러난다.
당시 포천은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꼽혔다.
이지함은 가난한 포천을 구제하기 위해 당시의 일반적인 빈곤 구제 방법인,
서울에 비축된 곡식을 빌려와 해결하는 방식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에 이지함은 ‘자립’만이 해법이라며, 그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방안인 3대 창고 개발론을 제안했다.
3대 창고의 첫째는 ‘도덕창고(道德之府庫)’,
둘째는 ‘인재창고(人材之府庫)’
셋째는 재화의 창고를 말하는 ‘백용창고(百用之府庫)’다.
도덕창고론은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모두가 사치와 사욕을
절제하고, 마음의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나누자는 정신개혁론이다.
인재창고론은 인재를 발굴하고, 활용해 난국을 해결하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주장이다. 그는 나라가 서 있는 한 인재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면서 재능에 따른 인재 배치를 강조했다.
백용창고론은 육지와 바다의 다양한 자원을 아끼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발하자는 주장이다.
토정 이지함의 실용주의 경세론은 아산현감 때 설치한 ‘걸인청(乞人廳)’에서
꽃을 피운다. 포천현감 시절에도 그와 비슷한 집을 지어 빈민들을 거두어
각자 생업을 주선하여 새 삶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포천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에 백성을 위한 건의를 했으나
조정에서 받아주지 않자 미련 없이 현감 직을 내버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가 아산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선조 11년(1578)이었다.
토정은 고을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뜻밖에도 거지가 매우 많은 데 놀랐다.
거지뿐 아니라 늙고 병들어 벌이도 못한 채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걸인청이었다. 그러자 아전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반대를 했다.
“사또! 거지새끼들은 모조리 쓸어다가 아산 바깥으로 내쫓아버리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무슨 까닭에
걸인청을 만들어 우리 고을을 거지소굴로 만들려고 하십니까요?”
토정이 목청을 가다듬어 아전들을 꾸짖었다.
“어허, 고얀 놈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따뜻이 보살펴주는 것이
수령의 본분이 아니더냐? 내가 걸인청을 세우려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 양민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과 땅을 갖게 하여
잘살게 하려는 것이니라. 너희가 건물이 없다느니 재물이 없다느니
핑계를 대지만 건물은 세미(稅米)창고를 비워서 수리하면 될 것이고
재물은 한 해 동안만 먹여주면 자립할 방도가 마련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걸인청을 만든 토정은 관속을 풀어 고을 안의 거지들을 죄다 잡아들여
수용하고 일을 시켰다. 노약자와 병자들은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는 쉬운 일을
시켰고, 젊고 튼튼한 거지들은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시켰다. 그 밖에 손재주가 좋은 자들에게는 도구를 마련해주고
수공업에 종사토록 했으니,
이야말로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산 교훈에 다름 아니었다.
걸인청의 모습과 크기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몽인이 언급한 사료에는 토정이 빈민을 위해 “거두(巨竇)”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두(竇)’는 움집을 뜻한다. 이 말이 사실에 근사하다면
걸인청은 큰 규모의 움집 형태로 지어졌고 초가지붕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토정유고』에는 이 말을 바꾸어 “거실(巨室)”로 표기하고 있다.
어떤 말이 사실에 근사한 지는 현재 논하기 쉽지 않다.
소설 <토정비결>은 걸인청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여보게, 잠깐만. 이 방은 뭐하는 덴가?"
"예. 걸인들이 쉬었다 가는 걸인청입니다.……이곳을 지나는 걸인이면
아무나 여기서 먹이고 재우고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제각기 기술을
익히고 적으나마 살림 밑천을 마련하면 양민이 되어서 이곳을 떠납니다.
그 동안 이곳을 스쳐간 사람이 굉장히 많답니다. 이제 이곳 아산의 걸인이나
유랑민들은 다 없어졌으나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찾아오는 바람에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답니다. 현감 어르신은 조석으로
이곳에서 걸인이나 유랑민들과 함께 진지를 드시고 같이 일도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