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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영국 항일 언론인 베델(Bethel 裵說)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03.12|조회수451 목록 댓글 0


어네스트 T 배델(Ernest T Bethel 裵說 1872~1909)은 영국인으로 항일 필봉(筆鋒)의 선구자다.

그는 1904년 7월 18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와 함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고 헤이그 특사사건,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등 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일본의 방해와 회유에도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이미 발행부수가

1만부로,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 총발행부수의 두배를 넘었다.

일본 통감부는 이런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쳤다.

당시 일본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매일신보의 위력을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동맹 관계에 있던 영국 정부와 함께  이 신문의 일부 논지를 국제적으로 문제삼아

배델을 두차례나 영사재판에 걸었다. 결국 그는 상하이에서 3주간의 징역을 살면서 재판을 받았다.

그 후유증인지 배델은 재판후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심장병을 앓기 시작하여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1909년 5월 1일 베델이 숨을 거둔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울 서대문역 농협중앙회터).정진석 교수 제공

배델이 죽어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기까지의 과정을 2018년 7월 17일 서울신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09년 5월 1일.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에서 한 젊은 영국인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로 대한매일신보를 창립한 베델이었다.
겨우 서른일곱살. 머나먼 이국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그는 마지막을 직감한 듯 ‘동반자’ 양기탁의

손을 잡고 짧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세요.”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전국 각지에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베델이 죽은 지 5개월이 지난 1909년 9월에도 평안북도 희천의 대명학교에서 신보사에 조의금을

보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한 박은식(1859~1925)은 만사(輓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하늘이 공을 보내고는 다시 데려갔구나./구주의 의혈남아 동쪽의 어둠을 씻어 내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을 뿌렸네./꽃다운 이름 남아 다함없이 비추리.”

                  사진은 배델선생기념사업회 카페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5월 2일 오후 3시 30분 서대문 자택에서 거행됐다.
영국 총영사관원들과 목사, 선교사, 언론인 등 수천명이 모였다.
오후 4시에 발인해 한강변에 있던 양화진 외국인 묘지(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운구 행렬에는 흰옷 입은 이들이 구름처럼 뒤를 따랐다. 신보는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양화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관을 묻고 묘를 흙으로 쌓아 올리는 것)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분상(봉분)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명이었다.”
5일에는 동대문 밖 영도사(동대문구 안암동 개운사)에서 추도회가 열려 400여명이 그를 추모했다.
6일에는 양기탁 등 10여명이 모여 종로에 베델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모두 259편의 만사(등록문화재 482호)가 모였다.
한국인들이 한 외국인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며 안타까워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의 죽음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코리언 데일리 뉴스지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에 대해 잊지 못할 위대한 것은 그가 일생동안 투사였다는 것과 끝가지 투사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타계를 슬퍼하던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묘비를 세웠다.
비문은 황성신문 주필이셨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제하의 사설을 써서
통감부의 검열도 받지 않은 채 호외를 발간하여 배포하신 장지연 선생이 지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 되었다. 잔악한 일제는 한국병탄 후 그의 비문을 깎아 없애 버렸다.

                       1964년 4월 3일 조선일보 5면에 실린 배델의 묘비 제막식 기사.

광복 후 20년이 지난뒤 한국편집인 협회의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일제가 깎아 버린 묘비 옆에

원래의 비문 내용을 새겨 새 비를 세웠다. 그 비문을 아래 옮겼다.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공은 서기 1872년에 영국에서 탄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하여 상업에 종사하더니
나이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와서 누거만(累巨万)의 재산을 모았으나 얼마 후에 실패에 부딪쳐

울적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다가 마침 일로전쟁이 터지게되매 서울에 와서 신문사를 창설하였으니

때는 정히 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그러다가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유족으로는 아들 하나이 있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痛飮)할 적에 비분강개하여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 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언론인으로서,항일투사로서,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배델 배설(裵說)이다.

그는 일제 때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한국민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어 주다 옥고 끝에 이 땅에서 순절한 영국 출신의 항일 언론인으로 한국인 가슴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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